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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 ] 당신이 몰랐을 수도 있는 송해 이야기 네 가지

뽀빠이가 송해보다 전국노래자랑 선배였다고?

by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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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왼쪽)와 '뽀빠이' 이상용. /조선일보 DB

“돌아가셨다고? 어머나, 정말이야?”


지난 8일 낮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C스퀘어 빌딩 1층의 TV 앞에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듯한 중년 여성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방송인 송해(95) 선생의 부음을 전하는 뉴스 앞에서 그들은 마치 일가친척의 별세 소식을 들은 것처럼 놀랍고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국민 MC’ 송해는 한국 근현대 대중예술사(史)와 흐름을 함께 했던 인물이고, 워싱턴포스트가 말했듯 ‘그의 삶에 지난 한 세기 한반도의 역사가 담겨 있다(Mr. Song’s life arc reflects the history of the Korean Peninsula over the past century)’고 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실향(失鄕)과 6.25, 전후 복구와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장구한 역사가 그의 삶에 담겼고, ‘경제 강국이 된 한국이 과거 형편이 어려운 농업국가로 시작하던 시절을 상기시켜 주는 원형적인 인물’이란 평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대중이 잊고 있는 요소들도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당신이 몰랐을 수도 있는 송해 이야기 네 가지’를 주제로 삼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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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대구 달성군 옥포읍 송해기념관을 찾은 시민들이 송해 선생을 애도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휴대전화에 담고 있다. /뉴스1

①원조 ‘전국노래자랑’ MC는 아니었다?


젊은 층은 KBS ‘전국노래자랑’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프로그램이고, 그 까마득한 옛날부터 송해가 마이크를 잡아 왔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땡!’ 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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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전국노래자랑 MC(1980~1985)였던 이한필(위키 리).

1980년 11월 9일 첫 방송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의 초대 MC는 가수 이한필(1936~2015)이었습니다. ‘위키 리’라는 예명으로 친숙했지만 1970년대 제4공화국의 국어순화운동 열풍으로 어니언즈가 ‘양파들’로, 바니걸스가 ‘토끼소녀’로 바뀌는 상황에서 본명인 이한필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한필은 ‘종이배’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같은 히트곡을 남겼지만 1980년대 초에는 전국노래자랑에서 도시 신사 스타일의 친근한 진행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습니다.

이한필은 약 5년 정도 이 프로그램의 MC로 활동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전국노래자랑에서 갓과 도포 차림으로 ‘청산~ 리 벽계~ 수’ 식으로 심각하게 정가(正歌)를 부르는 어르신이 꼭 있었는데, 너무 길어 중간에 ‘딩동댕동’ 소리가 나오자 왜 끊느냐고 화를 내면 MC가 허허 웃으며 사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한필이 MC에서 물러난 1985년 7월부터 1986년 5월까지 제2대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은 인물은 뜻밖에도 ‘뽀빠이’ 이상용이었습니다. 송해의 후계자로 차기 MC 물망에 올랐던 이상용은 정작 송해보다도 먼저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쥐었었고, 나중에 MBC에서 ‘우정의 무대’를 맡았던 겁니다. 이후 3대(1986.5~1987.4) 고광수를 거쳐 4대(1987.4~1988.5) MC는 최선규 아나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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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규 전 KBS 아나운서. 송해보다 앞서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았다.

놀랍게도 ‘뽀빠이와 최선규가 송해보다 전국노래자랑 선배’였던 셈입니다.


송해가 처음으로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았던 것은 1988년 5월 8일이었습니다. 생각보다 꽤 늦은 시점이었죠. 송해로서도 환갑이 지난 나이였고, 이미 코미디에서 노역을 숱하게 맡았던 뒤였을 뿐 아니라 과거 그와 콤비로 활동했던 박시명과 서영춘도 이미 2년 전에 작고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원래부터 전국노래자랑은 송해’라고 기억합니다. 이전 네 명의 MC는 좀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1988년 송해가 맡은 뒤의 ‘전국노래자랑’은 그 전사(前史)를 모조리 지워버리다시피 할 정도로 아주 다른 프로그램이 됐던 겁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물론 송해는 1994년 5개월 동안의 짧은 공백기를 빼면 기네스북에 등재된 33~34년의 장기(長期) 진행을 하게 됩니다만, 그 이유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 두 번째 이야기가 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②진짜로 까마득한 옛날부터 MC였다


‘국민가수’ 이미자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가 있었습니다. 한형모 감독, 남정임 주연의 이 영화는 무려 55년 전인 1967년에 나온 ‘엘리지의 여왕’입니다. 시골 마을의 일곱 살 아이 이미자는 동네에서 열린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아리랑 목동’을 불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특별상으로 받은 쌀을 이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떼를 쓰는 어린 이미자(이 어린이 역할은 훗날 ‘빙글빙글’ ‘슬픈 인연’을 불러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 나미가 연기했습니다. 크레딧엔 본명인 ‘김명옥’으로 올라 있습니다)를 처음엔 말리다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모시겠습니다... 방년 7세의 이미자 양이올시다”라고 소개해 청중을 웃긴 뒤 아이가 편하게 노래를 부르도록 다독여 주는 사회자가 나옵니다. 바로 송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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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레지의 여왕'(1967)에서 노래자랑 사회자로 출연한 40세의 송해. /한국영상자료원

편안한 웃음과 구수한 목소리, 재치있는 말솜씨, 그러면서도 정확하고 또렷한 딕션,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몸을 놀려 무대와 객석의 분위기를 한껏 살리는 몸짓, 출연자와 푸근하고 정 깊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그 옛날에도 그대로였거니와, 이미 이때 대단한 관록이 몸에 붙어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 영화는 지금 한국영상자료원 KMDB 홈페이지에서 무료 VOD로 볼 수 있습니다. 송해는 약 16분 23초부터 나옵니다.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1570) 이 영화가 1990년대 케이블 TV에서 방영되자 이런 반응이 나왔습니다.


“아...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강산이 변했어도,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자는 송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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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리지의 여왕'에 출연한 송해. 그 왼쪽은 어린 이미자 역을 맡은 11세 때의 나미. /한국영상자료원

송해가 연예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전쟁 직후인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는데, 악단 공연의 특성상 쇼 진행을 하면서 입담을 살려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려 67년 전부터 그는 MC로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는 MC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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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극단 활동을 시작하던 1955년 무대에서 사회를 보는 28세의 송해(왼쪽). 오른쪽은 송해와 콤비로 활동했던 박시명.

그리고 1988년부터 ‘전국노래자랑’은 ‘송해’와 동일어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참가자가 주는 팔도 음식 가리지 않는 먹방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친화력과 관록을 알 수 있는 ‘전국노래자랑’의 한 일화가 있습니다. 2010년 전남 함평에서 온몸에 꿀벌을 붙이고 나온 양봉업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참가자인 이장님은 아직 무대에 벌 여러 마리가 날아다니는 상황이어서 겁을 내며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땡’ 소리가 나자 송해는 “벌 때문에 틀렸으니까 한번 다시 할게”라며 재도전 기회를 주더니, 아예 울상이 된 이장님 옆으로 가서 팔을 토닥이며 같이 노래를 불러 줬습니다. 벌이 MC만 피해 갈 리 없었는데도 말이죠. “이래서 송해구나”라는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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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전남 함평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 중 앞 참가자인 양봉업자가 퇴장한 뒤에도 여전히 무대 위를 날아다니는 벌 때문에 울상이 된 참가자를 다독이며 함께 노래를 불러 주는 송해. /KBS

그는 어른이었으되 권위를 앞세우지 않았고, 스스로 무대를 장악하고 주인공이 되려 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에 나오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힘이 돼 준 어른이었습니다. 그의 오랜 생애 동안 구설수에 오를 만한 일이 두 차례 정도 있었지만 다수의 대중은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겠죠.

③우동을 부르는 마법의 주문, “하O면 끓어요~”


1978년에 나온 한 TV광고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고속버스(또는 기차) 좌석에 앉아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가 꿈을 꿉니다. 냄비에서 모락모락 김이 납니다. 남자가 뚜껑을 열어보곤 냄새를 맡고 미소를 짓습니다. 꿈 속에서 그가 말합니다. ‘파 마늘 양념을 넣어 내가 끓인 하O면...’ 잠을 자면서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걸 본 옆자리의 아내가 그를 깨웁니다. 깜짝 놀란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단 여섯 글자를 길게 뽑아 외치는데, 그건 그 후로도 오래도록 도저히 잊지 못할 명대사였습니다.


“하O면 끓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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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우동 TV광고에 출연한 송해.

이것은 라면과 건면이 시장을 점유하던 당시 ‘우동’을 들고 나온 S식품의 브랜드였는데, 이 CF의 주인공이 바로 송해였습니다. 광고 안에서 먹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얼마나 맛있게 입을 다시며 행복해하는 표정이던지, 얼마나 간절하게 끓는 우동을 냄비에서 건져내라는 목소리던지, 이 CF를 처음 본 이후 지금까지도 낮이든 밤이든 배가 고플 때마다 그 외침이 잊히지 않습니다. 1980년대 컬러TV 시대가 된 뒤 다시 찍은 CF에서 송해의 이 여섯 글자 외침은 더욱 애절해졌습니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맡기 이전에도 서민적인 CF모델의 끝판왕이었습니다.

④서영춘의 항변 “왜 착한 역할은 송해만 하냐”


자, 그럼 송해는 가수와 MC, CF 활동만 했던 방송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오래도록 그의 본업은 코미디언이었습니다. 1970년대 양대 민영방송인 TBC와 MBC가 경쟁하던 시절, 양쪽 모두 대단한 시청률을 자랑하던 코미디 프로그램을 편성했고, 서로 쟁쟁한 스타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웃으면 복이와요’를 간판 프로로 내민 MBC에는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이대성, 남철, 남성남, 이영일, 신소걸, 김영하, 권귀옥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방송통폐합 직전 젊은 코미디언들이 출현했는데 그중 김병조-강석 콤비와 방미가 있었습니다. 한편 ‘고전유모어극장’(뒤에 ‘유모어극장’으로 개칭, 유튜브에는 ‘유머극장’이었던 것처럼 나오지만 당시 표기는 ‘유모어극장’이었음)을 방영했던 TBC에는 서영춘, 이순주, 임희춘, 심철호, 한주열, 최용순, 배일집, 배연정, 그리고 송해가 있었죠(1980년 서울의 봄 시절에 방영된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서는 이 모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이주일이라는 타노스급 대스타가 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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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2월 20일 방송된 TBC '고전유모어극장' 신흥부전 편에 출연한 서영춘(왼쪽)과 송해. /KBS

주로 우리 옛 설화를 코미디로 각색한 TBC ‘고전유모어극장’의 주연은 대부분 두 사람, 서영춘과 송해였습니다. 그런데 역할 배분이 늘 이랬습니다. 서영춘이 놀부면 송해는 흥부, 서영춘이 탐관오리면 송해는 암행어사, 송해가 착한 혹부리영감이면 서영춘은 못된 혹부리영감인 식이었습니다. 좀 바보스럽지만 순박하고 반전이 있는 역할은 임희춘, 우직하거나 탐욕스런 역은 한주열, 그 아내 역은 최용순, 얄미운 선비 역할은 심철호, 젊은 남녀 역할은 배일집과 배연정이 주로 했습니다.


국민학교에 갓 들어갔던 저는 당시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넋을 놓고 깔깔대며 보다가 할아버지께 번번이 혼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나쁜 짓만 골라 하다 관아에 끌려간 서영춘이 고을 사또에게 불호령을 들은 뒤 “마지막으로 딱 하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요”라 말하곤 울부짖는 얼굴로 극중 역할에서 완전히 이탈해 이렇게 토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모어극장 시작한 지도 이제 꽤 됐는데, 아이고오~ 어떻게 저는 맨날 사기꾼이나 자린고비 같은 나쁜놈으로만 나오고, 송해는 지가 뭔데 허구헌날 착한 역할만 맡으니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제발 저한테도 착한 배역을 좀 주시라고요 제발 쫌! (방청객을 향해) 아 웃지 좀 마세요!” 이렇게 하소연하는 서영춘의 얼굴이 얼마나 웃겼는지 금성사 흑백TV 앞에서 배를 잡고 방바닥을 굴렀던 기억이 납니다.(이상 서영춘의 대사는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쓴 것이므로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때가 아마 홍수환이 파나마에 가서 카라스키야에게 4전 5기 KO승을 거뒀던 시절 같습니다.

극중 서영춘이 아무리 심술궂고 못되게 굴어도 늘 권선징악인 결말에선 망하고 마는데, 송해는 그때마다 너그럽게 그를 용서하고 끌어안습니다. 임하룡 없는 심형래, 오맹달 없는 주성치를 상상할 수 없듯, 당시 송해 없는 서영춘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송해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착하고 순박하며 후덕하고 정겨운 동네 아저씨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서영춘은 방송통폐합 이후 MBC로 이적했고, ‘코미디언’ 송해는 1980년대 중반까지 KBS ‘코미디 하이웨이’ ‘유머 1번지’ 같은 프로그램에 나왔습니다. 당시 송해는 종종 젊은 개그맨들과 함께 연기하기도 했는데, 앤서니 퀸 부자(父子)가 부른 ‘라이프 잇셀프 윌 렛 유 노(Life itself will let you know)’를 최불암과 정여진이 번안해 불렀던 ‘아빠의 말씀’(아빠 언제 어른이 되나요~)을 가사를 바꿔 패러디했던 코너에 출연해서 아빠 역을 맡았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서 어린 딸로 나온 개그우먼이 이성미였는데, 이 딸이 “내가 쓰러지면 그냥 놔두세요”라고 원래 가사대로 노래하면 송해는 뒷짐 지고 씩 웃으며 그 다음 아빠의 내레이션 대목에서 “응~ 네가 떨어진 동전을 깔고 누운 걸 내가 봤거든”이라고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식이었습니다.


송해의 별세는, 악극단과 극장의 전성기 시절을 거쳐 브라운관 초기 시절 안방극장을 행복하게 했던 한국 연예계의 1세대 희극인들이 이제 모두 하늘의 별이 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별세 순서대로 박시명(1924~1986), 서영춘(1928~1986), 이기동(1935~1987), 양석천(1921~1990), 김희갑(1923~1993), 고춘자(1922~1995), 양훈(1923~1998), 곽규석(1928~1999), 장소팔(1922~2002), 심철호(1939~2002), 배삼룡(1926~2010), 이대성(1936~2010), 백남봉(1939~2010), 남철(1934~2013), 남성남(1931~2015), 구봉서(1926~2016), 남보원(1936~2020), 임희춘(1933~2020)은 이제 모두 고인이 됐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우렁찬 목소리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우리 땅 구석구석의 그 어떤 특산물을 입에 넣어 드려도 다 소화해 낼 것만 같았던 송해(1927~2022)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이 리스트의 마지막 이름일 것입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팍팍한 살림살이를 견디며 기나긴 격동의 시대를 헤쳐갔던 서민들을 웃음으로 어루만져 줬던 그들은 다 떠나갔습니다.


또 다시, 한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