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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기사님, 마포 더 프리미엄 센트럴 포레스트로 가주세요!”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욕망 투영된 아파트 作名 변천사

이름은 왜 점점 길고 어려워지나

#. “우리 아파트 이름을 요즘 유행하는 이름으로 바꿔봅시다. 뭔가 입에 착착 감기면서 고급진 걸로. 예를 들어 우리가 택시를 탔을 때 ‘어디를 가주세요~’ 해야 기분이 좋을지 상상을 해보자고.”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이 구역의 미친X’의 한 장면. 홍직중앙아파트 집값 상승을 위해 ‘아파트 네이밍(naming·이름 짓기) 변경 안건’ 부녀회 회의가 열렸다. “홍직센트럴 아파트 어때요? 중앙이란 뜻 살려서” “홍직 빼고 마포센트럴 아파트가 더 낫지 않나?” 점점 더 ‘고급진’ 작명이 쏟아져 나온다. ‘마포 프레스티지 센트럴 캐슬’ ‘마포 더 프리미엄 센트럴 포레스트’ ‘마포 노블레스 센트럴 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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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이 구역의 미친X'에서 부녀회장이 '아파트 네이밍 변경 안건'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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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이 "기사님, 마포 더 프리미엄 센트럴 포레스트로 가주세요"라고 상황극을 연기하며 새 아파트 작명 후보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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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센트럴 아파트, 마포 프레스티지 센트럴 캐슬, 마포 더 프리미엄 센트럴 포레스트.. 부녀회 회의에서 취합된 새 아파트 작명 후보들이 보인다.

입주민도 못 외울 아파트 이름

드라마 속 풍경만이 아니다. 아파트 이름이 갈수록 기괴해지고 있다. 길이도 10자 이상으로 길어지고, 외국어를 조합해 만든 정체불명 이름도 많다. ‘래미안 DMC 루센티아’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 ‘과천 센트럴파크 푸르지오 서밋’…. 모두 최근 입주했거나 입주를 앞둔 새 아파트 단지 이름이다.


무슨 뜻일까.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아파트 ‘래미안 DMC 루센티아’를 뜯어보자. 래미안은 건설사인 삼성물산의 아파트 브랜드 이름이고, DMC는 디지털미디어시티(Digital Media City)의 약자. ‘루센티아(Lucentia)’는 은은하게 빛난다는 의미를 가진 ‘루센트(Lucent)’와 중심을 뜻하는 ‘센터(Center), 휘장을 나타내는 ‘인시그니아(Insignia)’를 결합한 신조어다. “강북 뉴타운을 대표하는 단지에서 누릴 수 있는 빛나는 라이프를 상징하며, 완벽한 편의를 갖춘 아파트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는 게 건설사 설명이다.


부동산 정보업체 부동산인포에 따르면, 2019년 분양한 전국 아파트명 글자 수 평균은 9.84자. 1980년대엔 3자, 1990년대엔 4.2자였다. 2019년 전국 분양 단지 중 가장 이름이 긴 아파트는 ‘이천 증포 3지구 대원 칸타빌 2차 더테라스’로 총 18자에 달한다. 지역명에 택지 지구, 브랜드, 차수, 설계 특징까지 담은 작명이다.


당연히 불만도 쏟아져 나온다. 서울 강남구의 전업주부 정모(42)씨는 “시골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실 때마다 아파트 이름을 기억 못 해서 여러 번 전화 걸어 재확인하시고, 급하게 배달 앱에 주소를 입력할 때도 일일이 적기 불편하다”며 “아파트 이름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도 아니고, 무조건 늘리고 보자는 건 코미디”라고 했다.


오죽하면 한 유머사이트 게시판엔 “할머니가 택시 탔는데 아파트 이름이 생각 안 나서 ‘뭐더라 니미시X 아파트?’ 하니까 택시 기사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리젠시빌 아파트’로 데려다줬다더라”는 우스개까지 나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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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이름엔 현대인의 욕망 투영

초창기 아파트 이름은 대부분 동네 이름을 따라 지었다. 해방 이후 최초의 아파트는 1958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지은 ‘종암아파트’. 4년 뒤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는데 이름이 ‘마포아파트’였다.


채완 동덕여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아파트 이름의 사회적 의미’라는 논문에서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아파트 이름 짓기 방식은 세 단계의 변천 과정을 거쳤다”며 “초기에는 회사명이나 지역명에 ‘아파트’를 붙이다가 1990년대에 대량 조성된 신도시에서는 ‘단지명+회사명’으로 이름 짓는 것이 유행이었고, 1990년대 말부터는 개별 아파트 상표명이 도입됐다”고 했다.


과거에도 고가(高價) 아파트일수록 외국어 이름이 많았다. 2003년 ‘최고가 아파트’ 10위 안에 오른 이름은 트라움하우스, 힐데스하임, 타워팰리스, 가든스위트 등등. ‘타워’ ‘로얄’ ‘팰리스’처럼 왕족이나 귀족의 거주지라는 의미를 넣어 ‘돈 많고 신분 높은 사람들이 사는 곳’임을 내세웠다.


웰빙 바람이 한창 불었던 2004~05년엔 ‘파크’ ‘리버’ ‘힐’처럼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강조하는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지성적이고 첨단적인 생활 추구를 뜻하는 ‘i’나 ‘e’를 아파트 상표명에 넣거나(대림 e-편한세상), 예술적 생활을 누린다는 의미의 작명(롯데 캐슬 오페라, 한라 비발디), 행복한 가정을 뜻하는 ‘홈’ ‘패밀리’ ‘해피’ 같은 이름(신동아 파밀리에, 신일 해피트리)도 유행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이름(동서 리치모아)도 나왔다. 채완 교수는 “구매자로 설정된 계층의 욕망을 구체화하기 때문에 아파트 이름엔 현대 한국인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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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개포주공 1단지 재건축 공사 현장.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라는 긴 이름이 입구에 걸려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이름은 왜 점점 길어지나

아파트 이름이 갈수록 길어지는 이유에 대해 건설업계는 ①브랜드 아파트의 등장 ②아파트 특징을 나타내는 펫네임(Pet name) 사용 ③2~3개 건설사가 합작하는 아파트의 증가 등을 꼽는다. 예를 들어 ‘고덕 래미안 힐스테이트’는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이 컨소시엄으로 건립한 아파트. 지역명과 브랜드명만 넣었는데도 10글자에 육박한다.


특히 아파트의 개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펫네임 마케팅’이 유행하면서 본격적으로 길어지기 시작했다. 인근에 공원이나 숲이 있으면 ‘파크’ ‘포레’를 넣고, 강이나 수변을 나타내는 ‘레이크’ ‘오션’ 등을 넣는 식이다. 둘 이상을 혼합한 ‘리버포레’ ‘노블테라스’ 등도 나온다. 권일 부동산인포 리서치팀장은 “아파트 이름이 집값에 미치는 영향이 분명 있기 때문에 유명 건설사가 시공하는 경우 조합원이나 건설사 모두 각 건설사 브랜드를 단지명에 넣고 싶어하고,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아파트에 제일 멋진 이름을 짓고 싶으니 점점 더 길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아파트에 미치다’의 저자인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일종의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자동차와 보행자의 유입을 엄격히 차단해 보안성을 극대화한 주거 형태)’ 현상”이라며 “외부에 설치된 ‘바(bar)’가 보이는 저지선이라면, 길고 복잡한 이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저지선의 상징”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또 “‘단지형 아파트’가 많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인데, 구조적 특징상 단지를 대표하는 간판 같은 게 필요해서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라며 “하지만 우리나라도 점차 길거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가로형 아파트’로 바뀌는 추세다. 가로형 아파트가 늘어나면 지금 같은 이상한 이름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허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