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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아무튼, 주말] 기능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폴리텍 최연소 교수 원현우

교수가 된 ‘용접 아이돌’… “그 힘든 걸 왜 하냐고요? 재미있으니까!”

by조선일보

“‘기능 아이돌’요? 어휴, 과찬입니다. 하하!”

지난달 한국폴리텍대학 포항 캠퍼스에서 만난 원현우(29) 교수는 쑥스러운 듯 연신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교내를 지날 때 마주친 학생들은 드문드문 “교수님, 연예인 같아요” 하는 농담을 던지고 쪼르르 도망갔다. “장난이 짓궂은 친구들이지만 실습할 땐 진지한 눈빛으로 싹 변한다”고 했다. 실습실에 들어서니 두툼한 작업복을 입은 학생들이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용접 실습에 몰두해 있었다. 곳곳에서 쉼 없이 불꽃이 튀었다.


인천기계공고 졸업 후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하던 2013년, 스무 살이던 그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제42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철골 구조물 부문에 출전해 금메달과 올림픽 MVP를 동시에 차지했다. 그가 제작한 철골 구조물에 심사위원들은 100점 만점에 98.94점을 줬다. 2위 일본 선수와 11점 이상 차이가 났고, 52국 선수 1027명 중 최고 득점이었다. 최고 득점자에게 주는 ‘알버트 비달상(Albert Vidal Award)’도 받았다.


뿌리 기술이 고사하고 기능업계 고령화가 나날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지난 1월 폴리텍대학 포항 캠퍼스 융합산업설비과 교수로 임용된 것이다. 1998년 폴리텍대학 설립 이후 최연소 임용 교수다.

조선일보

원현우 교수가 지난달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 내 실습실에서 작업복을 입고 용접 실습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오차 없이 완벽히 작업을 해냈을 때의 쾌감이 기술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청춘을 쏟아 ‘세계 1등’ 꿈을 이루다

-기술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라디오나 장난감 조립하고 분해하는 걸 좋아했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중1 때 충격적인 성적을 받았다(웃음). 그러다 중3 겨울방학 때 아버지 지인이 교사로 계시는 인천기계공고에 견학 갔다가 기능반 연습실에 들어섰는데, 그때 기술인이 되길 결심한 것 같다.”


-어떤 모습을 본 건가.


“판금(얇은 철판을 가공하는 일) 하는 고교 선배들이 멋진 구조물을 만드는 모습이었다. 보자마자 ‘아, 저거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품을 분해하고 조립만 하다가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주변에서 말리지는 않았나.


“정반대였다. 사실 우리 집은 기능인 집안이다. 아버지도 기계공고를 나왔고 저와 동생 모두 기능인이다. 아버지께서 ‘네가 사회에 나갈 때쯤이면 기능인이 더 필요한 시대가 올 거다’라고 격려해주셨다.”


인천기계공고에 진학하자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3년 맹훈련 끝에 2010년 9월에 열린 전국기능경기대회 판금 직종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2등에 그쳐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국제기능올림픽 메달이 얼마나 어려운 건가.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3등 안에 들면 전국 대회 출전권이 주어지고, 전국 대회에서 1, 2등을 차지한 네 선수가 선발전을 치러 단 한 명만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직종별로 차이가 있지만 보통 만 23세로 출전 나이가 제한되고 메달 여부와 관계없이 평생에 단 한 번 나갈 수 있다.”


-3년간 판금에만 매달렸는데,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9시까지 연습에 ‘올인’했다. 밤늦게까지 연습하려고 매일 점심시간에 저녁에 먹을 밥까지 미리 받아가면서 연습했다. 그렇게 전국 대회 1등을 하고 현대중공업에 스카우트되기도 했지만 이후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모교 1년 선배한테 1등 자리를 내줬다.”


-다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계기는.


“회사 기술교육원에서 ‘훈련을 지원해줄 테니 철골 구조물로 직종을 바꿔 재도전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2년 넘게 다시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철골 구조물 직종을 익히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입사 후 첫 휴가도 금메달을 딴 이후 3년 만에 처음 갔다.”


-금메달과 MVP를 예상했나.


“대회 6개월 전 잠시 슬럼프가 왔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최종 목표를 금메달에서 ‘올림픽 MVP’로 더 높였다. 주변에서는 황당해했지만 ‘난 MVP가 될 거다’라고 계속 암시했다. 수첩, 사물함, 작업대, 탈의함에도 MVP를 적었다.”


-목표를 이뤘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전광판에 태극기와 함께 내 이름이 MVP로 뜬 걸 보고 너무 기뻐서 태극기를 등에 두르고 시상식장을 뛰어다녔다(웃음).”


-한창 젊을 때 기술 연마에만 몰두한 것이 아쉽지는 않은가.


“매일 학교 실습실과 집만 오가느라 친구와 논 기억도 거의 없고, 연애도 현대중공업 입사하고서야 처음 해봤다(웃음).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방학 때는 학교 배식이 없어 스스로 김치찌개를 끓여 저녁을 해결했던 추억, 미완의 과제를 다시 만들어보겠다고 밤늦게 혼자 남았던 시간들, 태풍 곤파스가 관통했을 때도 훈련을 멈추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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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원현우씨가 금메달과 대회 MVP를 차지한 뒤 태극기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원현우 교수

◇“주변 시선보다 내 적성·흥미를”

-현대중공업에선 어떤 작업을 한 건가.


“선박 내 메인 엔진과 부속 기계 장치, 내부 파이프라인을 연결하고 조립하는 일을 했다. 천장 크레인에 올라가 철골 구조물을 설치하는 작업, 사람이 겨우 누워서 들어갈 만한 곳에 들어가 배관 결함을 보수하는 작업 등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내가 설치한 라인들이 결함 없이 모두 검사를 통과했을 때 말 못 할 쾌감이 들었다. 처음 작업에 참여한 소형 선박 시운전을 나갔는데, 배 폭이 좁다 보니 파도가 치면 좌우로 크게 흔들려서 안전벨트로 몸을 침대에 고정해놓고 자야 했다. 하지만 파도가 멈추자 선박 좌우로 돌고래 수백 마리가 헤엄치는 장관이 펼쳐졌다. 황홀한 경험이었다.”


-기능인, 뿌리 기술 인력이 계속 부족하다고 한다.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지만 기능업계는 인력난이 심각하다. 지금 뿌리 기술 인력은 퇴직 후 재취업한 선배들이나 퇴직을 앞둔 분들이 주축을 이루는 실정이다.”


-용접을 비롯해 기능 분야가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다.


“노동 강도가 높고 위험 요소가 있는 것도 맞는다. 하지만 용접에는 굉장히 다양한 분야가 있다. 가령 LNG선 화물창 용접은 정밀한 용접 작업으로 다소 까다롭기는 하나 작업장 온도가 평균 23도로 일정하게 유지되고,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는 깨끗한 작업 환경이다. 반도체 제조 공정 등에 활용되는 수소 용접 분야도 근무 환경이 좋다. 중요한 건 제대로 교육을 받아 그런 위험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것이다.”


-사무직을 유독 선호하는 사회다.


“나는 사무직이 정말 편한 직종인지 잘 모르겠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크지 않은가? 우리 학생 중에서도 용접할 생각이 전혀 없다가 막상 해보더니 ‘너무 재밌다’며 스스로 자격증 따서 대회를 준비하는 일이 적지 않다.”


-기능인이라고 무시하거나 얕보는 시선을 느낀 적이 있는지.


“‘저 힘든 걸 왜 하지?’ 하는 시선을 느낀 적은 있다. 학창 시절 땀에 찌든 작업복 차림으로 식당에 들어가면 힐끔힐끔 쳐다보는 학생들이 있었다. 회사에서 근무할 때 용접과 배관 업무 등을 하고 있으면 지나가다 ‘어유 힘들겠어요’ 한마디씩 말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아유, 재밌습니다’ 하고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술의 가치를 잘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한다.”


-최근 대우조선해양 파업 사태를 계기로 재하도급 문제와 원·하청 간 차별 임금이 논란이 됐다.


“재하도급 문제는 조선업에만 있는 건 아니다. 기업에서는 당연히 비용을 줄이고 이윤을 창출하려 한다. 다만 하청 노동자 임금이 하도급금 범위에서 개별적으로 결정되다 보니 재하도급을 거치면서 2차, 3차 업체로 부담이 넘어가 근로자 임금에 영향을 준 거다. 원·하청은 기본급만 놓고 보면 비슷하다. 다만 연차나 자격에 따른 각종 수당이나 상여금 등에서 격차를 보인다. 직무 또는 업무별로 임금 체계 표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기술이 새로운 삶의 기회 열어줘”

기술 명장의 길을 가던 그가 교직을 생각한 건 현대중공업 기술교육원에서 일한 것이 계기가 됐다. 원 교수는 “직무 재교육, 직업훈련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찾는 모습을 보며 ‘제대로 기술을 전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교수가 되기까지 쉽지 않았다고.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따야 해서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강행군을 했다.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를 가능한 한 빨리 취득하기 위해 사내 공과대학 학사과정을 밟고 판금 기능장, 배관 기능장 국가 기술 자격까지 받았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학생이 교수가 됐는데.


“공부가 훨씬 힘들더라(웃음). 제대로 가르치려면 꼭 필요했던 과정이라 인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교수가 되고 싶었던 계기가 있나.


“누군가에게 새로운 기회임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회계학을 전공했지만 저임금에 미래를 보지 못한 20대 청년, 웹툰 작가로 끝내 빛을 보지 못한 30대 청년, 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실직한 60대 어르신들도 폴리텍에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취업에 성공했다.”


-앞으로 목표는.


“올림픽 MVP(최우수 선수)를 해봤으니 이제 폴리텍대학에서 또 다른 MVP(Most Valuable Professor·최우수 교수)를 해보고 싶다. 하하!”


원 교수에겐 다섯 살, 세 살 두 아들이 있다. “아들들이 기능인의 길을 걷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기능인 집안이 3대까지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포항=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


[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