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선 ‘종북 좌파’ 소리 들었지만, 이젠 혁신 기술로 세상 바꾸고 싶다”

[라이프]by 조선일보

사업 실패 딛고 전기차로 재도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이철상

‘386 벤처 신화’ 이철상씨는 2000년대 휴대폰 기업 부도로 실패한 기업가로 각인됐다. 절치부심 끝에 최근 전기차 업체를 창업하며 새 도전에 나선 그가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 전기차를 몰고 나타났다. 이씨는 “이번만큼은 성공해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혁신가인가, 몽상가인가.’

2000년대 초반 한국 휴대폰 시장에 혜성같이 등장했다가 사라진 이철상(55) 전 VK모바일 대표를 얘기할 때마다 나오는 질문이다. 그만큼 논란과 화제를 동시에 몰고 다닌 인물이었다. 이철상은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 권한대행을 지낸 화려한 운동권 전력을 뒤로 하고 1997년 벤처 사업가로 변신했다. 두께가 1cm도 안 되는 초슬림폰 VK시리즈는 샐러리맨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면서 단숨에 국내 휴대폰 시장 4위까지 올랐다. 전지현·송혜교 등 한류 스타를 모델로 내세워 중국 시장을 공략했고, 당시 LG전자도 뚫지 못한 영국 진출에도 성공했다. VK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몰렸고, 곳곳에서 ‘386 벤처기업 스타’ ‘운동권 벤처 신화’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6년 경영 악화로 회사 문을 닫으면서 3000여 직원이 하루아침에 실직하고, 그를 믿고 투자한 주주들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지금으로 치면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급의 혁신가로 추앙받다가 수많은 투자자를 농락한 사기꾼으로 전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노무현 정권을 후원한 기업가들을 대상으로 한 정치 표적 수사에 휘말려 옥살이까지 하면서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이후 이철상에 관한 소식도 끊겼다.


그랬던 이철상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전기차 제조업체를 창업했다. 지난해 단종된 소형 상용차 다마스의 외관 디자인에 엔진 대신 전기 모터와 배터리를 넣은 업무용 전기차를 지난 3월 국내 시장에 내놨다. 업계에선 최근 에디슨모터스 등 일부 기업이 중국산 반제품을 국내로 들여와 조립한 뒤 지자체 보조금을 타내는 등 국내 전기차 업체에 관한 기술 논란이 커지는 상황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목소리부터 나온다. 새로운 도전을 택한 ‘운동권 벤처 스타’의 창업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화염병 사라지게 한 전대협 의장

-왜 휴대폰이 아닌 전기차로 돌아왔나.


“1997년에 처음 사업을 시작한 것도, 개인적으로 더 애착이 간 아이템도 배터리였다. 내가 휴대폰 시장을 떠나 있던 지난 10여 년 사이 스마트폰이 등장했고, 현재 폴더블(접는)폰을 제외하면 기업별로 기술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휴대폰 시장에 참전하는 게 큰 의미가 없었다.”


-업무용 전기차를 내놨는데 국내 시장에 통할까.


“자동차 대기업들이 전기 승용차를 내놓고 있지만 업무용 상용차는 모델이 많지 않아 틈새시장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물론 아직 국내 시장에 통할지는 알기 어렵다. 내수 시장을 시작으로 전기차 수요가 커지고 있는 중국,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려고 한다.”


-과거 휴대폰 사업 실패 때문에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휴대폰 사업이 실패로 끝났는데도 다른 사업을 하려고 일을 벌인 걸 보고 누군가는 나를 몽상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비판은 비판대로 수용하고 좋은 결과를 내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운동권 출신이 제대로 전기차를 만들 수 있을까’ 하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다.


“2000년대 초반 휴대폰 기업을 운영할 때부터 ‘운동권 출신 벤처기업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다.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운동권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 자본주의 첨병에 선 것을 신기하게 본 것 같다.”


-어떻게 운동권에 뛰어들었나.


“내가 서울대 경제학과 87학번으로 입학한 당시 6월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고 거의 모든 대학생이 투쟁 운동을 하던 때였다. 난 알려진 것과 다르게 강성 운동권도 종북 좌파도 아니었다. 단지 노태우 정부의 정책이 어떤 점에서 잘못됐는지 열심히 공부하고 토론했는데 주변에선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해 학생회장을 하라고 추천했다. 여러 차례 고사하다가 1991년 총학생회장이 됐다.”


이철상의 운동권 이력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1991년 전대협 부의장이었던 이철상은 당시 김종식 의장이 경찰에 검거되자 권한대행을 맡으며 전국 대학생 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당시 강력한 리더십으로 시위대를 이끌던 그의 별명은 ‘지존 철상’. 경찰 수배 중에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반면 화염병 사용 자제, 극렬 시위를 중단하자는 온건파적 주장도 해 ‘운동권 정신에 위배된다’는 비판도 받았다.


-1991년 10월 과격 시위 중단 방침을 밝혔는데.


“시위 현장을 지나가던 한 서울대 대학원생이 경찰 권총에 맞아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극단적 사상이 팽배하던 시절에 생긴 안타까운 사고였다. 사람이 더 이상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기자회견을 열고 ‘화염병을 쓰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더 이상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학생 시위는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의 유가족은 그들의 전부를 잃었다. 과격 시위는 멈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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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시위에 나선 이철상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이철상씨 제공

◇국내 4위 휴대폰 업체로 키워

이철상은 학교 졸업 후에도 경찰 수배 때문에 취직을 하지 못하고 재야 단체에 숨어 사회운동을 했다. 수배가 풀린 1997년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의류 장사를 하기 위해 해외시장을 알아보다가 당시 크게 주목받던 고체 배터리(리튬폴리머 전지) 기술을 알게 된 게 창업의 계기다. 삼성전자에 휴대폰 배터리를 공급해 큰돈을 번 그는 아예 직접 휴대폰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휴대폰 시장 진출 5년 만에 KTFT(KT 계열 휴대폰 제조 업체)를 밀어내고 삼성·LG·팬택에 이어 국내 4위 업체로 성장했다. 유럽, 미국 등 30여 나라에 휴대폰을 판매하며 3억달러 수출탑,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학생운동 하던 사람이 어떻게 사업을 하게 됐나.


“원래 내 꿈은 ‘공돌이’였다. 중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손재주가 좋고 발명을 좋아하셔서 보일러 관련 특허를 여러 건 갖고 계셨다. 그 영향으로 나도 어릴 때부터 집에서 라디오를 조립하거나 무선 마이크 만들기를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하는 바람에 공대를 못 갔지만, 학부 시절에도 시위에 나서는 한편 이공계 과목을 독학하며 테크 분야 창업 꿈을 키웠다.”


-VK모바일의 휴대폰 인기는 어느 정도였나.


“VK 휴대폰은 통화, 문자 메시지 등 필수 기능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대기업 제품에 비해 가격을 크게 낮춰 직장인,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VK100은 두께가 8.8mm로 당시 출시된 제품 중 가장 얇아 와이셔츠 앞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잘나가던 회사가 왜 망했나.


“국내 시장에선 단말기 보조금 제도 때문에 삼성, LG 제품과 가격 경쟁하기 어려워졌고, 해외에선 무리한 확장으로 자금 사정이 악화된 영향이 컸다. 그때는 오로지 얇고 좋은 휴대폰을 만들면 회사가 잘될 줄 알고 수억원 하는 시제품 제작용 3D(입체) 프린터까지 사들이며 무리한 투자를 했는데 그게 패착이었다. 보조금 제도가 시행되고 4개월 만에 회사가 부도났다. 나 좋아하는 제품 연구만 하다가 도끼 자루 썩는 줄 몰랐던 거다. 그렇게 순식간에 회사가 몰락할 줄 몰랐다.”


-주주 피해가 컸다.


“저를 믿고 투자한 분들에겐 항상 죄송한 마음이 크다. 특히 회사 주식 중 개인 보유 비율이 80%가 넘었기 때문에 개인 주주들 피해가 컸다. 당시 주주 중에선 (회사가) 노무현 정부의 보호를 받을 거라 생각하셨던 분도 계셨을 테고, 회생할 거라 기대한 분도 있었을 텐데…. 결과적으로 내 경영 실패로 큰 피해를 끼쳤다.”

◇盧에게 정치자금? “표적 수사로 만신창이”

이철상이 운영하던 VK모바일은 지난 2006년 어음 17억원을 막지 못해 최종 부도 처리됐다. 아내, 딸과 함께 살던 집은 가압류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충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인 2009년 사기, 배임죄, 보조금 횡령죄 등 9가지 혐의로 형사 기소된 것. 4개월 구치소 생활과 1년 법정 다툼 끝에 VK모바일 관련해선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는 이미 ‘부도덕한 기업가’로 낙인찍혀 있었다.


-무슨 일이었나.


“검찰은 회사 직원과 친인척, 거래처까지 400명을 소환해 조사했고 국세청은 회사의 5년 치 회계 자료를 털어 갔다. 회사 자금이 전 정권으로 흘러간 걸 찾으려 했던 것이다. 검찰은 내가 회사 운영으로 자금 압박을 받자 해외 위장 거래 회사를 설립해 회삿돈을 빼돌리고, 지자체(대전)를 속여 국가 보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왜 정치 수사 표적이 됐다고 주장하나.


“당시 강금원, 박연차 등 노무현 전 대통령과 측근에게 정치자금을 준 기업가들에 대한 수사가 한창이었다. 내가 운동권 출신 기업가로 알려져 있다 보니 나 역시 노무현 정권을 후원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검찰은 내가 횡령했다는 일부 회사 직원의 진술만 받고 기소했는데 정작 재판에선 내가 해외 기업에 돈을 보낸 증거조차 제시하지 못했다. 나중에 다급해진 검찰이 ‘모든 회사는 털면 나오니 실토해라. 아는 국회의원 이름 5명만 적어 내라’고 하더라.”


-정권 수사의 희생양이었다는 말인가.


“무죄를 받아 풀려났지만 이미 언론에선 내가 횡령, 배임 등으로 기소된 것만으로 ‘386 벤처 신화의 몰락’ 식으로 보도하면서 혐의를 기정사실화했다.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오지 않다 보니 여전히 이철상이 진보 진영과 유착했던 인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학생운동 한 걸 후회하나.


“운동권에 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때는 투쟁 운동이 우리 사회에 내가 기여할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업에서 혁신적인 제품으로 사회를 좋게 만들려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386 기업가, 종북 좌파 사업가 꼬리표는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 따라다닐 것 같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재임 시절엔 ‘서울시가 이철상의 전기차 사업에 대한 편의를 봐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정치권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는데.


“2000년 총선에서 여당(당시 새천년민주당)에서 서울 관악 공천을 받았지만 내가 안 한다고 했다. 2018년 재보궐 선거 때도 출마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정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나는 제조업처럼 자원을 어느 정도 투입하면 어느 정도의 제품이 나오는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게 좋다. 그런데 정치는 변수가 많다. 정치는 인간이라는 제품을 다루는데 인간이 가장 복잡한 기계라 생각한다. 새로 창업하기보다 정치를 하는 게 10배쯤 더 힘들 것 같다.”


-학생운동 함께 했던 동기들은 뭐하나.


“임종석, 이인영 등 정계에 진출한 전대협 선배들과 달리 서울대 총학생회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은 판사, 변호사, 사업가 등 본인 전공 분야로 진출했다. 이미 어느 정도 우리 사회가 안정된 상황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우리까지 나서서 정치를 할 필요가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386 운동권 출신들이 이끈 진보 정권을 어떻게 평가하나.


“노무현, 문재인 등 진보 정권은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주의 이념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지만 국민 삶을 나아지게 하는 문제 해결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민주화 운동을 통해 정권을 규탄하는 것과 국가를 경영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국가 경제 문제를 감당할 수 없으면 유능한 테크노크라트(과학적·전문적 지식을 지닌 기술 관료)의 힘을 빌려 정책을 꾸려야 했는데 그런 역량도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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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운동권 스타’ 이철상씨는 잘나가던 회사가 망하고, 지난한 회생 절차를 거쳤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파산 위기에 몰린 기업가들을 돕고 있다. 이씨는 “사업에 망해도 사업 자금 대출을 받아 재기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눈물의 보드카’ 마시며 재기 의지 다져

-회사가 부도나고 어떻게 살았나.


“한동안 ‘나는 왜 이리 운이 없지’라는 생각만 했다. 살던 집이 압류당해 아내와 딸은 13평짜리 아파트로 옮겼다. 아내가 월세를 아끼겠다며 두 방 중 하나를 대학생에게 세를 줘서 나는 대학교 선배 집에 얹혀 살았다. 이후 아내와는 이혼했다. 회사가 잘나갈 때 아내가 자기 명의로 아파트를 사달라고 했는데 끝내 못 사준 게 미안했다. 아내가 보기에도 그때 내가 하는 사업이 불안해 보였던 것 같다.”


-사춘기 딸이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내가 수의를 입고 재판받는 모습을 열 살 딸이 방청석에서 지켜볼 때 마음이 아팠는데 정작 딸아이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딸이 중학생이 되고 학원비가 없어서 대부분 과목은 청강하고, 수학 학원만 다녔다. 딸이 학원 끝날 시간에 오지 않길래 학원에 가보니 혼자 수업을 듣고 있었다. 교사가 수업 도중 10분가량 농담을 했더니 ‘비싼 돈 내고 수업 듣는데 왜 쓸데없이 농담하느냐. 농담한 시간만큼 수업을 더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하더라. 나보다 멘털(정신력)이 세다. 지금은 미국 예일대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있다.”


-어떻게 힘든 시기를 견뎠나.


“14년 동안 신용 불량자로 지냈다. 내 명의로 휴대폰 개통도 할 수 없고 다른 사업도 할 수 없어 홀로 베트남에 건너가 5년가량 작은 봉제 공장을 운영했다. 오후 5시 30분에 직원들이 퇴근하면 불 꺼진 공장에 혼자 남았다. 하이퐁 해변에 가서 보드카를 마시며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가리라’ 다짐했다. 바닷가에 가족 단위로 놀러 온 현지 사람들 볼 때마다 울컥했다. 눈물 젖은 보드카였다.”

◇“한국도 실패 용인되는 사회 돼야”

이 대표는 “첫 창업 때보다 지금이 더 바쁘다”고 했다. 전기차 기업 경영과 함께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한국재도전중소기업협회 부회장으로 창업에 실패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일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가 나빠지면서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며 “특히 자살을 생각하는 청년 창업가가 많다”고 했다.


-사업 실패자들을 어떻게 돕나.


“사업이 망한 뒤 가장 힘든 게 사회적 평판이었다. 한국은 사업이 망하면 다시는 기업을 해선 안 된다는 풍조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사업 부도로 파산하면 금융기관에 채무 기록이 10년 동안 남는다. 다시 창업해 사업 자금을 대출받으려 해도 ‘빨간 줄’ 때문에 돈을 못 빌린다. 사업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사업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관련 기관과 협의해 제도를 개선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사업 실패에 이르게 된 사람 100명을 인터뷰해 실패담을 모아볼 계획도 있다.”


-실패 상담도 해준다던데.


“회사를 창업자와 동일시하지 말라는 조언을 자주 한다. 나를 포함해 많은 한국 기업가는 회사를 본인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회사가 위기에 처하면 집을 팔아서라도 부도를 막으려 한다. 아무것도 수중에 남지 않으면 재기하기 더 어려워진다. 실패는 인정하되 가족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수준의 최소한의 자산은 남겨놔야 한다.”


-자칫 책임을 회피하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로 보일 수도 있다.


“창업자가 무한으로 경영 실패 책임을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회계 법인 권한이 커지고, 이사회 역할도 늘어나서 회사 내 특정 구성원의 배임 여부를 가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도 배임죄 처벌 규정을 없애고 있다.”


-첫 창업을 했던 30대 기업가 ‘이철상’에게 조언한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사업을 했다면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업을 전장에 비유하면 나는 공성전(攻城戰)에는 강하지만, 수성에는 약한 장수였다. 일을 벌이고 창의적 제품을 만드는 건 능하지만 회사라는 조직을 관리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건 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만 보고 달려가기 바빴던 그때의 나를 잠시 앞에 앉혀 놓고 함께 담배 한 모금 피우며 ‘여유를 갖고 조금 더 겸손해져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걸어온 길에 대한 후회는 의미가 없다. 실패는 실패로 남겨두고 싶다. 실패는 내게서 많은 걸 앗아갔지만 반대로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했다. 그리고 실패 경험이 내 성공 가능성을 더 높여줄 거라 믿는다.”


[최인준 기자]

2022.10.2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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