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른사람 생각이 머물다 가는 그릇…모든 결과는 공동연구 덕분”

[라이프]by 동아일보

[‘수학 노벨상’ 한국계 첫 수상]

‘필즈상’ 허준이 교수 본보 인터뷰

어렸을땐 큰벽 싸인 먼땅 같았던 수학

필즈상 日히로나카 수업듣고 수학자로

“수학은 자유로움을 학습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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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즈상 받는 허준이 교수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오른쪽)가 5일 오전(현지 시간)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에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고 있다. 헬싱키=AP 뉴시스

《“어렸을 때 수학은 나에게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머나먼 땅과 같았다.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시인이 되는 것을 꿈꿨고, 마침내 수학이 그것을 하는 방법이라는 걸 배웠다.” 5일 필즈상 시상식에서 공개된 영상에서 허준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을 꿈꿨던 청년은 고등학교를 자퇴했고, 검정고시를 거쳐 들어간 대학 물리학과에선 공부가 어려워 방황했지만 뒤늦게 만난 수학에 대한 열정으로 필즈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필즈상 수상자는 수개월 전 수상 사실을 통보받지만 일반에 공개할 수 없고 국제수학연맹(IMU) 허가 없이는 어떤 언론사와도 인터뷰할 수 없다. 이 인터뷰는 IMU의 허가를 받아 지난달 15일 세 시간 동안 진행됐으며 시상식 전날인 4일에도 허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허 교수는 “공부는 어려웠지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움을 학습하는 수학을 연구하는 삶에 집중하고 만족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은 허 교수와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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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이 교수는 대수기하학의 도구를 이용해 조합론의 난제를 풀어 한국계 수학자로는 처음으로 5일 필즈상을 수상했다. 필즈상을 수여하는 국제수학연맹이 수상자 프로필로 촬영한 허 교수의 모습. 국제수학연맹 제공

―과거 인터뷰에서 필즈상을 ‘아주 높은 확률’로 받지 못할 거라고 언급했다. 브레이크스루상 뉴허라이즌, 삼성호암상 과학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수상 소감과 필즈상 수상의 의미가 궁금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의미 있는 상을 받게 돼 기쁘다. 분수에 넘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의 수학적 영웅 이름 아래에 내 이름이 오르게 된다니 낯설고 무게가 많이 느껴진다. 수학을 막 시작할 땐 필즈상을 받아야겠다고 바란 적은 없다. 다만 ‘수학자라는 직업으로 돈을 벌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랐는데 그땐 지나치게 원대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가족들 반응은….


“수상 사실을 시상식 전에 외부에 공개하는 것이 금지다. 그래도 아내한테는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아내가 자고 있어서 깨워서 말해줬다. 그랬더니 아내가 ‘그럴 줄 알았다’고 하고 다시 잤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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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5일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에서 열린 필즈상 시상식에서 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헬싱키=AP 뉴시스

―한국에서의 학창 시절이 궁금하다.


“중학교 때 글쓰기를 좋아하는 단짝 친구를 만나 책 읽기와 시 쓰기에 푹 빠져 있었다.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지내는 대신 자유롭게 글을 쓰면 그럴듯한 작품을 금방 써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그런데 막상 자퇴하고 온종일 자유시간이 생기니 아무것도 안 했다. 학교 끝나는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같이 PC방에 가서 신나게 게임을 했지만 가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수능을 볼 때도 수학 과목이 제일 힘들긴 했다.”


―물리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 시절은 어땠나.


“글을 쓰다 보니 내 능력이 너무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좋아하는 과목인 과학을 더 공부해서 과학기자가 되면 과학 이야기를 글로 쓰며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물리학과가 멋져 보이기도 했다(웃음). 막상 대학에 가니 수업 듣기 힘든 것도 여전했고, 공부도 너무 어려웠다. 목표도 점점 잃고 방황하다 결국 3학년 1학기에 모든 과목에서 D와 F를 받았다. 8개월간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정도로 우울증에 걸렸다. 대학교를 6년이나 다녔다.”


일부 언론들은 허 교수에 대해 어릴 때 ‘수포자(수학포기자)’였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허 교수는 “해명을 해야 하고 정확하게 팩트 체크 하겠다”며 “저는 수학을 아주 잘한 건 아니었지만 중간 정도는 하는 학생이었다. 수포자라니…”라고 말했다.


―수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학부 마지막 학기 때, 서울대 석좌교수로 초빙된 일본의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1970년 필즈상 수상자인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수업을 들으면서 수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중학교 때 히로나카 교수님이 쓴 ‘학문의 즐거움’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교수님의 권유로 서울대 수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미국 유학길도 순탄치 않았다고 들었다.


“처음엔 다 떨어졌다. 그래도 필즈상 수상자(히로나카 교수)의 추천서가 있어 어딘가는 붙겠지 했는데, 합격 이메일이 한 통도 오지 않았다.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추가 합격을 알리는 이메일이 나중에 와 너무 기뻤다. 일리노이대에서 할 솅크 교수를 만나면서 조합론을 처음 배웠고 박사과정 졸업 전인 2012년 석사 전공인 대수기하학의 도구를 이용해 조합론 난제를 해결하는 논문을 내는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미시간대로부터 논문 내용을 발표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강의가 끝난 뒤 자리를 옮겨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수많은 난제를 해결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수학자로서 배우는 게 느려서 모든 연구가 쉽지 않았다. 어떤 내용을 들으면 소화하는 데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한다. 내가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건지, 다들 차근차근 대답해 준다.”


허 교수는 2018년 자신의 논문을 보고 연락해 온 에릭 카츠 미 오하이오주립대 교수 등 2명의 수학자와 함께 ‘로타 추측’을 해결했다. 허 교수는 “내가 발표한 논문을 보고 혼자 연구 결과를 낼 수도 있었는데 함께 연구를 제안해줘 고마웠다”고 했다.


―수학자라면 혼자 열심히 문제를 푸는 모습이 그려진다. 수학자들도 공동 연구를 많이 하나.


“당연하다. 내가 최근에 쓴 논문은 모두 공동 논문이다. 제 모든 연구 결과들은 뛰어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 때로는 제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잠시 머물다 가는 그릇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이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다니며 점차 풍성해지는 것이 신기하다. 마음이 맑은 날에는 제가 거대한 구조의 아주 작은 일부라는 것이 잘 느껴진다. 공동 연구가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고 훨씬 더 깊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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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안 풀리면 어떻게 하나.


“나는 문제가 안 풀리면 포기한다. 일종의 직관인데 ‘내가 이걸 조금 노력하면 몇 달 안에 풀겠다, 아니다’처럼 판단이 필요하다. 잘 포기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문제들은 개인이 이해할 준비가 안 됐거나 인류가 이해할 준비가 안 된 것일 수도 있다. 그걸 붙잡고 있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고 풀어내는 것은 사실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지난주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해법을 상상할 수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생각이 나는 경우가 있다.”


―한국엔 수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다. 수학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수학의 매력은 자유로움이다. 수학엔 논리가 맞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그런데 그 규칙의 엄격함 때문에 다른 면에서 자유롭다. 어떤 대상을 연구할 것인지,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야 하는지 정해진 규칙이 하나도 없다. 수학은 자유로움을 학습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렸을 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훈련을 하면 좋을 것 같다.”

―학창 시절 글쓰기를 좋아했다고 들었다. 수학과 예술이 얼마나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나.


“수학은 글쓰기나 음악 같은 예술의 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언어의 종류가 다를 뿐 모두 표현하기 어려운 대상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같다. 첫째인 일곱 살 아들은 음악에 관심이 많다. 요즘 한국 가요와 미국 팝송에 푹 빠져 있다. 함께 음악에 맞춰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한다.”


―‘수학을 잘한다’는 건 뭘까.


“100m 달리기 기록처럼 정량화할 수 없다. 사람 성격처럼 수학을 하는 스타일도 다양하기 때문에 수학적 재능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 두뇌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각 부분의 뇌세포가 하는 역할이 다르다. 그래서 ‘두뇌의 어느 부분이 더 똑똑하냐’고 묻는 게 무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거의 똑같다. 오후 9시쯤 자녀들과 함께 잠을 잔다. 새벽 3시쯤 일어난다. 그땐 아무 음악도 틀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조깅을 한다. 오전 6시가 되면 오늘 하루를 준비한다. 곧 자녀들이 일어나면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교육기관에 데려다준다. 그런 뒤 오전 9시에 학교에 도착해 연구하는 데 오전 시간을 다 쓴다. 점심 식사를 한 뒤, 낮잠을 한 번 잔다. 그리고 이메일 보내기, 수업 준비 같은 일을 끝낸 뒤에 오후 5시에 퇴근한다. 필즈상을 받은 후에도 이 일상이 많이 바뀌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헬싱키=이채린 동아사이언스 기자 rini113@donga.com

김민수 동아사이언스 기자 reborn@donga.com

2022.07.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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