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김치 잘게 썰어 참기름 한 방울… 어머니가 비벼주던 ‘여름의 맛’

[푸드]by 조선일보

서울 목동 '현주멸치국수'의 비빔국수./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돈 주고 사먹지 않던 음식이 있다. 예를 들면 비빔국수 같은 것이다. 어릴 적 특식 메뉴는 정해져 있었다. 가을에는 전어회, 일요일 아침에는 오징어볶음, 비 오는 날이면 부침개 같은 식이다. 늦여름이면 비빔국수가 상에 올랐다. 어머니의 비빔국수는 단맛이 거의 없었다. 연중 그맘때쯤 남아도는 신 김치를 잘게 썰고 간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한 다음 참기름을 몇 방울 뿌리면 인정도 사정도 없는, 하드보일드 버전 비빔국수가 탄생했다. 풋고추를 조금 썰어 넣으면 매운 음식을 잘 먹던 아버지도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비빔국수를 먹어야 했다. 우리는 자연히 나이가 들었다. 점차로 집에서 먹던 음식을 밖에서 사먹기 시작했다. 비빔국수는 최후의 순간 고르게 된 메뉴 중 하나였다.


사먹는 비빔국수는 쉽게 만족할 수 없었다. 어디서나 쉽게 파는 음식이지만 그만큼 정성 들여 내놓는 곳이 적었기 때문이다. 천호역 6번 출구, 서울 성내동 주꾸미 골목에 갔을 때 오랜만에 정성 들인 비빔국수를 만날 수 있었다. 건물 2층에 자리한 ‘풍년비빔국수’는 보통 곁다리 메뉴로 취급하는 비빔국수를 이름으로 박아 넣었다.


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삐걱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오래된 풍경이 펼쳐졌다. 해물파전은 오징어를 주로 썼고, 파와 양파 반죽에 달걀물을 입혔다. 일반 튀김이 꽹과리 소리라면 파전의 바삭함은 징 소리를 닮았다. 눈 쌓인 나뭇가지가 툭툭 끊어지듯 묵직하게 입안에서 파전이 바사삭 바사삭 씹혔다. 통통한 오징어와 파·양파의 단맛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간장에 담근 양파를 올려 알싸한 맛을 더했다.


비빔국수는 깨와 깻가루를 요란하지 않게 뿌렸고 열무김치 몇 점을 면 위에 올렸다. 자작하게 국물이 깔린 국수를 젓가락에 말아 입에 욱여넣었다. 차가운 물에 깨끗이 헹궈 면에 전분기가 없었다. 씹히는 면의 온도는 산에서 내려온 냇물을 닮아 있었다. 매실 등을 숙성해 만들었다는 양념장은 단맛과 매운맛, 신맛 중 어느 하나 튀지 않았다. 아삭한 열무김치를 씹으며 면을 삼킬 때마다 ‘이것이 여름의 맛’이라 감탄했다.


경기도 고양시에도 역시 비빔국수를 상호에 집어 넣은 ‘일산비빔국수&돈가스’라는 집이 있다. 강변북로를 타다 자유로로 빠져 가다 보면 황량한 대로변에 커다란 간판을 단 이 집을 발견할 수 있다. 공사장 인부들 빼고는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이 외딴 곳에 점심 나절이 되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단가가 저렴한 만큼 키오스크 주문은 피할 수 없었다. 고기 두 장을 튀겨 접시에 올린 돈가스는 허기진 성인 남성이라도 만만하게 보기 힘든 양이었다. 치사하게 얇은 두께의 고기도 아니었다. 양파와 당근을 넣고 달큼하게 조린 소스는 지배적인 단맛 아래 신맛이 섞여 복잡다단한 층위를 이뤘다.


비빔국수는 국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높게 채워져 있었다. 양배추와 오이를 고명으로 올렸고 소면은 그 아래 잠겨 있었다. 입에 면을 넣자 아찔하게 차가운 온도가 이를 통해 느껴졌다. 주방의 면 담당은 아마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손이 빨갛게 될 때까지 담갔을 것이다. 그 온도가 면을 통해 내 몸까지 느껴졌다. 하얀 면이 차가운 채찍처럼 입속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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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로 들어와 목동 2단지까지 가면 이면도로 한편에 ‘현주멸치국수’라는 집이 있다. 부부가 운영하는 이 집은 반듯한 직사각형 구조로 아담한 크기였다. 메뉴는 멸치국수와 비빔국수, 수제비, 비빔밥같이 흔한 분식집 구성이었다. 큰 대접에 담긴 멸치국수는 황토 흙을 닮은 그윽한 빛깔의 육수를 품고 있었다. 그 속에 똬리 튼 소면은 바닷속 유영하는 해초 잎사귀처럼 조용히 하늘거렸다. 앞에 앉은 어머니가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어쩜 국물이 이렇니.” 찬물에 말끔히 헹구고 토렴한 소면은 매끈한 질감을 지녔다. 국물과 함께 면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밀도가 단단한 멸치 육수의 향이 코로 뿜어져 나왔다.


김치를 넣고 만든 비빔국수는 공격적인 빨간색이 아닌 봉숭아 물처럼 친숙한 빛을 띠었다. 서늘한 면의 온도에 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고소한 맛이 은근했고 매운맛과 단맛이 장난을 치듯 아기자기하게 모였다. 젓가락질을 거듭해도 속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잊었던 기억들을 한 가닥 한 가닥 풀어놓듯, 익숙한 맛이 면 가닥을 타고 몸으로 밀려들었다. 따로 담아낸 멸치 육수 한 그릇을 마시자 한여름 달게 잔 낮잠이 끝나듯 아쉽고도 뿌듯한 여운이 들었다.


“너희 어릴 때 비빔국수 참 잘 먹었지.” 어머니가 빈 그릇을 보며 말했다. 소면을 한 솥 삶아 두 형제와 아버지를 먹이던 어머니는 그때보다도 더 작아진 몸으로 앞에 앉아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억의 맛이 한데 비벼져 옛 유행가처럼 멀리 흘러갔다.


# 풍년비빔국수: 매실비빔국수 7000원, 해물파전 1만3000원. (02)475-8078


# 일산비빔국수&돈가스:비빔국수 7000원, 돈가스 1만원. (031)978-0244


# 현주멸치국수: 멸치국수 6000원, 비빔국수 7000원. (02)2653-7331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2.07.2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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