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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소녀 가수’에서 ‘美 변호사’로, 악바리 이소은의 도전과 분투

넘어질 때마다 날 일으켜준 말 “잊어버려! 지금의 나로 충분해”

by조선일보

조선일보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선 이소은은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사진 기자가 포즈를 요청하기도 전에 ‘이런 것도 한번 해볼까요?‘를 먼저 외쳤다. 머리·화장 모두 직접 매만진 것이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열여섯에 혜성같이 등장해 김동률과 ‘기적’ ‘욕심쟁이’를 부르며 가요 차트를 평정했다. 가수 활동 중에도 토플시험 만점을 받으며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한 ‘연예계 엄친딸’이다. 스물일곱엔 돌연 가수 생활을 접고 미국 로스쿨에 지원해, 무려 4곳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뉴욕에서 변호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얼마 전 줄리아드 음대 교수로 임용돼 화제가 된 피아니스트 이소연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소은(40) 뒤엔 이렇듯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의 삶이 ‘성공’과 언제나 동의어는 아니었다. 실은 첫해 지원한 모든 로스쿨에서 떨어졌고, 로스쿨 1학년 땐 꼴찌나 다름없는 성적을 받고 좌절했다. 로펌 1년 차엔 일주일에 100시간 가까이 일하느라, 책상 아래 쪼그려 잠을 자다 들켰다. 병원 갈 시간 아끼느라 허리 통증을 방치해 허리 디스크는 고질병이 됐다. 이직하려 30곳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27곳에선 아예 답조차 받지 못했다.


자신의 좌충우돌 로스쿨 시절을 담은 책 ‘딴따라 소녀 로스쿨 가다’로 화제를 모았던 이소은이 그로부터 10년 만에 두 번째 책,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수오서재)를 내놨다. 첫 번째 책이 이소은의 ‘도전’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책에는 화려함 속에 숨은 이소은의 고뇌와 깨달음이 담겼다. 책 제목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질주와 분투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이다.


코로나로 2년 만에 모국에 온 이소은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음악도 하고 글도 쓰는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 소은아, 너는 점수가 아니야

–왜 미국 로스쿨이었나. 한국에서 공부해도 됐을 텐데.


“변호사가 되겠단 생각보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중2 때 EBS 창작가요제로 데뷔하면서 연예계라는 세상만 보고 살았다. 가수 이소은이 아닌 인간 이소은으로서 어떻게 살아갈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


–유명 로스쿨 4곳에 동시에 합격했다.


“첫해에는 응시한 대학에 다 떨어졌다. 나는 되게 느린 스타일이다. 100m보다는 마라톤에 강하다. 우리 집에선 나를 보고 ‘조금 오래 걸리지만, 대신 끝까지 가는 애’라고 이야기한다. 로스쿨 준비 학원 다니면서 1년 더 공부했다. 재수 끝에 원했던 학교로 가게 됐다.”


–이소은이 느린 스타일? 고2 때 토플 만점을 받았는데.


“나는 천재와는 거리가 멀다. 밥이 완성되려면 어느 정도 뜸을 들여야 하듯, 나도 그런 사람이다. 좌절하고, 일어서고, 노력하고, 그러다 잠깐의 성취를 한다. 토플은 내가 어릴 때 외국에서 산 데다, 언어를 좋아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프랭크 브루니’가 명문장을 골라 보내주는 뉴스레터가 있는데, 지금도 그걸 보면 가슴이 뛴다. 늘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기사도 찾아 읽고, 책도 많이 읽었다. 진짜 비상한 건 언니(이소연 줄리아드 음대 교수)다. 시험 전날 한 번 쓱 보고, 다음 날 다 까먹는데 결과는 좋다(웃음).”


–로스쿨 첫 시험에선 꼴찌를 했다던데.


“중간고사를 봤는데, 너무 어려운 과목이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교수님이 여름 인턴십 등을 지원할 때 참고하라며 성적 분포도를 보여주셨다. 마지막 하위 1%에 내 점수가 있더라.”


–어떤 마음이 들던가.


“‘아, 여기 괜히 왔구나. 실수했구나’ 싶었다. 엄마에게 전화해 법학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엉엉 울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아빠에게서 이메일이 와 있더라. ‘많이 자존심 상하겠지만, 잊어버려. 아빠는 너의 전부를 사랑하지, 네가 잘할 때만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잊어버려’는 이소은 아버지인 이규천씨가 만든 마법의 주문이다. 그는 자신의 책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에서 이 주문을 소개한다. “우리 가족이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잊어버려’다. 작은 딸이 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큰딸이 손끝이 터지도록 연습하고도 입상하지 못했을 때, 나는 딸들에게 수없이 ‘잊어버려’라고 말했다. ‘잊어버려’는 내가 한 실수와 판단착오에 따른 고뇌에 빠지지 않고 나를 용서하는 동시에 후회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진정제와 같다.”


–뭉클했겠다.


“나는 점수가 아니며, 그걸로 내 가치를 평가해선 안 된다고 말씀해주신 거니까. 다시 일어서서 해보면 되지, 그래도 안 되면 관두지 뭐, 이렇게 마음이 먹어졌다. 결국 끝까지 완주해서 중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했다.”


–미국에서도 가장 치열하다는 뉴욕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연예계라는 너무 강렬한 곳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했다. 그곳에선 남들이 만들어준 무대에서 노래 잘하고, 방송 잘하면 된다. 그 무대와 노래는 이소은 거다. 로펌에선 문서에 쓰인 모든 판례와 작은 단어 하나까지 다 내 눈으로 조사하고, 정확한지 확인해야 한다. 그 모든 걸 만드는데,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사회생활에선 너무 당연한 일인데,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계속한 이유는?


“내가 알던 세계가 깨져야, 새로운 걸 볼 수 있으니까.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이 맞는지 고민하지 말고, 결정하고서 그걸 옳은 결정으로 만들라는 것. 미국이란 낯선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경계선에 서서 나를 찾아가는 것. 그게 나한테 가장 좋은 성장의 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로펌에서 일한 지 3년 만에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 뉴욕지부 부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펌에서 승진해서 대표 변호사가 돼야지, 이런 생각 안 들더라(웃음). 막연하게 국제기구라는 세계는 어떨까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뉴욕에서 일하는 한국 사람인 만큼 국제적인 것에 훨씬 흥미가 있었다. 국제 중재를 많이 하는 로펌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를 살려 국제중재법원으로 가게 됐다.”


–가수, 변호사, 국제기구까지…. 뭐든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어서 결정이 쉬웠던 걸까.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할 때 6개월치 월급, 뉴욕은 물가가 워낙 비싸 적어도 1년치 월급이 통장에 있어야 한다더라. 아무래도 어린 나이부터 가수 활동을 했기 때문에 또래들보다 안정적일 수 있다. 그런데 무모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돈을 좇지 않고 일을 좇으면 돈이나 다른 부수적인 건 따라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있다.”

◇끝내주는 ‘B+’ 언니에게 많이 배워

사립대 교수였던 이소은 아버지는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다 파면당했다. 이후 소송 등을 이어가다, 서른여덟에 가족을 데리고 학비가 가장 싼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금수저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프리 런치(무상 급식)를 받았다. 한번은 교감 선생님이 나를 불러서 ‘너희 집에서 돈이 어디선가는 나올 거 아니냐’고 하더라. 아는 게 없다고 했더니, 아빠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다시 한국으로 왔을 때도 아빠가 자리 잡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엄마를 도와 나도 번역일을 거들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너무 힘들었다’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 일을 함께 도모했다’ 식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부모님 영향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엄마 아빠가 엄청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힘들어하셨다면, 우리도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괜찮아, 우리 해낼 수 있어’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재밌게,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국에선 외국에서 살았다는 것 자체로 동경하는 분위기가 있다.


“일곱 살 때 미국으로 갔는데, 6개월간은 아무 말도 안 했다. 학교에서 내가 언어장애가 있다고 생각해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할 정도였다. 부모님이 굉장히 마음 아파하셨다. 내가 집에서는 수다쟁이거든(웃음). 다시 한국으로 왔을 때도 사춘기의 혼란과 더불어 외로웠고 좀 힘들었다. 미국에선 남녀가 다 섞여서 축구하고 농구 경기를 했는데, 한국에선 남자들만 축구하고 여자들은 고무줄을 하라더라. 한번도 해본 적 없는데.”


–어떻게 극복했나.


“우리 땐 학교에 공중전화가 있었다. 겨울이었는데 엄마한테 전화해서 ‘나 몸도 춥고, 마음도 추워’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다음 시간 담임 선생님이 가방 싸서 교무실로 오라고 하더라. 그길로 엄마와 강촌으로 여행을 갔다. 학교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고구마 사 먹고 강촌 걸으면서 기차 타고 집에 왔다. 엄마 아빠는 늘 이런 것들을 많이 주셨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보다, 다른 세상을 보게 해주셨다.”


–어머니와 주고받은 이메일이 수백 통이라고 들었다.


“언젠가 엄마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책으로 꼭 내고 싶다. 로스쿨 2학년생일 때 엄마에게서 온 메일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우리 매일매일 꾹꾹 눌러서 살자.’ 아빠는 아빠 삶이 녹아들어 있는 이야기를 해주신다. ‘소은아, 인생은 많이 노력하고 많이 감사하고 많이 사랑하면 돼.’ 정말 맞는 말 아닌가. 이것 외에 우리 인생에 뭐가 더 있겠나.”


–지난달엔 언니 이소연이 줄리아드 음대 교수로 임용됐다는 소식이 있었다.


“2월에 언니가 일이 있어 뉴욕에 온다고 하더라. 그게 줄리아드 인터뷰였다. 언니의 여정을 쭉 지켜봐 왔고, 언니가 어떻게 자신을 관리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는지 아니까 너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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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은(왼쪽)이 언니 이소연 줄리아드 음대 교수와 함께 찍은 사진./이소은 인스타그램

–자매끼리 투닥거리지 않나.


“어릴 때부터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애틋하고 각별하다. 언니랑 주고받은 손 편지를 항상 지갑에 넣고 다녔다. 한번은 언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은아, 언니는 완전 끝내주는 비플러스(B+)야.’ 그때 언니가 첫아이가 생겨, 되게 정신없을 때였다. 연주량이 절대 부족하니 무척 힘들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대에 나가기 전에 그런 주문이 나왔단다. ‘괜찮아. 이게 내 최선이잖아. 이거로 안 되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니야. 나는 끝내주는 비플러스야!’”


이소은이 연예계에 데뷔하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가수 윤상이 우연히 EBS 창작 가요제를 보고, 수소문 끝에 이소은을 찾았다. 이후 이소은은 1998년 첫 앨범 ‘소녀’로 데뷔했다.


–창작 가요제는 어떻게 나가게 됐나.


“가수 이적 오빠의 광팬이었다. 중2 때 ‘패닉’ 앨범을 샀는데 충격이었다. ‘왼손잡이’를 듣고 ‘아, 이건 내 노래다’ 싶었다. 작사 작곡 편곡이 다 이적이었다. 나도 해봐야겠다 해서 5~6곡을 혼자 습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작사·작곡을 청소년이 해야 하는 창작 가요제 공고가 난 거다. 내 실력을 검증해보고 싶어 나가게 됐다.”


–연예계 생활은 어땠나.


“잘 맞는 것도 있고, 힘든 것도 있었다. 행운인 건 좋은 사람들과 일을 많이 했다는 점이다. 윤상, 김동률, 이적 이런 좋은 사람들이 있어 크게 다치거나 충격받지 않고 낯선 세계에 적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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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여고생이던 이소은이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김동률과 함께 ‘기적’을 부르는 모습. /유튜브

–부모님이 반대는 안 하셨나.


“두 분은 뭔가를 강하게 반대하거나, 권유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내 성격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누가 시키는 건 싫어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더 해버리거든(웃음). 공부하란 말도 하신 적 없는데, 그랬으면 더 엇나갈 수도 있단 걸 아셨던 것 같다. 문제는 지금 세 살 된 내 딸이 딱 내 성격을 닮았다는 것. 그런데 나는 우리 부모님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하!”


–자매의 음악적 재능은 어디서 온 걸까.


“나도 그걸 모르겠다. 아빠가 노래방 같은 데 가면, 꼭 앞에 나가 서서 노래를 부르시긴 하는데(웃음). 뭐, 어느 집이든 스타트를 끊는 사람은 있지 않겠나.”

◇‘더 베스트’보다 ‘마이 베스트’

–뉴욕에선 매일 야근하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의 허리 통증에 시달리며, 토요일에도 출근할 만큼 치열하게 살았더라.


“미국 생활은 한국에서 쌓은 것을 뒤로하고, 완전히 다른 백지에서 출발하는 일이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치열함의 이유 중엔 떨어져 사는 부모님도 있었다. 어버이날에 전화를 드리면 ‘우리끼리 식사했어’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신다. 그게 너무 마음 아팠다. 이렇게 떨어져 있는 시간을 메울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크게 느꼈다. 건강한 이유는 아니었다.”


–왜 그런가.


“내 딸이 물 한 모금만 먹어도 너무 예쁘다. 지금도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아이는 뉴욕에 있는 남편에게 맡기고, 이소은만 잠시 귀국했다), 딸이 만약에 엄마 찾으면서 울고, 엄마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 한다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다. 아이가 태연하게 잘 지내야 오히려 부모 마음이 안 아프다는 걸 알았다. 내가 그걸 못 했다. 나를 너무 마모시킨 게 오히려 부모님을 힘들게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지금은 압박감에서 벗어난 상태인가.


“아이가 생기고, 또 이번에 책을 쓰면서 많이 바뀌었다. 나는 우리 부모님 밑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정서적 안정을 누리면서 살았다. 그런데 우리 딸이 스트레스 받은 엄마를 보면 뭘 배울까,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그러우면서도 열심히 사는 모습, 힘든 일 속에서도 기쁨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책을 쓰는 과정이 그런 면에서 치유의 과정이었다. 미국에서 산 지난 13년뿐 아니라, 내 삶 전체를 되짚어볼 수 있었다.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괜찮아. 앞으론 좀 쉬엄쉬엄 살아도 돼.’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됐다.”


–최근 국제기구를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인가.


“들어갈 때부터 딱 3년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너무 많은 걸 가르쳐준, 고마운 곳이지만 적절한 타이밍엔 진짜 ‘내 것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상의 문제도 겹쳤다.”


–허리 디스크 말인가.


“2013년쯤 통증이 있어 MRI를 찍었더니 허리 디스크라고 하더라. 운동하고, 병원에서 꾸준히 치료해야 한다는데 못했다. 로펌은 모든 시간이 돈이다. 당연히 운동도 놓고 살았다. 그런 상황이 몇 년 지속되니 이젠 회복이 안 되더라. 주사 맞고, 스테로이드 약을 먹어도 통증이 없어지지 않았다. 나를 돌보는 것이 단지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넘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알았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현대 사회는 일과 성공을 위해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일과 삶, 웰빙과 생산성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열심히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돌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지고 말더라.”


–2016년 의료인 남편과 결혼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은 어떻게 맞추나.


“탁아소(데이케어)라는 좋은 제도가 있어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아이를 맡긴다. 물론 첫 일주일은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우리 딸의 눈물을 담보로 잡은 이 시간을 잘 보내야 해’라는 생각에 미친 듯이 글 쓰고 일했는데, 아이가 잘 지내고 행복해하는 모습 보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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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은은 "나는 한번도 가수 생활을 은퇴했다고 말한 적 없다"며 "무대에 설 가능성도 언제든 열려 있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책에 쓴 ‘더 베스트(the best)보다 마이 베스트(my best)’란 말이 인상 깊었다.


“더 베스트를 쫓으면 만족을 못 한다. 우리가 어떻게 더 베스트에 도달하겠나. 열심히 살지 말자는 게 아니다. 진실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하루를 낭비하지 않고 살되, 최선을 다했다면 만족하자는 의미다. 불가능한 것을 쫓으며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을 필요는 없으니까.”


–앞으로의 이소은은 어디로 가게 될까.


“어쩌다 보니 20대에는 가수로 10년, 30대에는 변호사로 10년을 살았다. 40대에는 좋은 리더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이건 좋은 엄마가 되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하고 소통의 창을 열고, 아이에게 하는 모든 게 리더의 자질과 관련 있는 거더라.”


–조금 더 힌트를 준다면.


“창의적인 예술과 관련이 있는 작은 일을 준비하고 있다. 미디어의 한 종류인데 ‘스타트업’이라 하기엔 거창하고 재밌는 프로젝트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극과 극의 커리어에서 얻은 것을 접목해 보고자 한다.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 이렇게만 말하는 걸 이해해달라, 하하!”


이소은의 말대로, 그는 지금 그대로 충분해 보였다.


남정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