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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가방 디자인부터 포장까지 혼자서… 인생 걸음마 뗀 ‘빙상 여제’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17년 신던 스케이트화 벗고

가방 디자이너 된 박승희


“에코백 종류별로 작업 지시서 파일을 이메일로 드렸는데, 못 받으셨나요? 거기에 로고 사이즈가 다 적혀 있거든요.” 인터뷰 도중 날염 공장 사장에게 걸려온 전화에 박승희(29)가 능숙하게 답했다. 대한민국 최초 올림픽 쇼트트랙 전 종목 메달 획득, 역대 한국 동계 올림픽 최다 메달리스트. 그 ‘빙상 여제’가 맞나 싶다.


신기한 눈으로 보자 박승희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운동할 때보다 더 정신이 없어요. 돌발 상황이 늘 터지거든요. 가끔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규칙적인 선수 생활이 그리워요(웃음).” 화사한 니트에 긴 치마를 입고 직접 디자인한 가방을 멨다. 얼음판 위에서 빙상복 입은 박승희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낯선 모습이다.


스포츠 스타 박승희가 가방 디자이너로 변신했다. 은퇴 2년 만인 작년, 가방 브랜드 ‘멜로페’를 만들었다. 하체 근육으로 빙판 위를 가르며 세계 최정상에 오른 선수가 손가락 잔 근육 움직여 가방을 디자인한다. ‘반전 인생'을 사는 박승희를 지난달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조선일보

"다른 선수들이 가지 않은 길이라 더 성공하고 싶어요." 손수 디자인한 가방, 2014년 소치에서 신은 스케이트화를 함께 두고 박승희가 웃었다. 그는 "돈 버는 것보다도 운동만 했던 후배들에게 은퇴 후 다른 길에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7세 은퇴자, 인생 걸음마를 배우다

-운동선수는 은퇴 후 대개 지도자나 해설자로 살지 않나.


“나는 꼭 체육계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은퇴했을 때 겨우 스물일곱 살이었다. 운동선수로는 황혼기지만, 인생으로 보면 이제 첫 발걸음을 떼는 시기라고 봤다. 요즘은 더더욱 한 가지 일만 할 수는 없는 시대 아닌가. 또래 친구들은 제2, 제3의 직업까지 고민하더라. 운동에만 갇혀 있고 싶지 않았다.”


-유명인이 홍보용으로 얼굴만 빌려주는 경우도 있던데.


“전혀 아니다. 1인 기업, 내가 사장이자 유일한 직원이다. 가방 디자인부터 소재 선택, 생산 위탁,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 관리, 회계까지 혼자 다 한다. 암사동 가죽 공장에 가서 소재도 살펴보고, 주문받은 물건을 직접 포장해 부친다. 선수 때보다 더 바쁘다. 그땐 군대처럼 모든 일정이 고정돼 있었는데 지금은 정반대다. 쉬는 날에도 전화 오면 곧장 공장으로 뛰어간다(웃음).”


-운동복 차림 박승희만 떠오르는데 패션업에 도전했다니 의외다.


“원래 옷에 관심이 많았다.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선수촌에 있다 보니 온라인으로 옷 쇼핑을 자주 했다. 신진 디자이너 옷을 많이 샀다. 택배 수신 주소가 ‘태릉 선수촌’이고, 수신자 이름이 박승희니까 옷을 파는 디자이너 몇몇이 빙상 선수 박승희라는 걸 눈치챘다. 그들이 공방에 놀러 오라고 했다. 그 인연으로 비시즌 때 주말마다 패션 학교 교수가 운영하는 작업실에 가서 옷 만드는 걸 배웠다. 현역 때도 운동선수보다 패션 업계 종사자를 더 많이 알았다.”


2018년 평창 올림픽 직후 은퇴하고, 그해 패션 학교 ‘에스모드 서울’의 여름 학교에 참여했다. “막상 옷 만드는 법을 배워 보니 너무 즐거웠다. 진지하게 패션업을 시작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9년 4월 영국으로 향했다.


조선일보

박승희는 인터뷰 내내 활력이 넘쳤다. 까르륵 웃는 모습에 어울리는 별명은 '빙상 여제'가 아니라 '풋풋한 청춘'같았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본격적으로 패션을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나.


“모르는 분야에 도전하려다 보니 두려움이 앞섰다. 주변의 우려를 들으면서 자존감이 극도로 떨어져 더는 한국에서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영국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한 다음 날부터 일주일은 아침마다 엉엉 울기만 했다. 외롭고 무서웠다.”


-영국에서 얻은 게 있다면.


“혼자 살아보는 것 자체가 아주 큰 도전이었다. 운동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선수촌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다 보니 부모님에게서 독립한 적도 없고, 돈 관리를 직접 해본 적도 없었다. 영국에서의 6개월은 홀로서기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운동 기계 되긴 싫었다

박승희 가족은 ‘빙상 금수저 가족’이라 불린다. 언니 박승주, 남동생 박세영도 각각 스피드 스케이팅과 쇼트트랙 국가대표를 지냈다. 2014년 소치 올림픽 때는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삼남매가 함께 태극마크를 달기도 했다. 남매가 스포츠를 시작한 계기가 특이하다. 어머니 이옥경(55)씨가 중학교 시절 피겨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 일본 만화 ‘사랑의 아랑훼즈’에 빠진 추억 때문에 아이들을 빙상장으로 데려갔다. 박승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박승희는 “엘리트 선수 교육은 견디기가 힘든데, 함께 운동하며 의지할 가족이 있으니 좀 더 재미있게 운동할 수 있었다”고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원래 빙상 종목이 돈이 많이 드는데, 우리는 다른 집안보다 세 배로 많이 필요했다. 부모님이 집을 팔아 연습장 근처로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2014년 금메달을 따고 부모님께 아파트를 마련해 드렸다.”


-가방 디자인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


“어머니가 우리 삼남매한테 운동을 시킬 때 아이들 인생을 당신이 결정하는 것 아닌가 싶어 걱정이 많으셨단다. 취미반에서 1년 정도 타게 해보니 생각보다 실력이 좋아 선수반에 등록하게 되면서 일이 커진 거였으니까. 내가 은퇴할 때 ‘앞으로 네 인생은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라’고 하시더라. 지금도 전폭적으로 응원해주신다.”


초등학교 시절 삼남매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 훈련을 받고, 오전 9시에 등교해 오후 3시까지 공부했다. 하교 후 오후 9시까지 다시 훈련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에 출전해 동메달 2개(1000·1500m)를 따냈다. 3000m 계주 결승에서도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1등으로 들어왔지만, 동료 김민정이 중국 선수를 치면서 방해했다는 판정이 나와 실격 처리됐다. 박승희는 “누가 봐도 실격 처리할 만한 접촉이 아니라 억울했다”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판정 덕분에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고 했다.


-무슨 의미인가.


“그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면 그 길로 은퇴했을 거다. 운동 시작할 때 목표가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목표를 이루면 미련 없이 관둘 생각이었다. 운동 말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고등학생 땐 꿈이 영화배우,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그런데 금메달을 눈앞에서 뺏기니 울분이 가시질 않았다. 다음 올림픽까지 4년간 운동만 했다.”


박승희는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1000m 개인, 3000m 계주), 동메달 1개(500m 개인)를 땄다. 한국인 동계올림픽 최다 메달리스트(5개), 한국 여자 쇼트트랙 선수 중 올림픽 전 종목에서 메달을 따낸 최초의 선수가 됐다. 하지만 은퇴 대신 그가 선택한 건 새로운 종목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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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1000m 결선에서 1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한 뒤 양 팔을 번쩍 치켜들고 있다. /주완중 기자

-왜 종목을 바꿨나.


“처음엔 은퇴하려고 했다. 금메달을 땄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치 500m 종목에서 1등으로 달리다가 영국 선수와 충돌해 동메달에 그쳤다. 나는 그 전부터 유독 다른 선수들과 충돌이 잦았다. 올림픽 무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니 더 이상 쇼트트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평창이었다. 또 국내 빙상계에서 두 종목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아직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에서 최초가 되고 싶어 스피드 스케이팅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해 10월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 한 달 만에 국가대표에 뽑혀 2018년 평창올림픽에 출전했다. 메달은 못 땄다.


-쇼트트랙으로 최전성기를 달리다가 종목을 바꿨다. 과거의 영광에 미련이 없는 편인가.


“왜 없겠나. 만약 그때 전향하지 않았더라면 평창 올림픽에 쇼트트랙 선수로 출전해 메달을 더 따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매 순간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자는 게 내 신념이다.”

닮은 듯 다른, 스케이트와 가방

-운동과 가방 디자인의 다른 점이 뭔가.


“운동은 ‘1등’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고, 거기 맞춰 체계적으로 훈련한다. 반면 패션엔 똑 부러지는 답이 없다. 각자 추구하는 스타일이 다르고, 취향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가방 만드는 일이 인생과 더 닮은 것 같다.”


-운동 선수 경험이 일하는 데 도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국가대표 출신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잘난 건 없는데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 17년 동안 끊임없이 운동하다 보니 오래 쉬지 못하는 성격이 됐다. 부지런하게 사는 게 몸에 밴 것 같다.”


맨땅에 헤딩해 창업한 지 이제 5개월 차. “아직 매출을 집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업 초반”이라고 했다.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해 보니 어떤가.


“한국은 엘리트 선수들이 은퇴 후 다른 분야로 진출하게 돕는 사업이 거의 없다. 국가대표라고 해도 평생 운동만 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은데, 방법을 모르니 체육계를 못 벗어나는 거다. 그래서 성공하고 싶다. 내가 패션업계에서 자리 잡으면, 다른 일에 도전하고 싶어도 용기 없던 후배들이 나를 보며 ‘나도 뭔가 다른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또 변신할 건가.


“당연하다.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해설도 하고 싶고, 강연도 다녀 보고 싶다. 아, 영화배우는 너무 늦었나? 하하!”


인터뷰가 끝나자 박승희는 택배를 싸야 한다며 서둘러 후암동 주택가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한 팔엔 직접 디자인한 핸드백이, 다른 한 팔엔 사진 촬영용으로 들고 온 2014년 소치 올림픽 때 신은 스케이트화가 걸려 있었다. 두 개의 인생이 박승희를 스치고 있었다.


[유종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