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쓸쓸하고 고요한 여행-한양성곽에서 달라진 세상을 만나다
흥인지문 언덕은 노란 꽃으로 가득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성곽과 창신동 마을은 깔끔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다. 낙산 이화동 꼭대기에는 오래된 지역을 재생한 문화공간들이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이제 오직 걷기 위해 찾는 곳이 아닌, 조용히 사유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제공해 주는 한양의 성곽길로 시간을 쌓고 있는 것이다. 성북동 어귀에서 시작되거나 끝이 나는 백악구간은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더운 계절의 청량제가 되어주고 있다. 인왕산, 숭례문, 남산 구간은 다음에 가기로 했다.
낙산구간
낙산구간 초입, 한양도성박물관 옆에서 바라본 흥인지문 일대. 저 뒤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식물 지붕이 인상적으로 보인다. |
한양성곽은 조선 개국 즈음에 건설된 ‘역대급 수호성’이다. 백성과 임금이 사는 수도의 범위와 방위를 맡고 있는 시설이니 수호성이라는 표현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것이 역대급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한양성곽은 성곽의 경계 또는 수비 기능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발휘해 본 적이 없는 평화의 성곽이라는 점에서 역대급이다. 남한산성, 평양성, 부산성, 동래읍성, 행주산성 등은 수많은 아군과 적군이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 죽어간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한양도성은 조선조 600년 동안 단 한번도 인간의 피를 묻히지 않은 역대급 성곽이다. 도성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평화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켜주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성곽이 멀쩡했다고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란도 많았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파죽지세의 기세로 한양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역대급 멘붕에 빠지고 만다. 아! 왕이 도망을 가다니! 성주가 제 수하들을 데리고 백성을 버린 채 제 살길만 찾아 36계 줄행랑을 치다니! 무릇 성의 우두머리는 침략을 당했을 때 제일 앞에 서서 밀려드는 적군의 목을 베고,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고, 성 안의 노약자, 부녀자들을 위로하는 일당백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이 함락이 되면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어도 ‘우리 백성의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장부의 순정을 드러내야 역사에 남지 않겠는가? 그런데 왕이 제 목숨 하나 건지겠다고 백성을 팽개치고 도망을 가다니! 역시 역대급 멘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왕조 시대에 있어서 왕의 생존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중대한 일이다. 그러므로 선조나 인조는 도망간 게 아니라 국가를 보전하기 위한 병법 중 36계를 사용한 것이라고 퉁 치고 말겠다.
오늘 한양성곽 탐방 코스인 낙산구간과 백악구간은 이 밖의 인왕산구간, 숭례문구간, 남산구간, 흥인지문구간 등 총 6개 구간 가운데 가장 울창한 곳이다. 낙산구간은 인구가 많고 시대가 현란하다. 낙산구간 성곽 너머로 선명하게 보이는 신당동, 창신동, 이화동, 돈암동, 성북동 등은 조선 시대 때부터 존재해 온 엄연한 고도의 일원들이다. 조선의 흥인지문이 열리면 성문 밖 주막거리에서 묵고 있던 상인들이 차례차례 입성해 장을 열었고, 그것이 오늘의 동대문 시장이 되었다. 창신동은 우리나라 근대 상공업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골목골목에서 사람과 기술이 만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봉제, 의류, 완구 등은 물론 유통 회사들도 곳곳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낙산 언덕을 뒤덮고 있는 이화동 역시 조선시대 동인과 서민들이 모여 살던 밀도 높은 마을이다.
성곽길에서 본 창신동, 성벽에 올라간다는 것은 거의 죽겠다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성벽 아래 창신동길은 절벽 수준이다. |
성북동은 조선시대 도성 수비대였던 어영청이 주둔한, 한양도성의 소프트웨어 역할을 한 동네로 영조 때부터 그 이름을 높이 올린 지역이다. 한양성곽 성북동 지역을 걷다 보면 성북동 길에서는 넘사벽으로만 느껴졌던 대저택의 넓은 마당과 정원, 그리고 남루한 지붕과, 반대로 아담한 마당의 단출한 누옥들도 바로 눈 아래로 펼쳐지고 있다. 한양도성 낙산구간은 사람의 숲답게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문을 열고 있는 문화 거리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화동이 있다.
천천히 걷는 마을, 이화동 성벽 골목
이화동 하면 벽화 마을이 떠오름과 동시에 소란, 절제, 함께 살기 등의 단어들이 연상된다. 대학로 평지에서 다운타운을 걷다 가파르고 좁은 언덕 골목을 헉헉거리며 오르다 보면 낙산성곽이 나온다. 이화동 성벽 마을은 바로 그곳 골목에 있는 다닥다닥한 집들을 말한다. 전망 좋고, 운동하기도 편하고, 그리고 성곽길을 걷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이른바 ‘벽화 마을’로 불리는 이화동 일대는 2006년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재생 작업이 이뤄지기 시작, 오늘에 이른다. 벽화 마을로 소문이 난 뒤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관광지가 되었다. 그 후로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화동은 다시 1950년대 후반에 형성된 조용한 마을로 되돌아갔고, 지금은 소곤소곤한 골목이 되어 달라진 세상과 새로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양성곽 낙산구간 이화동 성곽 마을은 쇳대박물관, 최가철물, 이화중심, 개뿔, 이화동마을박물관, 김미연칠보연구소 등 머물고 체험하고 쉴 곳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골목의 중심은 뽕나무 아래 텃밭이다. 나는 그 텃밭을 생전 처음 보았지만 그 공간은 이화동 아니라 어느 마을에 가더라도 중심이 되기에 충분해 보였다. 텃밭에는 말 그대로 가정용 채소를 가꾸는 텃밭과 커다란 뽕나무(오디나무), 그리고 평상 두 개가 그늘 아래에 앉아 있다. 남자 한 사람이 깨끗한 천을 적셔 평상을 몇 번이고 닦고 있었다. 정성도 저런 정성이 없다.
이 텃밭을 제대로 보기 위해 바로 옆 ‘이화중심’이라는 카페 테라스에 앉았다. 이화중심은 고양이 카페다. 고양이가 사는 카페가 아니라 고양이 그림이 가득한 공간이다. 차를 주문하면서 ‘고양이 그림 체험’을 희망하면 붓과 물감과 카드형 캔버스를 제공해 준다. 그렇게 손님들이 그려놓은 고양이 그림들은 제각각의 사연을 안은 채 카페 울타리 벽면을 메우고 있다.
잠시 후 이화동 텃밭에 사람들이 모였다. 평상 위에 소반 몇 개가 다리를 펴고 밑반찬이 깔리기 시작했고, 곧 작업복을 입은 그들이 평상 위에 앉았다. 근처 건물을 새로 꾸미는 작업을 하는 분들이다. 조금 전 평상을 깨끗이 닦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었다. 곧이어 흰 쌀밥과 찌개가 올라가자 손님들의 손놀림이 바빠졌고, 구경하는 사람 역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서울에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즐거웠다. 오디나무 아래 평상에서의 점심밥이라니.
골목에는 가죽 공예를 체험할 수 있고 디자인 제품을 구입할 수도 있는 가죽 공방 ‘손놀림’, 일제시대 때의 건물(적산가옥)을 재활용해서 빈티지 공간으로 만들어 전시 공간을 개방하고 커피, 차, 맥주, 피자 등을 판매하는 ‘개뿔’ 등이 방문자 눈길을 끌고 있다. 골목 꼭대기에 있는 김미연칠보연구소는 칠보 작가 김미연 씨의 작업 공간이자 갤러리로 우리나라 민속 공예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고양이들의 천국 낙산공원
사람에 익숙한 길냥이들. 무료한 잠자리를 방해하는 인간과 잠시 눈인사를 나눈다. |
이화동 성곽 마을을 빠져나오면 종로 마을버스 3번 버스 종점과 낙산공원이 있다. 마을버스는 대학로와 이곳 낙산을 오가는 버스다. 낙산공원은 이화동이나 삼선교 주민들의 산책코스이자 사랑방 역할을 하는 전망 좋은 지점이다. 이 길을 걸으며 제일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나무와 풀, 들꽃, 그리고 카메라 든 사람과 무료한 동작의 고양이들이다. 성곽길 생태계에는 평화가 찾아온 느낌이다. 사람이 사는 마을을 관광지로 착각하고 24시간 소란을 떠는 사람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고, 마을은 되살아났으며, 탐방객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던 오래된 나무와 낡은 집들의 디테일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도 달라졌다. 관광에서 다시 사색으로 바뀐 사람의 마음처럼 낯선 풍경이었던 한양성곽이 생활 속에 들어온다.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특히 고양이들의 본성을 보는 것이 신기로웠다. 고양이들이 곳곳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탐방길에서 눈을 감고 경계를 푼 채 유유히 누워 있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흥인지문에서 시작한 성곽길 걷기는 내내 안길을 걷다 ‘낙산공원 놀이마당’ 암문, 또는 종로 마을버스 2번 종점을 중심으로 성곽 바깥길로 이어진다. 그 길에서는 잠자는 고양이,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그리고 성벽에 붙어있는 참새들을 사냥하는 고양이, 그리고 그 찰나를 사진에 담으려 하는 방문객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고양이들은 사람들의 기척에 거의 반응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성곽 바로 옆 장수마을의 분위기와도 많이 닮아 있다. 장수마을은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낙산 동쪽 비탈 지역의 이름이다. 오래전 뉴타운 건설이 계획되기도 했으나 주민 투표를 통해 그 결정을 뒤집고 도시 재생 절차를 밟아 아름답고 단출한 마을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성곽의 시대별 석조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가톨릭대학 뒷길 성벽을 지나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 장수마을의 오래된 담장, 담장 위의 철망, 담장 위에 꽂아놓은 깨진 유리병 조각 등이 1970~1980년대의 서울 풍경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 같아 그리움과 쓸쓸함이 동시에 일어나곤 한다.
마을을 내려가 삼선교역 4번출구 옆 창경궁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혜화문이 있다. 혜화문은 부암동 창의문에서 백악산을 너머 성북동을 지나 창경궁로 북쪽에 이르는 서울한양도성 백악구간의 끝이자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여름 명문막국수에서의 환희
명문막국수는 혜화동 성북동 일대의 명물 국숫집 가운데 한 곳이다. 막국수는 여름철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육수와 함께 먹으면 그 시원함이 뼛속까지 다다르고, 비빔으로 먹으면 몸속의 뜨거운 기운이 매운 기운에 모두 차게 상쇄되어 버리는 느낌을 즐길 수 있다. 특히 국수의 재료가 찬 성분인 메밀로 이뤄져 있어서 그 냉기를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 체질적으로 몸이 원래 뜨거운 사람들은 물막국수를 먹는 게 몸이 좋아하고, 기운이 차가운 사람들은 가급적 물막국수보다는 비빔막국수를 먹는 게 바람직하다. 여름에 어울리는 명문막국수의 메뉴로는 국내산 메밀로 만드는 메밀 물막국수(8000원), 메밀 비빔막국수(8000원), 명태식해 비빔막국수(1만 원, 곱배기 1000원 추가, 막국수 곱배기는 1인분에 1만 원). 이열치열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메뉴들로는 뜨끈뜨끈한 메밀 들깨 칼국수(8000원), 메밀 들깨 수제비(8000원), 메밀 들깨 칼제비(2인분 이상, 1인분에 8000원) 등이 있다. 사이드 메뉴로는 메밀 부침, 메밀 전병, 메밀 묵사발(각각 8000원) 등이 있다. 봉평막걸리, 소주, 맥주 등 술과 안주도 맛볼 수 있다. 마늘보쌈이 3만~4만 원, 편육 1만9000원이다. 찬 기운을 지닌 나는 평소 메밀을 회피하는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매콤한 명태식해 비빔막국수를 먹었는데, 감침맛 나는 식감이 너무 뛰어내 먹는 내내 비실비실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위치 - 서울시 성북구 창경궁로319(성북동1가 35-17)
- 운영 시간 - 11:30~21:00 *연중무휴
백악구간, 낙산구간의 시작이자 끝 지점. 혜화문
조선 시대 한양에는 4곳의 큰 문과 4곳의 작은 문이 있었다. 흥인지문, 서대문, 숭례문, 숙정문 등이 동서남북 4대문을 이뤘고, 소문도 네 곳 있었다. 북동쪽 혜화문의 이름은 원래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 정문의 이름이 홍화문이 되면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혜화문으로 바꿨다. 혜화문이란 이곳이 북방 여진의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라 그들을 교화하고 소통한다는 의미로 혜화문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남소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광희문을 뜻한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근처 광희문사거리와 한양공고 중간에 위치한 광희문은 백성 가운데 죽은 사람이 있으면 이 문을 통해 장지로 나가는 규칙에 의해 시구문이라 부르기도 했고, 청계천 물이 이곳을 통해 성문 밖으로 나간다 해서 수구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북소문으로는 창의문이 있다. 자하문 또는 북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혜화문은 홍예와 문루, 성곽 일부가 남아 있는데,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문루 바닥에 봉황이 그려져 있는 게 특징이다. 한양의 4소문은 백성의 삶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조선 시대 당시 혜화동, 성북동 일대에 새가 너무 많아 백성들의 삶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문루에 용이 아닌 봉황을 그려 새들의 접근을 경계했다는 속설이 있다. 문루에 너무 가까이 가면 경보 장치가 울리고, 관리실 직원들이 달려오는 일이 생기므로 문루 경계를 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다.
변하지 않은 600년 백악산 그 소나무숲
성북동 성곽의 작은 집들 |
백악구간은 혜화문과 창의문을 연결하는 북악산(백악산) 성곽길을 말한다. 이곳은 전 구간 성곽 안쪽 길을 걷게 되어 있다. 한양성곽 전 구간 가운데 여전히 병사들의 경계근무가 이뤄지고 있는 군사지역이다. 1396년 태조 5년에 최초 축조된 이후 600 여 년 동안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이 없다니, 이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한양성곽 가운데 백악구간은 방문자들의 확인 과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창의문 또는 말바위 안내소 등 출발 지점의 안내소에 ‘들어가’ 출입증을 받아 목에 걸고 구간을 걷고, 나갈 때 안내소에 출입증을 반납하는 것으로 방문자에 대한 확인 작업은 끝이 난다. 구간 곳곳에는 이 지역의 경계를 담당하는 사복 차림의 군인들이 서 있다. 그들은 경계 작전은 물론 시민의 불법 사진 촬영을 단속하거나 간단한 여행 팁을 제공하는 역할도 한다. 맘 놓고 사진 촬영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조선 시대 때 경복궁을 직접적으로 호위하던 방식이 21세기 오늘날 청와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구간에 비해 마음이 위축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름다운 소나무, 백악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울과 경기도의 풍경, 현대사의 사건이 담긴 유물, 부분적이긴 하지만 이름난 바위 등 관광지로서의 볼거리, 뜻밖의 장면 등을 만날 수 있는, 그리하여 두 눈 크게 뜨고 사방팔방을 관찰하며 걸을 만한 곳이다.
숙정문, 촛대바위로 보는 일제의 조선 뒤틀기
경복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촛대바위 |
음기 가득하다며 문을 닫아 버렸던 북쪽문 숙정문 |
음양오행에 따르면 북쪽은 음습한, 음기 가득한 방향이다. 북대문은 한양성곽에 꼭 필요한 4대문의 하나로 건축되었지만, 이런 풍수지리 때문에 오랜 세월 닫혀있었다. 사람의 통행이 불가능하니 출입구 통행로도 발달하지 못했다. 길은 사람이 만드는 건데, 문이 닫혀 있으니 사람 발길이 없고, 사람 발길이 없으니 길도, 주막거리도, 난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곳 북대문 숙정문의 본명은 숙청문이었다. 남대문인 숭례문인 예를 숭상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에 비해 숙청문은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비교적 강압적이고 네거티브한 의미가 담겨있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로 알려져 있다. 숙정문은 풍수지리적으로 경복궁의 양팔격인 숙정문과 창의문으로 사람들이 통행하는 것은 지맥이 손상된다는 상소가 받아들여지면서 암문(문이 닫힌 문이라는 뜻)이 되었고, 그 주변에는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제한했다. 그 소나무들이 오늘날, 특히 숙정문 일대의 풍광을 사계절 초록으로 빛나게 해 주고 있으니, 세상 나쁜 일은 결코 없다는 점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백악산 정상을 향해 걷다 보면 왼쪽에 촛대바위 안내문이 나온다. 높이 약 13m에 이르는 촛대바위는 예상한 그대로 촛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 아래에서 보면 촛대바위의 위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겠지만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꼭대기, 촛농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형상만 상상할 따름이다. 촛대바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이 있다. 데크에 서서 계곡 저편으로 내려다 보면 경복궁과 광화문, 그리고 세종로가 한눈에 잡힌다. 대단한 풍경이다. 그리고 경복궁과의 수평을 맞추지 않은 광화문, 그것 때문에 역시 뒤틀린 채 조성된 세종로 육조거리와 숭례문을 향하는 굽어진 길들이 눈에 잡힌다. 광화문을 뒤틀지 않고 똑바로 세웠다면 백악산과 광화문과 세종로가 일직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피하기 위해 숭례문의 각도를 조금 비틀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백악과 경복궁, 광화문, 세종로, 그리고 숭례문은 일직선상에 놓여있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일제에 대한 분노도 되살아 난다.
닭을 닮은 봉황 그림 창의문
촛대바위를 지나면 곡장, 청운대, 백악마루, 백악쉼터 등 우리 현대사를 소환할 만한 전망 공간과 1968년, 북한 124군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사건 때 총격전의 훈적이 남아있는 1.21사태 소나무도 볼 수 있다. 성곽길 왼쪽으로는 사실 볼 게 없다. 군사지역이라 특별한 문화 공간도 없고 눈길도 잘 가지 않는다. 단지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계단 오른쪽으로 보이는 부암동 계곡 풍경만이 잔잔히 앉아 있을 뿐이다. 가파른 계단을 모두 내려가면 창의문이 나온다. 백악구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지점이다. 이곳 안내소에 통행증을 반납하면 백악구간 탐방도 끝이다.
창의문에는 홍예와 성벽에 특이한 그림과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홍예에 새겨진 봉황을 자세히 보면 머리가 닭을 닮았다. 그것은 조선 시대 때 창의문 너머 부암동 일대에 지네가 너무 많아 그 기세를 꺾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창의문은 1395년 한양도성 축조 때 최초 건축된 이후 개중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최초의 축조 형태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역사적 건축물이 분명해 보인다. 창의문으로 나가면 2020년 서울 부암동을 만나게 된다. 만두집, 통닭집, 돈가스집, 방앗간 등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는 맛집들과 미술관이 문을 열고 있다. 빌딩이 없어서일까? 한양성곽의 여운이 깊기 때문일까. 아직 현실로 되돌아 온 느낌이 나지 않는다.
글 이영근(여행작가) 사진 안동수(다큐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