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힘들 때 웃는 사람이 일류… 다시 음악하려 ‘버터’부터 듣고 있죠”

[라이프]by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부활의 아이콘 된 ‘룰라’ 가수 이상민

1980년대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살던 소년. 중국집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배달 돕던 그의 꿈은 ‘부자’였다. 길 하나 건너 부자 동네 성산동으로 배달을 갈 때마다 그 꿈을 다졌다.


음악과 춤을 좋아했다. 그 두 가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러다 눈에 띄어 그룹 ‘룰라’로 데뷔했다. 2집 ‘날개 잃은 천사’로 최고 인기를 누렸다. 너무 바쁜 일정 탓에 차 대신 헬기를 타고 다니는 생활이었다.


제작에도 욕심이 생겼다. 미 프로듀서 MC해머가 그의 롤모델이었다. 샤크라, 컨츄리꼬꼬, 샵 등 만드는 가수마다 성공했다. 저작권료만 매달 2000만~3000만원. 지금으로 치면 2억~3억원에 이르는 금액이다. 사업을 시작했다. 격투기를 보며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 대박이 났다.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만 48억원. 대중음악계 ‘성공 신화’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격투기 선수가 사망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자기 이름으로 발행한 약속어음과 당좌수표만 57억원. 총 69억8000만원의 빚쟁이가 됐다.


지금도 그 빚을 갚아나가고 있는 이상민은 이제 ‘부활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현재 고정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만 예닐곱. ‘룰라’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겐 ‘일류갑’으로 통한다. 한 TV 강연에서 “힘들 때 우는 자는 삼류, 힘들 때 참는 자는 이류, 힘들 때 웃는 자가 바로 일류다”라고 발언한 덕분이다. 서울 상암동에서 이상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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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상암동 방송사 대기실에서 거울을 보며 웃고 있는 이상민. 가수 겸 프로듀서 이상민으로 성공해 사업가 이상민으로 실패했던 그는 이제 방송인 이상민으로 빚을 갚아 나가고 있다. / 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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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스타 특강쇼’에서 강연 중인 이상민.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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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이 가수 겸 프로듀서로서 최정점에 있던 시절, 자신이 만든 가수 룰라, 샤크라, 디바, 컨츄리꼬꼬 등을 모두 모아 만든 그룹 ‘브로스’. / 유튜브

-우여곡절의 시간을 어떻게 버텼나.


“어떤 일을 극복할 때, 방법을 알고 극복했던 것도 있지만, 살다 보니 극복된 것도 많다. 빚만 해도 그렇다. 만일 내가 15년 전에 ‘당신은 15년 뒤 빚을 갚아가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미래를 알았다면 너무 힘들어 포기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죽을 때까지 이걸 마무리하고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내심 3~4년 안에 ‘무언가가 잘돼서 극복할 수 있겠지’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그대로고, 5년이 지나도 그대로더라. 그래도 또 ‘앞으로 5년이면 끝나겠지’ 하며 계속 일하다 보니 15~16년이 흘렀다.”


-빚을 다 갚았는데 방송 콘셉트 때문에 안 갚은 척한다는 말도 있다.


“다 갚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보는 사람들은 너무 오래돼 지긋지긋하니깐 다 갚고 저러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다 갚으려고 하면 극복해야 할 것이 많다. 어머니 병원비도 많이 나가고.”


-‘힘들 때 웃는 자가 바로 일류’라는 말로 ‘일류갑’이란 별명을 얻었다.


“어려울 때 좋다는 말들을 찾아 읽었다. 그 말이 셰익스피어 명언이라고 봤는데, 너무 좋아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어쨌든 즐기면서 헤쳐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에서 간직했던 말이다.”


-화려하게 살던 사람이 무너지면 제일 힘든 게 과거의 삶을 못 놓는 건데, 그걸 버렸을 뿐 아니라 희화화해 예능까지 하고 있다.


“연예인이란 직업은 잘되면 더 잘된 것처럼 포장이 되고, 망하면 더 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내가 망했을 땐 이미 회생 불가능한 사람처럼 소문이 났다. 건강을 잃었다는 말도 돌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성격도 못 되지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단계가 되도록 만들어졌다. ‘재기 불가능한 애인데 왜 도와줘.’ 그런 상황을 10년 넘게 겪다 보니 진짜 그런 상황이 돼 버렸다. 사람들은 지금도 ‘다 극복한 걸까? 연예인은 한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저러다 또 잘못될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순간 무너진 연예인의 이미지는 극복하는 데 10~20년까지 걸린다. 물론 더 빨리 극복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나 이제 더 이상 건들지마’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 극복하는 데 10년 걸렸고, 앞으로 10년 잘 사는 모습 보여주면 ‘쟤 진짜 괜찮은 친구야’라고 모두가 인정해주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이미 빚을 성실하게 갚고 있으니 신용은 두세 배가 된 것 아닌가.


“나와 금전적 문제가 있었던 분들과는 더 돈독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와 관계없던 사람들, 내 이야기를 소문이나 기사로 들은 사람들에게 ‘참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인정받아야 그때 진짜 인정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인정받으려고 하면 너무 힘들지 않은가.


“그게 연예인인 것 같다. 연예인으로서 살려면 그렇게 사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연예인의 삶이 잘 맞나?


“성향이 약간 폐쇄적이다. 그래서 맞는 것 같다. 작업실에서 작업만 하면 되고, 내가 키우는 아이들만 봐도 되고. 그런데 사업을 하면서 조금씩 힘들어졌다. 비즈니스는 결국 사람과 하는 싸움이고, 사람을 만나 해야 하는 것이 많다. 그걸 잘 못 하다 보니, 믿었던 사람들에게 일을 맡겼고, 그들이 실수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난 요즘도 집에 혼자 있다가 일할 때만 밖으로 나간다. 일하러 나가는 건 즐겁다. 내가 만약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이 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만나면 골프·주식·자식 이야기만 한다는데, 난 이 세 가지 다 안 하니까 방송 이외의 다른 즐거움이 없다.”


-사업가 이상민보다 연예인 이상민이 더 행복한가?


“지금은 그렇다. 사업가의 삶은, 좋은 순간은 너무 짧고 힘든 시간은 너무 길었다.”


-파산 신청을 했으면 그 힘든 시간이 줄어들었을 텐데.


“선배 사업가들이 그러더라. 첫 번째 부도는 ‘당했다’고 표현하고, 두 번째부터는 ‘부도를 냈다’고 표현한다고. 첫 부도는 이걸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하다가 당하는 거고. 부도를 내는 사람은 한번 당해봤기 때문에 이 정도 됐을 때 ‘부도를 내야 내가 산다’ 해서 낸다고. 난 부도를 당한 후 마무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후회는 없다. 그런데 이런 말은 하고 싶다. 사업에 망한 분들이 있다면, 파산이나 회생이라는 제도는 한 번쯤 들여다보라고. 난 자존심으로 버텼지만, 나 같은 경우가 쉽게 만들어질 순 없을 테니까.”


-후유증도 있을 것 같다.


“공황장애를 7년째 앓고 있고, 지금도 약을 먹는다. 원래는 방송이나 소셜미디어에서 개인적 고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요즘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공황장애만 해도 수십 가지 약 중 나와 맞는 약을 찾는 데 2년이 걸렸다.”


-여러 가수를 성공시켰다.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모든 가수의 첫 곡이다. 컨츄리꼬꼬의 ‘오 해피’, 샤크라의 ‘한’, 샵의 ‘예스’, 브로스의 ‘윈윈’, 이혜영의 ‘라돌체비타’. 모든 가수는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만 히트하면 5년 이상 생명력이 유지된다. 그 한 곡이 성공하면, 두 번째 앨범부터는 너무나 많은 작곡가가 명곡들을 쏟아부어 주기 때문이다.”


-가수들마다 콘셉트가 분명하더라.


“머릿속으로 콘셉트를 완성한 뒤, 가수들을 찾아다닌다. ‘샤크라’는 당시 인도 테크노 음악을 많이 듣다가 구상한 뒤 인도 사람처럼 생긴 멤버를 찾으러 다녔다. ‘컨츄리꼬꼬’는 ‘서세원의 토크박스’를 보다 웃길 줄 아는 가수가 잘될 것 같아 만들었다.”


-K팝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다.


“‘종합 선물 세트’ 같기 때문이다. 사실 K팝은 장르 구분이 안 된다. 미국 대중음악은 힙합이면 힙합, 알앤비면 알앤비, 댄스면 댄스 장르가 분명하다. 그런데 K팝은 댄스인데 알앤비 같고, 라틴 같기도 하다. 내가 만든 음악이 그랬다. 선배들이 ‘쟤 음악은 그냥 짬뽕이야’라고 했다.”


-IMF 외환 위기 때 국민들에게 위로를 안겨준 ‘하나 되어’를 22년 만에 코로나 극복을 위해 다시 불렀다.


“22년간 대한민국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만큼, 내게도 많은 희로애락이 있었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 이번 노래를 프로듀싱한 최준영 작곡가는 내게 선생님 같은 분이다. 룰라 2집을 제작해 날 스타로 만들어줬고, 음악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다. 최 작곡가가 다시 한다길래 바로 참여했다.”


-앞으로 꿈은?


“어릴 때 꿈은 ‘부자’가 되는 거였다. 망하고 나서 알았다. 부자는 꿈이 될 수 없다는 걸. 지금은 아주 평범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누리는,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사는 게 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수 하나 만들고 싶다. 그때의 희열을 다시 느끼고 싶다. 음악도 다시 듣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버터’부터 듣고 있다. 앞으로 2~3년 안에 시작할 계획이다.”


[이혜운 기자]

2021.08.0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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