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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만화 주인공도 이렇게는 못 만든다”… 최고 몸값 증명해낸 이 선수

by조선일보

WBC 일본팀 우승 이끈

오타니 쇼헤이 심층 해부



조선일보

지난 6일 일본 오사카돔에서 열린 WBC 일본 대표팀과 한신 타이거즈의 연습경기에서 홈런을 치고 기뻐하는 오타니 쇼헤이. /연합뉴스

“오타니는 신화 속 생물, 유니콘이다.”


일본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29)를 두고 미국 메이저리그 LA 에인절스 동료들이 하는 말이다. 오타니가 속한 일본 대표팀은 지난 22일 미국 플로리다주(州) 마이애미에서 열린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미국 폭스뉴스는 “이번 WBC에서 오타니는 자신이 왜 유니콘인지 그 정수를 보여줬다”고 했다. 일본 대표팀은 오타니의 투구로 WBC를 시작해, 오타니가 던진 마지막 공으로 경기를 끝냈다. 그는 WBC에선 물론이고, 현대 프로 야구에서도 보기 드문 ‘투타(投打) 겸업’ 선수다. 대회 최우수선수(MVP)도 오타니가 가져갔다.


실력만 월등한 게 아니다. 지난 17일(현지 시각) 미국 마이애미 공항에 도착한 오타니 머리 위엔 일본 대표팀이 아닌, 체코 대표팀 모자가 있었다. 일본과 1라운드에서 만난 체코는 자국에 프로 리그가 없어, 본업이 따로 있는 ‘투 잡’ 선수들을 주축으로 대표팀을 꾸렸다. 이들이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는 모습이 야구팬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오타니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체코팀에 응원을 보낸 것이다. WBC 해설을 위해 일본을 찾은 박찬호가 현지 취재진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오타니 선수 인성에 대해 많이 가르친다”고 했을 정도다.


침을 뱉는 건 기본이고, 화가 나면 방망이를 부수기까지 하는 거친 야구판에서 오타니가 심판과 살갑게 이야기하는 장면, 다른 선수들과 활짝 웃으며 대화하는 장면도 화제를 모았다. MVP를 수상한 뒤엔 “일본뿐 아니라 한국, 대만, 중국 등 아시아, 전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야구가 더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동력이 돼 우리가 우승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은 이번 WBC 본선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야구계에선 올 시즌이 끝나면 자유계약(FA) 신분이 되는 오타니가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인 5억달러(약 6548억원) 상당의 다년간 계약을 할 것으로 전망한다. 키 193㎝에 몸무게 95㎏ 피지컬. 야구 선수 최초로 독일 의류 브랜드 ‘휴고 보스’ 모델이기도 하다. 팬들 사이에서 “만화 주인공도 이렇게 설정하면 과하다고 욕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하다. 종종 혼혈로 의심받지만, 사회인 야구 선수 출신 아버지와 배드민턴 선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다. ‘아무튼, 주말’은 실력과 체격은 물론이고, 인성까지 겸비한 유니콘 오타니를 심층 해부했다.


◇MLB 전설을 다시 쓰는 ‘이도류’


오타니의 상징은 흙투성이 유니폼으로 마운드에 서 있는 모습이다. 선발 투수는 유니폼이 더러워질 일이 거의 없다. 경기 중 서서 공만 던지기 때문이다. 오타니는 다르다. 타자로서 치고 달리고 슬라이딩을 하다 보니, 그의 유니폼엔 늘 흙이 묻어 있다.


오타니는 현대 프로야구에서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투타 겸업’ 선수다. 단순히 겸업만 하는 게 아니다. 한 선수가 투수나 타자로만 출전해도 내기 어려운 성적을 두 분야 모두에서 올린다. 미국 야구의 전설인 베이브 루스 이후 104년 만에 처음으로 한 시즌에 두 자릿수 승리·홈런을 달성했고, MLB 역사상 처음으로 투수 규정 이닝(162이닝)과 타자 규정 타석(502타석)을 모두 채웠다. 최고의 투수를 뽑았더니, 최고의 타자가 같이 온 셈이다.


일본에선 이를 ‘이도류(二刀流)’라고 한다. 좌우 양손에 칼을 가지고 싸웠다는 17세기 검술가 미야모토 무사시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번 WBC 미국과의 결승에서도 오타니는 지명타자로 타석에 들어섰다가 9회에 구원투수로 등판해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외야에 있는 불펜에서 몸을 풀다가, 자기 타순이 되면 재빨리 더그아웃으로 와 땀을 닦으며 방망이를 드는 ‘이도류의 부지런함’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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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WBC 결승전에서 9회 초 일본팀 마무리투수로 나온 오타니가 전력을 다해 공을 던지고 있다. 그의 유니폼에 묻은 흙은 이날 타자로 등장해 슬라이딩하며 생긴 것이다. /EPA 연합뉴스

물론 오타니 외에도 아마추어 때 4번 타자로 활동하다 투수로 전환하는 등 던지기와 치기 모두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은 종종 있었다. 프로 데뷔 후엔 상황이 달라진다. 투타 겸업은 재능을 떠나, 엄청난 훈련량과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WBC 멕시코팀 감독이자 LA에인절스 코치였던 벤지 길은 “현대 프로야구에서 투수와 타자는 사실상 각기 다른 스포츠라고 보면 된다”며 “오타니가 이 두 분야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이기 위해 매일 쏟는 노력을 보면, 역으로 왜 다른 사람들은 도전하지 않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타니는 왜 이렇게 힘든 이도류를 택했을까. 오타니가 2019년에 한 언론 인터뷰를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투타를 겸하면, 타자를 하다 마지막에 마무리 투수로 경기에 나서는 등 지금까지는 없었던 다양한 전술과 방법이 생길 수 있다. 야구의 재미를 더한다는 점에서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나를 하나의 샘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성공한다면, 야구계에 다양성이 생겨나 다음에 이도류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그 길을 최대한 넓게 만들고 싶다.”


◇야구 수도승, 야구에도 혼을 담는다


오타니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단어가 ‘야구 수도승(baseball monk)’이다. 고액 연봉을 받는 야구 선수들은 술과 도박, 마약 스캔들 등에 연루되는 경우가 있다. 국내 야구계에서도 잊을 만하면 비슷한 일들이 터진다. 오타니는 2020년까지 차는 물론이고 운전면허도 없었다. 일본 니혼햄 파이터스에 있을 땐 기숙사에 살았고, LA 에인절스로 와서도 경기장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살며 집과 훈련 센터, 야구장만 오간다. 흡연은 안하고, 술 역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안마신다.


유명 남성 잡지 GQ에 ‘자신의 필수품 10가지’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이 코너에 등장하는 유명인들은 명품이나 한정판 등 고가품을 자랑하곤 한다. 그런데 오타니는 숙면을 위한 베개, 배트와 글러브 등 정말 야구와 관련된 물건 10개를 골랐다. 그에게는 야구가 일상의 전부인 셈이다.


경기장에서 쓰레기 잘 줍고, 오심한 심판에게도 미소 지으며, 팬들에게 사인 잘해주기로도 유명하다. 투타로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팬이 요청하면 길을 가다 가방을 내려놓고 사인을 한다. 자기 유니폼을 입고 있는 강아지에게도 사인을 해주는 모습이 포착된 적도 있다. 2021년 올스타전에선 대회 출전 선수 중 가장 많은 사인을 했다. 올스타전에 참가한 다른 팀 선수와 코치까지 그에게 사인을 요청하면서다. 스포츠 관점에서 일본 문화를 분석해온 작가 로버트 와이팅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 야구는 끝없는 훈련과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작은 일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는 무사도 정신을 닮았다. 오타니 역시 마찬가지다. 예의 바르고 신중하며 사생활은 최소화하고, 오직 야구에만 ‘헌신’하는 오타니의 모습은 현대판 수도승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오타니 야구의 기본이 된 만다라트


‘몸 만들기, 제구, 구위, 변화구, 스피드 160㎞/h, 운(運), 인간성, 정신력.’


오타니가 고1 때 ‘8개 구단 드래프트(신인 선발) 1순위’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라다 기법’에 따라 작성한 세부 목표 8가지다. 오타니의 야구 수련 정점엔 이 ‘하라다 기법’이 있다. 일본 오사카 마쓰무시 중학교 육상 교사였던 하라다 다카시가 고안한 자기계발법의 일종이다. 하나의 큰 목표를 세운 다음, 이를 달성하기 위한 8개의 세부 목표를 세우고, 8개의 세부 목표마다 또 8개씩 총 64개의 실천 과제를 작성한다. 활짝 핀 연꽃 모양처럼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발상해 나간다는 사고 기법 ‘만다라트’에 자기계발 요소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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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가 고1 때 작성한 만다라트를 한국어로 의역한 것. 하나의 큰 목표가 8개 세부 목표로, 다시 64개 실천 과제로 연꽃처럼 피어난다. /일러스트=김영석

하라다는 1994년 핀란드 연수에서 이 기법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그는 일본 특유의 암기식 교육 대신, 목표를 시각화하고 실천해 나가기 위해 이를 사용했다. 당시 380개 중학교 중 꼴찌였던 하라다의 학교는 이를 통해 일본 최고의 육상 명문으로 거듭났다. 오타니는 고교 시절 자신의 야구 코치였던 사사키 히로시로부터 ‘하라다 기법’을 배웠다.


고등학생 오타니는 ‘8개 구단 드래프트 1순위'의 세부 목표로 몸 만들기, 스피드와 같은 실력적인 요소뿐 아니라 ‘운’ ‘인간성’을 포함시켰다. ‘운’을 위해서 ‘쓰레기 줍기’ ‘인사 하기’ 등을 실천 과제로 삼았고, ‘인간성’을 위해선 ‘예의, 배려, 감사’ 등을 과제로 적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오타니는 이후에도 자신의 최신 목표를 반영하기 위해 15개의 차트를 더 작성했다”며 “모두가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될 순 없지만, (이런 방식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있어 최고는 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남정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