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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남대문에서 물건 팔다가
반찬통 만들어 6,000억 원에 매각한 회사

by데일리

락앤락(Lock & Lock)이라는 브랜드명은 ‘잠그고 또 잠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회사의 창업자인 김준일 전 회장은 1978년 ‘국진유통’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다양한 제품을 유통하면서 매출을 창출했다. 욕실, 청소, 어린이용품 등 다양한 분야의 수입제품을 남대문시장에 내다 팔면서 국진유통은 성장했다. 하지만 곧 그 성장에는 정체기가 찾아오게 된다. 매출은 더는 커지지 않았고, 무역 사업에서의 비전은 보이지 않았다. 김준일 창업주는 유통이 아닌 제조업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플라스틱 제조 분야에 뛰어들게 된다.

국진화공, 반찬통에 주목하다

우리나라 밀폐용기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브랜드, 락앤락

1985년 락앤락의 전신이 되는 ‘국진화공’이 세워졌다. 국진화공은 사업 초반에는 돈이 되는 건 뭐든 다 만들었다. 하지만 한 분야에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다 보니 재고 관리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판로 개척도 그리 쉽지 않았다. 고민에 빠져있던 김준일 창업주는 사업차 중국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중국 제조업의 발전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내 제조업의 한계를 실감하고 만다.


저렴한 비용, 풍부한 인력을 바탕으로 중국 제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김준일 창업주는 국진화공이 평범한 제품을 제조해서는 앞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다. 국진화공의 600여 종의 제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우선 20여 개 목록을 작성했다. 여기에서 세 가지 기준을 세우고 하나를 선택하고자 했는데, 그 기준은 ‘1. 세계 어느 국가에서건’ ‘2. 문화적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3. 일 년 내내 사용할 수 있을 것’의 세 가지였다. 그리고 이 조건에 충족되는 한 가지 품목을 마침내 선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반찬통’이었다.

수천 번의 실험 끝에 찾은 황금비율

락앤락은 밀폐용기를 넘어, 다양한 분야의 제품들을 판매하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당시만 해도 그릇에 뚜껑을 덮어두는 수준인 밀폐용기 반찬통이 김준일 창업주가 발견한 돌파구였다. 기존의 밀폐용기들은 국물이 새기 일쑤였고, 냄새도 잘 스며드는 구조였다. 밀폐력을 보완하고 냄새를 차단할 수 있는 밀폐용기가 있다면,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부 회의를 거친 결과, 완벽한 밀폐력을 위해 반찬통 뚜껑에 ‘날개’를 달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됐다. 사각형 밀폐용기 각 면에 날개를 장착한 ‘4면 결착 밀폐용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고, 제품 상용화까지 수천 번의 실험이 이뤄졌다.


날개의 두께가 두꺼우면 뚜껑이 쉬이 열리지 않아 불편했고, 반대로 얇으면 쉽게 부러졌다. 끊임없는 실험 끝에 마침내 회사는 유연하게 열고 닫히면서도 잘 부러지지 않는 0.4mm의 최적의 날개 두께를 찾아내게 된다. 락앤락은 이 기술로 1998년 특허를 취득했으며, 전 세계 각국에서 수천 건에 육박하는 특허와 상표, 의장을 취득하며 기술력을 확보해 나갔다. 락앤락은 이후 플라스틱 밀폐용기뿐 아니라 내열유리 밀폐용기, 아웃도어 용품, 조리기구 등으로 제조품목을 확대해 나갔다.

인포머셜 마케팅으로 성공을 거두다

미국의 바이어가 손을 놓은 이후, 고민 끝에 락앤락은 자력으로 QVC에 진출해 ‘홈런’을 치게 된다

긴 연구 끝에 제품이 출시됐지만, 제품이 나오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부의 기대와는 달리 판로는 쉬이 개척되지 않았다. 국내 시장에서는 ‘완벽히 밀폐되며 변형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설득시킬 수 없었다. 락앤락은 결국 우리나라 시장 대신 해외 개척에 먼저 나서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밀폐용기를 필요로 하는 시장이어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해외 각국에서 치러지는 박람회에 출품하던 락앤락은 캐나다에서 만난 바이어로부터 ‘인포머셜 마케팅’을 하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인포머셜은 정보를 뜻하는 인포메이션과 광고를 뜻하는 커머셜의 합성어로, 인포머셜 마케팅은 곧 제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광고 기법을 이야기한다. 제품의 우수한 성능과 이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충고였다. 이에 락앤락은 미국에서 판로 개척을 위해 홈쇼핑 채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최대의 홈쇼핑 채널은 QVC를 통해 미국 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된다.

국내 시장에 역수입, 성공을 거두다

지금도 락앤락은 홈쇼핑 채널의 사랑을 받는 인기 브랜드로 꼽힌다

홈쇼핑 방송에서 락앤락은 케첩 등을 밀폐용기에 담고 격하게 흔들거나 용기 안에 카메라를 담아 물속에 담그는 등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밀폐력을 증명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방송을 본 미국 소비자들의 주문이 쇄도했고, 방송 첫날 판매량 5천 세트를 전량 매진시키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를 계기로 락앤락은 미국 시장에서 먼저 자리를 잡게 되고, 회사의 의도대로 냉대 받던 우리나라에서 러브콜을 받게 된다.


2001년 국내 홈쇼핑으로는 처음으로 LG홈쇼핑 채널에서 락앤락 제품이 방송됐다. 그리고 미국에서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첫 방송 때부터 성공을 거뒀다. 준비된 초도 물량 2천 세트가 30분 만에 매진됐으며, 이후로도 5번 더 매진을 기록했다. 꾸준히 성장하던 락앤락은 2003년에 이르러서는 1,138억 원의 높은 매출을 기록했으며, 국내 밀폐용기 시장 점유율 80%를 기록하며 시장 1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중국에서는 브랜드 고급화 전략으로

중국, 베트남, 태국, 인도 등지에서 락앤락은 브랜드 고급화 전략을 펼쳐 성공을 거뒀다

2000년대 초반부터 급속도로 성장하던 중국 시장은 락앤락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곳이었다.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던 락앤락이었지만, 기존 시장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분명했다. 2003년의 높은 매출은 다음 해부터 하락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눈을 돌린 락앤락은 2004년 상하이에 영업법인을 설립하면서 중국 진출을 본격화했다.


이들은 성공을 위해 중국에서는 기존의 전략과는 다른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바로 ‘고급화’ 전략이었다. 중국 국산 제품에 대한 불신이 심했던 당시의 소비자 심리에 착안해, 해외의 유명 명품 브랜드로 락앤락을 포장했다. 높은 임대료에도 불구하고 락앤락 1호점을 명품매장이 즐비한 상하이 화이화이루에 냈으며, 중국산 제품에 대한 현지인들의 성향을 고려해서 중국에 생산 공장이 있음에도 중국에는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만 공급했다. 가격도 우리나라보다 1.5배가량 비싸게 책정했다. 덕분에 중국에서 락앤락은 고급 브랜드로 포지셔닝할 수 있었고, 중국 진출 5년 동안 회사는 연평균 150%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창업주가 떠나고, 새로운 시기를 맞은

현재 락앤락은 창업주가 아닌 김성훈 대표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서의 성공 이후 인도, 베트남, 태국 등지로 진출할 때도 락앤락은 브랜드 고급화 전략을 통해 성공을 거뒀다. 세계 각국에서 거둔 성공 덕에 이제 락앤락이라는 브랜드명은 호치키스, 포스트잇처럼 밀폐용기를 뜻하는 대명사로 기능하고 있다. 이들은 종합적인 주방, 생활용품 브랜드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계속 달려가고 있다. 다만 이 길을 현재는 창업주인 김준일 전 회장은 함께 걷고 있지 않다.


김준일 전 회장은 지난 2017년 사모펀드 운용사인 어피너티에퀴티파트너스에 경영권을 넘겼다. 어피너티는 주당 1만 8천 원으로 약 6,293억 원을 들여 김준일 전 회장과 특수관계인 김창호 씨의 주식을 인수했다. 김성훈 대표와 공동대표를 역임하던 김준일 전 회장은 대표이사직을 사임했으며, 현재 회사는 김성훈 단독대표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창업주가 떠나고 새로운 시기를 맞은 락앤락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밀폐용기 브랜드이자 생활용품, 주방용품 전문 회사로 자리를 잡고 있다.


최덕수 press@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