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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아무튼, 주말-이옥진 기자의 진심]

흙탕물 밥 먹는 노숙인 보고, 그는 가난한 환자들의 ‘우산’이 됐다

by조선일보

노숙인 등 貧者와 함께한 22년

성천상 받은 ‘길 위의 의사’ 최영아

조선일보

지난달 4일 서울에는 종일 장대비가 내렸다. 궂은 날씨에도 서울서북병원은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로 북적였다. 의사 최영아가 허락한 사진 촬영 시간은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환자들이 기다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왕 의사가 된 것, 가장 가난한 사람 곁에 있는 의사가 되고자 했다”는 이 사람. 빈곤과 질병에 신음하는 이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크고 든든한 우산이 아닐까.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의사 최영아(52)의 운명은 1990년 비 오는 여름날 서울 청량리 청과시장에서 정해졌다. 당시 이화여대 의예과 2학년 학생이던 그는 선배들을 따라 행려병자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눈앞에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빗물과 흙탕물이 섞인 밥을 퍼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충격과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저분들도 인간인데 어떻게 이 도시 한복판에서, 단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 ‘저들은 얼마나 많은 육체적 질병과 인간적 고통들과 싸우며 살고 있을까?’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 노숙인들을 만나면서 질문은 쌓여갔다. ‘이들은 얼마나 질병이 많을까’ ‘어떻게 해야 치료될까’ ‘이들은 과연 노숙인이 되기 전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2001년 내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자마자, 본격적으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 노숙인들이 있는 곳을 향했다. 2002년 ‘밥퍼 목사’로 널리 알려진 최일도 목사와 함께 청량리 뒷골목에 ‘다일천사병원’을 세웠다. 이 병원의 유일한 상주 의사로 병원 사택에서 먹고 자며 밤낮없이 노숙인 환자들을 돌봤다. 하루 환자가 100명도 넘었다. 이후 영등포 쪽방촌에 있는 ‘요셉의원’, 서울역 ‘다시서기의원진료소’, 은평구 백련산 자락의 ‘도티기념병원’ 등에서 일했다. 2012년엔 여성노숙인쉼터 ‘마더하우스’를, 2016년엔 노숙인 재활을 돕는 비영리법인 ‘회복나눔네트워크’를 만들었다. 2017년 8월부터 현재까지 그가 적을 두고 있는 곳은 서울시립서북병원. 공공의료기관인 서북병원은 노숙인 거주 요양시설인 ‘은평의 마을’ 등과 연계해 의료 혜택 취약 계층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의사가 된 뒤 여러 병원에서 일했지만, 그는 항상 같은 곳에 있었다. 가난한 환자들 곁이다. 올해 ‘성천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다. 성천상은 중외학술복지재단이 JW중외제약 창업자인 고(故) 이기석 선생의 생명 존중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2년 제정했다.


지난달 서북병원에서 최영아를 만났다. 장대비가 쏟아진 이날, 30여 명의 환자가 1평 남짓한 그의 진료실을 찾았다. 노숙인 시설에서 온 사람이 많았다. 그는 이들의 사연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한 명 한 명 살뜰히 챙겼다. 그는 기자에게 “내 이야기를 감동스럽게 꾸미는 것은 싫다”고 했다. 단호한 말투였다.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건데, 사람들이 자꾸 상도 주고, 돈(상금)도 주고, 신문에 낸다고 그러니까 좀 민망해요. 저는 이 삶을 선택하면서 의사로서 더 많이 훈련받고, 성장했잖아요? 그런데 노숙인들의 삶은, 예전보단 좀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제가 만난 사람 중엔 죽은 분도, 여전히 노숙인으로 사는 분도 많아요. 그분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어요. ‘저 사람들이 다르게 살 수 있게 도울 수 있지 않았을까’란 마음도 들고…. 현실에선 굉장히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데, 작위적으로 꾸며진 감동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돈이 있든 없든, 환자는 일단 살리고 봐야

-청백리 대상, 아산상에 이어 성천상을 받았다.


“처음 기쁜 마음이 컸는데, 상을 몇 번 받고 나니 지금은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진다. 상을 준 곳에서 내가 앞으로 훌륭한 삶을 살 거라는 기대가 있지 않겠나.”


-왜 당신에게 상을 준다고 생각하나.


“(상금을) 다른 데 안 꿍치고 잘 쓴다고 생각해서? 하하! 항상 상을 주는 분들에게 ‘상금을 어디에다 써야 되느냐’고 묻는데, 다들 나더러 알아서 쓰라고 하더라. 내가 해온 일을, 더 하라고 주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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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아가 노숙인 요양 시설에서 온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그가 환자에게 건네는 말은 마치 ‘엄마의 잔소리’ 같았다. “밥 잘 먹고, 약 잘 먹고, 운동해야 한다”는 그의 단골 멘트였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왜 노숙인에게 관심을 갖게 됐나.


“대학 때 봉사를 다니며 시작됐다. 그땐 청량리역, 서울역에 노숙인이 그득했다. 가족이 통째로 나와서 박스 깔고 사는 경우도, 어린아이도 많았다. 교회 같은 데서 배식을 하면 식판 든 노숙인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내렸는데, 많은 노숙인이 빗물과 함께 밥을 마구 먹더라. 충격이었다. 외관상으로도 너무 더러웠고, 냄새도 났고, 말도 안 통했다. 진료를 보는데, 그때 할 수 있는 게 혈압·혈당 재는 것밖에 없었다. ‘저 사람 병이 이게 다가 아닐 것 같은데, 혈압약과 당뇨약만 줘도 되는 걸까’란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살면 어떤 병들이 생기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모교 교수직 제안도 거절하고 일평생을 바친 건가.


“일평생까진 아니고, 아직 반평생이다, 하하! 처음엔 많은 생각을 했다. 한땐 이게 전부 종교적 실천에서 비롯된 것인가 생각도 했고. 하지만 가장 주된 건, 죽게 생긴 환자를 일단 살려야 한다는 의사로서 책임감이었다. 내 환자들은 내게 몸을 맡긴 사람들 아닌가. 돈이 있든 없든, 나한테 치료를 해달라고 병을 보여주고 모든 것을 내맡긴 이들이다. 의사로서 그런 사람을 안 보면 안 되지 않나. 내가 노숙인을 특별히 더 사랑해서라기보다는, 환자를 보고도 치료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의사는 ‘가장 병이 많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노숙인의 곁을 택했다.”


최영아는 자신이 인생 멘토로 꼽은 요셉의원 설립자 고(故) 선우경식 원장과 닮았다. ‘쪽방촌 슈바이처’로 불린 선우 원장은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수도사처럼 살며 노숙인,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선우 원장은 “가난한 환자들은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말을 남겼다.


선우 원장은 신출내기 의사였던 최영아에게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최영아가 선우 원장과 요셉의원에서 일할 때 받은 월급은 90만원. 선우 원장은 최영아의 남편 김유진씨에게 ‘당신이 돈을 벌고 있으니, 아내는 여기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외과의사인 김씨는 자원봉사 의사로 아내의 일을 돕다가, 2017년부터는 영등포 소재 노숙인 시설 ‘보현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


-선우경식 원장과의 인연은.


“대학병원에서 인턴으로 있을 때였다. 당시 대학병원은 돈이 안 되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았다. 대신 시립병원으로 보내는데, 전원(轉院)이 잘 안 될뿐더러 전원을 가더라도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왜 이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는 걸까 고민하다, 영등포에 계시던 선우 원장님을 수소문해 찾아갔고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됐다. 모든 것을 여쭤봤다. 한 환자가 술 먹고 피를 토하면서 다일천사병원에 온 적이 있다. 치료하고 돌려보내도 계속 똑같은 증세, 간경화와 식도정맥류 파열로 다시 오더라. 장장 열두 번을. 병원 직원들이 ‘저런 인간은 입원시키지 말자’고 했다. 선우 원장님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했더니, ‘나는 한 환자를 예순 번도 넘게 입원시켜봤다’고 하시더라. 그 말씀을 듣고 바로 그 환자를 입원시켰다. 노숙인들에게 선우 원장님은 아버지였다. 그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진짜 가족이 돼주셨다. 그분을 보며 ‘저렇게 해야 한 사람을 살릴 수 있구나’란 깨달음을 얻었다.”

◇‘청송 15년’보다 중요한 건, 그의 병명

최영아는 진료를 보러 온 환자들에게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하루에 소주를 20병씩 먹었다는 알코올중독 환자에게 “요즘 술 얼마나 마셔? 하루 한 병? 한 잔으로 줄이면 안 돼?”라고, 폐렴에 걸려 위중한 상황까지 갔던 환자에게 “저번에 중환자실에서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약 잘 먹고 있죠? 한 달 치 더 줄 테니까, 잘 먹고 한 달 뒤에 다시 와요”라고 했다. 이날 진료실을 찾은 39세 여성은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했었다. 10대 때 가출해 20년 가까이 한 남자에게 학대를 당했다고 했다. 최영아는 몸도 마음도 망가진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켜 돌봤고, 의료보호 1종 대상자가 될 수 있게 도왔다. 진료를 본 뒤 나서려는 그녀에게 최영아는 말했다. “약 살 돈은 괜찮아요? 잘 지내고 필요하면 연락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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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아가 간호사와 함께 환자의 발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 /중외학술복지재단

-노숙인을 상대하느라 험한 일도 많이 겪었을 것 같은데.


“노숙인들에게 멱살 잡히고 술집 작부 취급 받고 한 건 대부분 다일천사병원에 있을 때 일이다. 오래전이라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런 사람들을 하도 많이 보니까, 나중엔 별로 힘들지도 않더라. 그냥 ‘저 사람이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보다’ 생각했다. 일단 치료가 급선무라서,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섭진 않았나. 여성 의사라서 더 위험했을 수도 있겠다.


“전혀. 남성 의사라고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우선 다 늙고 망가져서 알코올에 찌들어 내게 온 아저씨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컸다. 나를 함부로 대하고 공포스럽게만 구는 게 아니라, 약한 모습을 보이며 살려달라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랬으니까…. ‘나 청송(교도소)에서 15년 살다 나왔다’고 겁주는 사람도 많았는데, 전혀 무섭지 않았다. ‘청송 15년’보다, 저 사람의 병명이 무엇인가가 내겐 더 중요했다, 하하!”


-’노숙인들을 통해 너무 귀한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고 했다.


“의사가 환자를 많이 봐야 좋은 의사가 되지 않겠나. 덕분에 돈을 내고도 못 배울 공부를 굉장히 많이 했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질병에 대해 엄청난 훈련을 받았다. 또 가난한 환자들 대부분이 (의사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성격 안 좋고, 말 안 통하고, 더럽고, 손대기 싫고, 관계 맺기 힘든 이들을 계속 보니까, 이런 환자를 보면 어떤 질병이 있겠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쉬워졌다. 환자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달까.”


-가장 기억에 남는 노숙인은.


“죽을 때 갖고 있던 전화번호가 내 번호밖에 없는 사람들…. 대부분 내가 방세를 내주면서 돌봤던 사람들이다. 무연고 사망자가 돼서 경찰이 신원과 사인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번호가 하나, 내 전화번호밖에 없었던 거다. 그런 쓸쓸한 죽음들이 마음에 남아 있다.”

◇노숙인, 우리 사회 가장 아프고 약한 부분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을 일컫는 법적 용어는 ‘노숙인 등’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전국의 노숙인 수는 8956명(거리·시설 노숙인 합계). 거리 노숙인의 37.5%는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영아는 내과 의사를 ‘사람 몸에서 가장 아프고 약한 부위를 찾아내 치료하는 의사’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사회에서도 가장 아프고 약한 부분을 찾아내 치료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사회 전체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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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중외학술복지재단 이사장(JW그룹 명예회장)과 수상자인 최영아 서울시립서북병원 진료협력센터장. /JW중외제약

-노숙인이 생기는 원인이 뭐라고 보나.


“노숙인은 ‘집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지만, 핵심은 가족(가정)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파괴된 이들이 노숙인이 된다. 이혼하거나,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가출한 사람들이 노숙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의사 출신 노숙인도 여럿 봤다. 경제적으로 잘살았던 사람일수록 자신이 망가지는 꼴을 더 못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가족, 친구 등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있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숙인의 질병은 왜 심각한가.


“노숙인은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불안하다. 제대로 못 먹고 못 자니 건강할 수가 없다. 나이가 들면 고혈압, 당뇨, 고지혈 같은 것들이 하나씩 오는데, 노숙인들은 이런 것이 한꺼번에 온다. 일상이 제대로 영위되지 않으니 질병을 관리할 수도 없고…. 내과적 병은 생활 습관, 심리 상태와도 밀접하기 때문에 생활이 바뀌지 않는 한 좋아지기가 어렵다.”


-노숙인 문제 해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타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 노숙인과, 지금의 노숙인에 차이가 있나.


“요즘은 연령대가 좀 젊어졌다. 20~30대도 많고, 게임 중독에 빠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모든 노숙인이 휴대폰을 갖고 있는 것도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다.”


최영아는 노숙인들의 가난과 질병에 사회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6·25전쟁의 여파로 생겨난 전쟁 고아와 부랑자들이 노숙인이 된 것을 예로 들었다. 이렇게 사회·정치적 문제가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데, 노숙인의 불행에 어떻게 개인의 책임만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노숙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특별히 못난 사람만 노숙인이 되는 게 아니다. 평범하고 멀쩡한 이들이 하루아침에 노숙인이 되는 것을 너무 많이 봐왔다. 현대 사회에서 건강하게 삶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서 타인을 배제하지 않고 더불어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선 내 곁의 사람들을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앞으로도 이렇게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아가 이 길을 걷는 데에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전쟁 때 이북에서 홀로 내려와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밥 굶는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입혔다. “당시는 삼시 세끼 밥을 먹을 수 있으면 부잣집이란 얘길 듣던 시절이었다. 우리 아버지 말고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나누면서 살았고, 그게 당연했다.” 최영아와 다일천사병원을 설립한 최일도 목사는 대학생 최영아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여느 여대생 같으면 눈을 가리고 피하고 말, 험한 노숙인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어루만지면서 따스한 말을 건네는 대학생 시절의 최영아 선생 모습이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사진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노숙인들을 만난 뒤 삶이 바뀌었나.


“그 전에는 부잣집 딸로 우아하게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외국 유학을 가고 싶기도 했고. 이 삶을 선택하고 나서는, 보다시피 너무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아한 삶은 물 건너간 것 같다, 하하!”


-대학 동창들과 삶이 좀 다른가.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재산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다. 자녀들(직업)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 하는 기준도 다르고. 페이스북에 비싼 호텔에 간 사진을 올리는 친구들도, 자기 병원이 어떻게 잘되고 있는지를 올리는 친구들도 있다. 나는 주로 ‘노숙인을 위한 임대주택이 필요하다’ 이런 걸 올린다, 하하!”


-혹시 그럴 때 당신이 택한 삶이 후회되진 않나.


“굳이 안정되고 풍족한 삶을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옆에 있겠다는 선택을 했고, 이 선택을 지키려 노력하다 보니 이렇게 살게 된 거다. 항상 환자를 어떻게 진단하고 치료해야 할지에만 몰두했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고, 남은 인생도 웬만하면 이 근처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긍정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을 볼 때. 노숙인이었던 사람, 알코올중독자였던 사람이 변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5년, 10년 꾸준히 노력하니까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들이 있긴 하다. 자격증도 따고, 취직도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좋다.”

<아무튼, 주말>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최영아의 모습./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병원 밖에서 마더하우스, 회복나눔네트워크 등도 만들었던데. 가출 청소년을 보살피기도 한다고.


“노숙인들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나가면 도로아미타불 되는 경우가 정말 많다. 다시 술 먹고 엉망진창이 돼서 병원에 오고, 입·퇴원을 반복한다. 이들이 사람답게 살려면 병원 치료뿐만 아니라, 집과 인간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뜻 맞는 친구들과 함께 주거와 자립을 돕는 이런저런 단체를 만든 거다.”


-엄마가 너무 바빠서 자녀들이 불평하진 않나.


“의사로 사는 데 열중하느라, 엄마로 사는 데 관심이 부족했던 때가 있었다. 도리어 가족 관계가 파괴된 노숙인 환자들을 보면서 엄마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아들은 지금 대학생, 딸은 고등학생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하는 일을 잘 이해해줬다. 다일천사병원 노숙인들로부터 귀염을 받고 자란 아들은 지금 의료사회복지사를 준비 중이다.”


-꿈이 있나.


“우리나라는 사정이 많이 나아졌으니까. 북한, 혹은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기도 하다.”


최영아가 지금껏 받은 상금을 합치면 수억원대에 달한다. 그의 상금은 가난한 누군가의 대학 등록금으로, 집 보증금과 월세로, 병원비로 쓰였다. 성천상 상금의 용처를 물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재작년에 ‘스마일박스’라는 배달음식 전문식당을 열었어요. 노숙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려고 만든 건데, 요즘 경기가 안 좋으니 임차료 내기도 힘든 상황이에요. 거기에 좀 보태고, 집세와 학비를 내줘야 하는 애들도 있고요.”


[이옥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