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뺨치는 푸른 물빛… 동백이는 수줍게 피어
충남 보령에 있는 충청수영성에서 내려다본 오천항의 푸른색 물빛 위에 떠있는 배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주꾸미와 키조개, 갑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오천항은 연간 3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어항으로 유명하다. |
충남 보령에서 원산도를 잇는 해저터널이 2021년에 개통된 이후로 서해안 섬 여행이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2019년 안면도 영목항과 원산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 개통과 함께 서해안 드라이브 여행 코스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서해안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보령∼원산도∼안면도 여행을 떠나보자.
● 지중해처럼 푸른 물빛, 충청수영성
“동백 씨, 거기 있시유?”
몇 년 전 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나온 용식(강하늘)의 충청도 사투리는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동백꽃 필 무렵’의 주요 촬영지는 경북 포항 구룡포 마을이었다. 용식은 분명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데 왜 포항에서 찍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드라마에서 배경으로 나오는 ‘웅포’의 옅은 푸른색 바다는 분명 서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강하늘과 공효진(동백)이 성벽 위 같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붉은 노을에 물든 바다는 충남 서산이나 대천 그 어디쯤인 듯 보였다. 그런데 보령에 갔다가 바로 그 장소를 찾아냈다.
보령 오천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충청수영성이다. 주꾸미 낚시로 유명한 오천항은 백제시대 회이포로 불리며 당나라와의 교역에 교두보 역할을 했다. 조선 세조 12년(1466년)에는 왜적의 침입을 막고, 세곡 수송 안전을 지키기 위해 수영(水營)을 세웠다. 충청수영성은 서해안의 수군사령부로 군선 140여 척에 8400여 명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해군을 통괄하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총지휘했다. 우리나라에는 5개 수군영이 있었는데 전라좌·우수영, 경상좌·우수영, 충청수영이었다. 5개 수군영 중에서 현재 제일 잘 보존돼 있는 곳이 바로 충청수영성이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인 충청수영성의 아치형 성문. 계단 주변을 비롯해 성내 곳곳에 심어진 동백나무 중에는 벌써 꽃을 피운 나무도 있다. |
충청수영성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오르면 돌로 쌓은 성에 아치형 문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성문 주변에는 11월인데도 놀랍게 동백꽃이 피어 있다. 동백꽃은 내륙 지방에서는 2월이 돼야 피어나지만, 제주를 비롯해 남해안 서해안 등 바닷가에서는 좀 더 일찍 핀다고 한다. 심지어 벌써 시들어 통째로 떨어진 동백꽃도 있다.
충청수영성의 가장 높은 곳에는 영보정이 있다.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조선 최고의 절경으로 극찬한 정자다.
영보정에서 내려다본 탁 트인 바다 풍경은 유럽의 지중해 부럽지 않다. 천혜의 방파제 같은 섬들로 둘러싸인 오천항은 터키석 같은 스카이블루빛 바다에 배들이 점점이 떠 있는 모습이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보령에서는 죽도 상화원(尙和園)도 해송숲과 바다가 어우러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죽도는 원래는 육지에서 4.5km 떨어진 섬이었는데, 간척사업으로 방조제가 놓여 육지가 된 섬이다.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나무 덱길이 있어서 비가 와도, 햇빛이 쨍쨍 내리쬐도 걸을 수 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해송숲 회랑길을 걸으며 조각 작품을 감상하고, 숲속의 카페에서 차도 마실 수 있다. 상화원 입장료(7000원)를 내면 이 해송숲 카페에서 커피와 차, 떡을 무료로 제공해준다. 상화원은 겨울철에는 문을 닫았다가, 내년 4월 봄에 다시 개장할 예정이다.
● 해저터널 넘어 원산도로
보령에 왔다면 대천항에서 해저터널을 통과해 원산도를 둘러보고, 내친김에 태안반도 안면도까지 드라이브를 즐겨볼 만하다. 보령해저터널은 대천항에서 원산도까지 6.9km 구간이다. 국내 최장, 세계에서 5번째로 긴 해저터널이다. 그런데 바닷속을 달린다는 기대와 달리 육지와 똑같은 회색빛 터널은 지루함만 안겨주었었다. 그러다 올해 7월부터 보령해저터널 천장에 바닷속 풍경을 담은 미디어 파사드 조명이 설치돼 달리는 내내 시각적 즐거움을 주고 있다. 거대한 고래가 천장에서 헤엄을 치고,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서해의 노을이 펼쳐진다.
원산도의 최고봉은 오로봉(117m)이다.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설치된 곳으로,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정에 알리는 봉화를 올렸던 산이다. 오로봉 정상에 있는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좋지만, 요즘 뜨고 있는 해변 카페에 가보는 것도 원산도 여행의 별미다.
원산도 카페 ‘바이더오’에 설치돼 있는 원형 그네. |
‘바이 더 오(By the O)’는 카페의 삼면이 대형 유리창으로 돼 있어 시원한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카페가 입소문이 나게 된 것은 루프톱에 있는 ‘O’ 모양의 그네다. 안면도 영목항과 원산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1.75km)가 바라보이는 그네를 타고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포인트다. 자세히 보니 나이 든 사람들은 얼굴 정면 사진을 찍는데, MZ세대는 그네를 탄 뒷모습을 찍는 것이 흥미롭다.
● 안면도 영목항 전망대와 바다유리
태안반도의 안면도는 세로로 긴 섬이다. 원산도에서 다리를 건너면 영목항을 만난다. 안면도 최남단에 있는 영목항은 ‘안면도의 땅끝마을’로 불렸던 곳이다. 영목항은 보령과 원산도, 태안반도가 이어지는 충남 서해안 드라이브 여행의 중심 연결고리가 되는 항구다.
올해 6월 개관한 안면도 최남단 영목항 전망대. |
안면도 영목항에는 올해 6월 전망대가 세워졌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높이 솟아 있는 전망대 모습에 이끌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노을 진 바닷가에 물이 빠진 갯벌이 넓게 드러나 있었다. 하늘에 짙게 깔린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빔을 쏘듯 쏟아져 내렸다. 마치 하늘에서 성령이 강림할 것 같은 장엄한 모습이었다.
영목항 전망대는 내년 1월 말까지 개관 기념으로 무료입장이다. 로비 한구석에 바다유리(Sea Glass)를 활용한 공예품 숍이 눈길을 끈다. 바다유리는 연초록빛부터 에메랄드빛, 짙은 초록색, 하늘빛이 나는 유리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든 공예품이다.
유리 조각인데도 끝부분이 날카롭지 않으면서 뭉글뭉글하고, 불투명하면서도 은은한 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유리 공예여야 하지만, 시 글라스는 뭔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마치 터키석이나 호박, 진주처럼 원석의 고상함이 느껴진다고 하면 과장일까.
충남 태안군 고남면 장삼포에 작업실을 갖고 있는 바다유리 공예가 김은수 씨는 “시 글라스는 바닷물 속에서 30년 이상 파도에 휩쓸리면서 표면이 갈리고, 끝이 뭉글뭉글해진 보석”이라며 “태풍이 불고 난 뒤 바닷물이 크게 한 번 뒤집어졌을 때 해변에 가면 많이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바다유리는 바로 30여 년 전 사람들이 마신 소줏병과 사이다병들이었던 것이다. 깨진 병 조각들이 파도와 모래에 쓸려 닳고 닳아서 새로운 보석으로 탄생한 것이다. 아름다운 공예품을 보면서 바다 환경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예술 작품이다.
영목항 전망대 22층에서 내려다본 원산도 앞바다. |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니 22층 전망대까지 직행한다. 전망대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우와!” 하는 감탄사를 내뿜게 된다. 360도 방향으로 섬과 바다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해의 낙조와 섬, 원산안면대교의 위용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배들과 논과 밭 풍경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뉘엿뉘엿 지는 태양의 각도가 달라질 때마다, 바람에 구름이 흩어질 때마다, 반짝이는 윤슬은 먼바다로 갔다가 가까이 다가왔다가 천변만화(千變萬化)한다.
창문에 쓰인 글귀는 여행자의 ‘갬성’을 자극한다. ‘여기에 오길 참 잘했다’ ‘오늘 참 예쁘다. 그대’ ‘사랑하는 우리 가족 행복하자’…. 간절한 소망과 서로를 칭찬하는 문구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안면도 드라이브 여행은 자연휴양림에서 마무리하면 좋다.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쭉쭉 뻗은 안면송 숲의 상쾌한 솔향은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준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