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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정동현의 Pick] 동파육

뭉근한 불에 푹 익힌 삼겹살 입안에서 춤추듯 녹아내리네

by조선일보

조선일보

마포 핑하오 동파육-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아무튼주말 사용전 게재 금지)

동파육(東坡肉)은 상상 속 음식이었다. 어릴 적 중국집에 가면 동파육은 이른바 게임 속 끝판 대장처럼 메뉴판 맨 마지막에 자리 잡았다. ‘저걸 시키는 사람이 있을까?’ ‘시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저 메뉴를 왜 써놓은 걸까?’ 매번 시키는 것은 짜장면, 탕수육이었지만 늘 이런 생각을 했다.


동파육은 중국 북송 시대 시인이자 관리였던 동파 소식(蘇軾)이 처음 만들었다. 소동파가 지역 주민을 위해 창안한 최초의 조리법은 간단했다. 돼지고기를 물에 넣고 간을 한 뒤 향신료와 함께 푹 익히는 것이다. 지금도 이 조리법은 유효하다. 그러나 중국은 워낙 사람이 많고 땅이 넓으며 또 역사가 길다. 이 복잡한 함수 속에서 동파육 역시 다양한 변주를 겪었다. 무술의 초식이 변하듯 요즘은 돼지고기를 튀겼다 찌기도 하고, 큼지막한 정사각형으로 모양 내던 것을 얇게 포를 떠 장식하듯 담아내기도 한다.


서울 삼성중앙역 인근 ‘차이린’은 시초의 조리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동파육을 만든다. 쓰촨(四川) 요리뿐만 아니라 광둥(廣東) 등 중국 현지에 직접 연수를 가서 음식을 배워오는 이 집은 메뉴판을 펼치면 말 그대로 중국 전역이 한데 모여 있다.


메뉴 고르는 데 정답은 없지만 대중의 공식은 있다. 먼저 후끈한 ‘산라탕’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쿰쿰하고 시큼한 발효취는 중국 흑초를 썼기에 그렇다. 한 숟가락 떠 넣으면 내공이 들끓듯 후끈한 향과 맛이 배 속을 뜨겁게 한다. 광둥의 다섯 가지 보물이란 뜻을 가진 ‘광동오슬’은 죽순, 해삼, 샐러리와 같은 재료를 달걀흰자에 버무려 볶은 요리다. 구름처럼 몽실한 감촉이 입안을 훑고 각각 간을 하여 볶은 재료는 제각각 빛났다.


청경채를 목도리처럼 두른 동파육은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 각이 정확히 잡혀 있었다. 젓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듯, 입에 넣으면 백일몽처럼 처연히 녹아 내렸다. 옛 조리법대로 돼지고기를 졸이듯 오래 삶아 부드러운 식감이 극대화됐다. 단맛과 짠맛은 기름지고 고소한 돼지 비계를 배경 삼아 창과 방패가 겨루듯 긴장감을 자아냈다.


무술영화 세트장에 온 듯한 연남동 ‘중화복춘 골드’ 역시 중국 대륙 전체를 아우르며 다양한 메뉴를 취급한다. ‘만한전석 샨즈 냉채’ ‘흑화고 대하 해삼’ ‘목화솜 고로육’처럼 일반 중화요리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이름들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진다. 몇 가지 꼭 맛봐야 할 음식이 있다. 첫째는 ‘자연송이 일품 사자두 완탕’이다. 흰목이버섯, 망태버섯, 송이버섯, 표고버섯 등 각종 버섯이 그릇을 가득 채웠고 그 중앙에 소고기를 커다랗게 뭉쳐 만든 완자가 떠 있었다. 동충하초와 대추 등을 넣고 달인 국물은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입에 넣을 때마다 향나무 숲에 들어와 있는 듯한 정취를 냈다.


이 집의 동파육은 원조라 일컬어지는 항저우(杭州)가 아니라 인근의 쑤저우(蘇州)식이라고 했다. 쑤저우 전통 방식으로 돼지고기를 연잎에 싸서 쪄냈기에 오래 삶은 동파육에 비하면 식감이 살아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동파육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 비계 부분은 젓가락을 대자마자 몸을 풀었다. 살점을 물면 은은히 밴 연잎 향이 호숫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이 음식은 맛보다는 향이 더 앞서 나룻배가 지나간 흔적이 강 위에 남듯 여흥이 길었다.


마포로 자리를 옮기면 ‘핑하오’라는 집이 있다. 메뉴판을 보면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오룡해삼, 어향동고, 비풍당 마늘새우, 궁보기정같이 낯선 음식들이 하나씩 박혀 있다. 그중 비풍당 마늘새우는 큼지막한 새우 위에 튀긴 마늘 가루를 잔뜩 올렸다. 모래 속 보물을 찾듯 마늘 튀김 안에 묻힌 커다란 새우는 바삭하지만 살이 실해서 공갈빵을 먹는 듯한 섭섭함이 없다.


이 집 동파육은 주인장이 외국 호텔에서 홍콩 출신 요리사에게 배웠다고 했다. 조리법은 불에 굽고 향신료와 함께 삶는 게 첫째, 불 위에서 설탕을 익혀 캐러멜로 만든 뒤 비계에 입히고 이를 얇게 썰어 모양을 잡는 것이 둘째, 뜨겁게 끓인 쓰촨식 소스에 넣어 손님에게 내는 크게 세 단계 공정을 거쳤다.


얇게 썬 돼지고기는 살 사이사이 간장과 향신료 향이 깊숙이 뱄다. 입에 넣으면 폭탄이 터지듯 돼지고기가 한 번에 풀어지며 맛을 뿜어냈다. 쓰촨식으로 아리고 매운 소스는 혀와 입 천장, 그리고 저 위장 속까지 현란한 몸놀림으로 한바탕 춤을 췄다. 오래전 방구석에 앉아 읽던 ‘영웅문’이 떠올랐다. 도사의 입을 홀리고 마음을 빼앗은 소설 속 음식의 모습과 맛이 머리를 지나 코와 입으로 다가왔다. 어릴 적 동파육의 맛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 차이린: 광동오슬 5만원(중), 동파육 4만7000원(중). (02)543-2847


# 중화복춘 골드: 자연송이 사자두 완탕 6만7000원, 쑤저우 동파육 7만1000원. (070)8803-2207


# 핑하오: 비풍당 마늘새우 3만4000원, 동파육 3만8000원. (02)3274-1188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