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프랑스가 처음 만나 건배한 ‘샴페인의 섬’ 비금도

[여행]by 동아일보

전남 신안군 비금도

‘날아오르는 새의 섬.’ 전남 신안군 비금도(飛禽島)는 하늘에서 보면 날개를 펼친 큰 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안의 설악산으로 불리는 그림산의 절경과 끝없는 명사십리 해변으로 유명한 비금도가 ‘한국과 프랑스가 처음 만난 섬’ ‘샴페인의 섬’으로 주목받고 있다. 비금도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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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 비금도 그림산에서 바라본 다도해와 염전 풍경.

● 샴페인과 막걸리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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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에서 바라본 비금도. 뒤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가 비금도 그림산이다.

전남 목포 KTX역에서 차를 타고 천사대교를 건너니 암태도 남강선착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차를 싣고 페리호를 타면 50분 만에 비금도에 도착한다. 해변이 4.2km에 이르는 비금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을 차를 타고 달릴 수 있을 만큼 눈과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해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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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면 하트 모양으로 보이는 ‘하누넘 해변’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인증샷을 남기는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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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그림산에서 바라본 다도해 풍경.

비금도를 가로지르는 그림산과 선왕산은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다도해의 섬들이 몽환적으로 떠 있고, 염전 위로 붉은 노을이 진다. 천혜의 자연이 살아 있어 어느 곳을 바라봐도 힐링이 되는 섬이다. 그런가 하면 알파고와 대결했던 세계적인 바둑 명인 이세돌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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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비금도 해변이 더욱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172년 전 이 섬에서 한국과 프랑스의 관리들이 샴페인과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첫 만남을 가졌던 스토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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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그려진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호의 모습.

1851년 4월 2일. 프랑스의 고래잡이선 나르발호가 비금도 모래 해변 바위섬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프랑스 북부 르아브르에서 출항한 나르발호는 고래를 찾아 대서양, 인도양, 남태평양을 넘어 한국까지 와 신안 앞바다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바다에는 서양의 포경선이 수시로 출몰했는데, 1849년에는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동해에서 독도를 발견해 ‘리앙쿠르섬’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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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드 몽티니 주 상하이 프랑스 영사.

해안에 좌초된 나르발호 선원들은 200년 전 하멜이나 처형된 프랑스 신부처럼 감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을 것이란 공포에 떨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로 국내에 비밀리에 입국해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대거 처형당해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던 상황. 그래서 9명의 선원이 소형 배를 타고 탈출해 4월 19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가 구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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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드 몽티니 주 상하이 프랑스 영사.

샤를 드 몽티니 영사(1805~1868)는 다음 날인 4월 20일 곧바로 통역관과 영국 상인, 중국인 선원 등 30명을 태운 배를 이끌고 비금도에 있는 선원들을 찾아나섰다. 몽티니 영사는 제주도 대정 해변에 도착해 “난파된 프랑스 배와 선원들을 봤느냐”고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북상해 신안 앞바다 섬들을 하나하나 뒤지며 찾아다닌 끝에 비금도를 발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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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명사십리해수욕장에 프랑스 샴페인과 한국의 전통 청주가 놓여 있다.

비금도에 도착한 몽티니 영사는 걱정과는 달리 선원들이 주민들로부터 쌀 등 음식을 제공받고, 숙소에서 당국의 보호 아래 잘 지내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고 한다. 비변사등록과 일성록에 따르면 조선의 조정에서는 비금도에 난파한 프랑스 선원들이 중국으로 갈 수 있도록 배 2척을 마련해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몽티니 영사는 5월 2일 비금도를 관할하는 나주목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 정부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프랑스 선원들을 직접 배에 태워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떠나기 하루 전날인 2일. 몽티니 영사와 나주목사는 송별회를 가졌다. 몽티니 영사는 배에서 샴페인과 와인 수십 병을 꺼내 왔고, 조선인들은 도자기와 항아리에 담긴 전통술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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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실에서 조선의 관료들에게 내일 출발에 필요한 식량을 요청하고 나서, 다시 갑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우리 배의 50여 명의 선원이 다양한 음식이 차려진 작은 테이블(‘소반’을 칭하는 듯)을 각자 앞에 두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수많은 한국인들이 항아리 단지와 잔을 들고 다니면서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함께 마셨습니다.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식사(pittoresque repas)였습니다.” (몽티니 영사의 보고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다양한 종류의 샴페인과 와인, 독주를 함께 마셨습니다. 나는 한국인들처럼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샴페인과 와인, 특히 도수가 높은 술을 열정적으로 마셨습니다. 조선의 관료들은 자신들이 마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인들에게도 마시고 샴페인 병을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몽티이 영사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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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일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기 박물관에서 열린 ‘역사 속의 한국과 프랑스, 그 첫 만찬(Premiere Recontre, Premier Verre) 행사에서 선보인 몽티니 영사가 비금도에서 받았던 술병.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당시 몽티니 영사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보낸 보고서에 비금도에서의 송별연 장면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조선인들이 따라 주었다는 항아리 단지에 담긴 술은 막걸리로 보이며, 독주도 마셨다는 말로 보아 소주도 제공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한국 사람이 처음 샴페인을, 프랑스 사람이 처음 우리 막걸리와 소주를 마신 공식 기록이다. 몽티니 영사는 보고서에서 비금도를 ‘날아오르는 새의 섬(l’île de l’Oiseau Volant)’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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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일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기 박물관에서 열린 ‘역사 속의 한국과 프랑스, 그 첫 만찬(Premiere Recontre, Premier Verre) 행사에서 선보인 몽티니 영사가 비금도에서 받았던 술병.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지난달 2일 프랑스 파리 교외에 있는 세브르 국립도자기박물관에서는 ‘샴페인과 막걸리의 첫 만남’이라는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옹기로 만든 갈색 주병(酒甁)이었다. 1851년 비금도에서 몽티니 영사가 선물로 받아 본국에 가져갔던 바로 그 술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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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사건을 연구했던 피에르 에마뉘엘 루 교수(파리7대학)는 “초기에 비밀리에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이나 개인적으로 표류했던 선원도 있지만, 몽티니 영사는 프랑스 정부의 외교관으로서 처음으로 조선의 관료와 첫 공식 만남을 가진 사람”이라며 “비금도는 한-프랑스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장소”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프랑스의 첫 만남을 선교사 박해나 병인양요(1866년)로만 기억하는데, 비금도 사건은 난파된 선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양국 관료들이 힘을 합한 인도주의적 만남이었고, 술과 음식을 나눈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며 “비금도가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화합의 장소로 잘 기려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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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하누넘 해변.

● 세계적인 거장들이 몰려오는 예술섬

신안군의 비금도, 도초도, 노대도, 안좌도 등엔 제임스 터렐, 올라푸르 엘리아손, 앤터니 곰리 등 세계적인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이 들어서는 ‘예술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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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터렐의 작품이 들어올 예정인 신안 노대도.

박우량 신안군수는 “예술섬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비금도를 한-프랑스 간의 역사적인 첫 만남을 기리는 기념관, 샴페인과 막걸리를 즐길 수 있는 해변 공원 등 한국과 프랑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섬으로 가꿔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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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비금도 명사십리 주변 바닷가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설치 미술가 곰리의 작품이 들어선다. 곰리는 영국 북동부의 작은 탄광 도시였던 게이츠헤드에 220t의 철근을 사용해 ‘북방의 천사’(높이 20m)라는 거대 철제 조각상을 세웠다. 덕분에 한때 탄광촌이었던 이 작은 도시는 세계적인 예술 도시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명사십리 해변에 세워지는 곰리의 작품은 신안의 명물인 소금 결정체처럼 정육면체 모양의 철근이 모여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포스코가 40억 원어치의 철근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곰리의 작품은 밀물 때는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가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보기 드문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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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이세돌바둑기념관.

미국의 설치미술가 터렐은 노대도에 화성과 목성의 소리를 채집해서 색상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수국축제’로 유명한 도초도에는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 설치미술가 엘리아손의 작품이 들어선다. 내년 말까지 연꽃을 닮은 지형의 중심에 수국을 형상화한 엘리아손의 미술관이 들어서고, 주변은 계절마다 다양한 빛깔의 경관농업으로 ‘대지의 미술관’을 형성하게 된다. 안좌도엔 일본의 야나기 유키노리가 설계한 물에 떠 있는 ‘플로팅 뮤지엄’이 들어선다.

● 에마뉘엘 루 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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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에마뉘엘 루 파리 7대학 교수. 피에르 에마뉘엘 루 교수 제공

비금도에서의 한불간의 첫 만남을 연구한 교수는 피에르 에마뉘엘 루 파리7대학 교수다. 그는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에서 샤를르 드 몽타니 영사의 보고서를 찾아내고, 몽타니 영사가 조선에서 가져온 도자기 술병도 확인했다. 그는 2012년에 펴낸 ‘십자가, 고래, 대포(La Croix, La Baleine, Et Le Canon)’라는 책에서 19세기 중엽 한불관계 초기 프랑스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다음은 에마뉘엘 루 교수와의 전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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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에마뉘엘 루 교수가 2012년에 펴낸 ‘십자가, 고래, 대포(La Croix, La Baleine, Et Le Canon)’. 19세기 중엽 한불관계 초기 프랑스의 대조선 정책 연구를 담았다.

― 신안 비금도 사건을 연구하시게 된 계기는.

“제가 2005년 프랑스 파리 이날코대학 한국학과 석사과정을 다닐 때 초기 한불 관계와 외교수립 과정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지도교수는 ‘병인양요’를 중심으로 연구해보라고 조언해줬다. 그런데 교수님이 한불수교가 병인양요만으로 이뤄졌다고는 볼 수 없다. 그 전후로 뭔가 여러가지 한불간의 접촉이 있지 않았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1840~50년대 한국 관련 문헌을 다 뒤져봐야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 해무부 고문서관, 파리 외방전교회에 수없이 찾아가 자료를 찾아봤다. 흥미롭게도 제가 파리 외무부 고문서관에서 가장 먼저 요청한 자료가 바로 비금도 관련 자료였다.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에서 19세기 중엽 조선 관련 자료는 주로 중국 문서철이나 일본 문서철에 포함돼 있다. 프랑스 영사나 외교관들이 중국, 일본에 주재해 있었고 조선에는 주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50년대 중국 상하이 영사관 자료를 뒤지는데, 가장 먼저 비금도에 난파했던 ‘나르발(Narval)호’ 사건 관련 문건이 나왔다. 행운이었다.”

―그전에도 비금도에 프랑스 배가 난파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나?

“전혀 몰랐다. 상하이 영사관 문서를 보다가 처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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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일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기 박물관에서 열린 ‘역사 속의 한국과 프랑스, 그 첫 만찬(Premiere Recontre, Premier Verre) 행사에서 선보인 몽티니 영사가 비금도에서 받았던 술병.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나주 목사가 선물했던 도자기 술병이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기박물관에 있었다는 건 알았나?

“그 때는 몰랐다. 2012년도에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대조선 정책 연구를 주제로한 석사논문을 개편해서 프랑스에서 ‘십자가, 고래, 대포(La Croix, La Baleine, Et Le Canon)’라는 책을 펴냈다. 책을 낼 때만해도 도자기의 존재를 몰랐다. 그런데 2015년 프랑스 세브르국립도자기 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관련 전시회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당시 19~20세기 한국 도자기와 물품이 전시됐었다. 몽티니 영사는 1856년 잠깐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당시 본국에 전달했던 물품 중에 비금도에서 가져온 술병이 포함돼 있었다. 이 도자기는 창고에 수장돼 있었는데, 이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옹기병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는데, 저만 그 앞에서 10분 이상 바라보았다. 이 병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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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티니 영사가 비금도에 가게 된 과정은.

“1851년 4월2일 29명이 탄 나르발호가 비금도에 난파됐다. 프랑스 선원 29명은은 조선정부가 외국인(프랑스인)을 체포하거나, 처형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9명의 선원들이 작은 고래잡이용 배를 타고 다시 황해를 건너 상하이로 가서, 프랑스 영사관에 구조요청을 했다. 선원들은 몽티니 영사에게 ‘포경선 나르발호가 조선 땅에서 난파했는데, 우리 20명의 선원들이 아직 남아 있다. 구해달라’고 말했다.


몽티니 영사는 바로 다음날 배를 구해 영사관 통역관 1명, 영국 상인 1명, 포경 선원의 친척 1명, 나르발호 선원 5명, 중국인 20여 명 등 총 30명 정도를 태우고 비금도로 향했다. 배는 ‘록샤(Lorcha)’라고 불리던 중국과 서양 스타일이 혼합된 배였다.


그런데 문제는 몽티니 영사를 비롯한 프랑스 사람들은 비금도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난파된 배에서 돌아온 9명의 선원들이 비금도를 ‘티오상(Tio-sang)’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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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o-sang’이란.

“19세기 한국어의 발음을 생각하면 조선을 ‘됴선’이라고 표기한다. 그래서 ‘됴선’을 들리는 대로 ‘티오상(Tio-sang)’이라고 한 것이다. 포경선 선원들이 비금도에 난파한 직후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비금도 사람들이 ‘조선이다. 조선 땅이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상하이에서 출발한 몽티니 영사는 처음에 제주도 서남쪽 대정해안에 도착했다. 이 곳은 200년 전에 ‘하멜표류기’를 쓴 네덜란드 상인 하멜이 표류했던 지점과 거의 비슷하다. 중국 상해에서 배를 타고 가면 해류와 바람 때문에 항상 제주도에 먼저 도착한다고 한다. 몽티니 영사는 제주도에서 ‘티오상이 어딘 줄 안냐? 난파한 프랑스 배를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사람들은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서 몽티니는 다시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고 며칠 있다가 전라도 신안의 다도해에 도착했다. 몽티니는 신안의 섬 하나하나를 뒤지면서 난파된 선원들을 봤느냐고 수소문했고, 마침내 비금도에서 선원들을 발견했다. 상해에서 출발한지 거의 2주일 만이었다. 비금도가 큰 섬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현지 주민들과 관료들이 찾아와 구경하게 되고, 만나게 됐다. 몽티니 영사는 5월1일에 비금도에 도착하고, 5월 3일에 상해로 돌아갔다. 사실은 사흘도 안되는 짧은 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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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티니는 한국인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나.

“몽티니는 통역관을 데리고 갔지만, 그들은 중국어만 할 줄 알았지 한국어를 몰랐다. 대화를 할 때는 주로 그림이나 필담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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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어떻게 기록돼 있나.

“몽티니 영사 보고서는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것이다. ‘4월 중순에 포경선 선원이 상해에 도착했고, 제가 아주 용감하게 조선땅에 가서 선원들을 구조해왔다’는 내용이다. 관련 한국측 자료도 있다. 나주목사가 한양으로 보낸 장계 같은 것이다. 한국측 자료를 보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뭐하러 왔는지도 몰랐고, 그냥 이국인(異國人)이라고 표현한다. 고래잡이 어선이라는 점도 잘 몰랐다. 다만 조선은 난파한 이국인들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계속 이야기하니까, 이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배 2척이 필요하다는 장계를 조정으로 올렸다. 한양의 조선 조정에서는 비변사 회의를 열어 ‘이국인들에게 배를 마련해서 돌려보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조정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날에 몽티니가 비금도에 도착했다. 그래서 조선에서 배를 마련하기 전에 몽티니가 타고 온 배를 타고 29명의 선원들이 다시 상해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1851년에 영국 잡지에서도 비금도 사건 관련 기사가 실렸다.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된 ‘더 노스 차이나 헤럴드(The North-China Herald)’라는 영문 잡지가 있었다. 몽티니 영사랑 배를 타고 비금도에 같이 간 영국 상인이 아주 길게 연재한 글이다. 비금도 사건 관련 기록은 프랑스 외교문서, 영국 잡지 기사, 조선의 공식문서로 남아 있다.”

―양국이 샴페인과 막걸리를 마시고 만찬하게 된 과정은?

“몽티니 영사와 나주 목사는 5월 2일에 만나서 선원들과 관료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가 조선인들에게 샴페인을 주었고, 조선인들도 술을 가져왔다고 한다. 지난 5월2일 프랑스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샴페인과 막걸리의 만남’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몽티니 보고서를 보면 ‘샴페인과 와인, 리큐어(Liqueurs Fortes)’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한 선원 50여명이 각자 음식이 차려진 작은 테이블(소반) 앞에 앉았고, 그 사이로 수많은 한국인들이 항아리에 든 술을 잔에 따라주며 마셨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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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노대도 해안.

―술은 몇 병이나 마셨나.

“19세기 다른 서양인들이 쓴 조선 관련 보고서를 보면 ‘조선인들은 고래처럼 술을 마신다’라는 기록이 있다. 술고래다. 아마도 비금도에서도 술을 많이 마셨을 것이다. 몽티니 영사는 보고서에서 ‘il est rare de voir des hommes boire comme les Coréens’(한국인들처럼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은 볼 수 없다). ils sont passionnés pour les vins et surtout les spiritueux(한국인들은 와인과 독주에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 조선의 상관(관료)들은 자기들이 술을 마실 뿐 아니라, 하인들에게도 술을 주고 가져가도록 했다‘고 썼다. 그날 몇시간 동안 그림같은(pittoresque) 만찬을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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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고 난 뒤 분위기는 어땠나.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의 다른 기록을 보면 ‘조선인들은 처음엔 우리랑 얘기를 안하려고 했는데, 술을 가져다 주니까 서로 말이 통하며 일이 잘 풀렸다’는 기록이 있다. 비금도에서 현지 관료들은 몽티니가 조선과 통상 요구를 하거나 선교를 하러 온 게 아니고,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아마 더 쉽게 대화하게 됐다. 그래서 몽티니가 5월1일 비금도에 도착하고, 다음날인 2일 저녁에 술을 마시게 됐다. 이게 마지막 만찬이었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화려한 송별파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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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천주교 박해로 프랑스 신부들을 죽이기도 했는데 왜 그냥 순순히 추방하고 중국으로 다시 돌려보냈나.

“사실 19세기 서양인들은 조선 앞바다에서 난파하게 되면, 200여 년전 ‘하멜표류기’의 주인공인 하멜처럼 감옥에 갇히고, 유배생활을 하거나, 선교사들처럼 처형당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몽티니도 그런 선입견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빨리 한국에 가서 조선에 난파한 우리 선원들을 구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조선 왕조 이전, 아마 고려시대 이전부터도 조선(중국, 일본, 동남아)엔 ‘표류민 송환 제도’가 있었다. 외국 표류민이 발견되면 잘 대접해서 보호한 뒤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도다. 조선 후기에도 해마다 신안 앞바다에는 중국이나 일본, 서양에서 온 배가 난파하거나 표류하는 사람이 많았고, 대부분 표류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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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흑산도 홍어.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다. 1840~50년대에는 조선 앞바다에는 나르발호 뿐만 아니라 수백척의 서양 고래잡이 포경선이 활동했다. 당시 가끔 포경선이 조선의 앞바다에 난파하거나 표류하면, 정부에서 그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으로 나온다. 당시 서양의 상선이 표류할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약 서양인이 통상이나 선교를 하러 왔다고 말하면 당연히 쉽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서양인들은 두가지로 불렸다. 먼저 통상이나 선교를 하러 온 서양인을 ‘양적, 양추’라고 부른다. 서양 오랑캐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은 입항을 거절한다. 


그러나 포경선원이라든가 표류하는 서양인들은 그냥 ‘이양선(異樣船)을 타고 온 이국인(異國人)’이라고 불렀다. 이국인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말이 아니고 중성적인 표현이다. 잘 대접해주고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몽티니는 천주교 선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나주 목사나 현지 관리에게 천주교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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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도에서 바라본 거북바위.

―당시 조선 앞바다에 서양의 포경선은 얼마나 많이 왔었나.

“19세기 포경업은 미국인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에 유럽의 프랑스, 독일인이었다. 18세기~19세기 초까지는 주로 대서양에서 고래잡이를 했다. 그런데 고래가 줄어들자 인도양으로 옮겼고, 1840년대까지 뉴질랜드 부근 남태평양에서 고래를 잡았다. 이후 북태평양쪽으로 올라가게 된다. 1840~50년대에는 한국 동해와 일본 동쪽의 태평양, 오오츠크해에서 고래를 많이 잡았다. 한국의 서해 흑산도 인근에서도 고래를 잡았다. 1840년대와 50년대에는 나르발호 뿐 아니라 다른 서양의 포경선들도 한국과 일본 앞바다에서 표류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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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도초도 팽나무숲길.

―나발호는 어떤 배였나.

“당시 프랑스 포경선들은 전부 프랑스 북부 항구인 르아브르에서 출항했다. 당시 한번 고래잡이 출항을 하면 3년 간 전세계를 돌도 귀항하곤 했다. 대서양을 지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인도양에서 중국, 한국, 일본, 오오츠크해를 지나 태평양 건너 하와이, 남미 칠레를 지난 뒤 다시 대서양을 건너서 르아브르로 돌아왔다. 1849년에 독도를 발견해 ‘리앙쿠르섬’이라고 이름붙인 리앙쿠르호도 프랑스 포경선이다. 리앙쿠르호는 1847년에 르아브르에서 출항해 3년 여 동안 세계를 돈 뒤 1850년에 다시 르아브르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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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발호가 비금도에 난파했던 정확한 장소는 어디인가.

“비금도 서해안 쪽이다. 비변사등록,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등 한국 측 자료를 보면 비금도 서면 율내촌이라고 나온다. 조선시대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찾아보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비금도에 가서 현지 주민들과 이야기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비금도에서의 첫 만남이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프랑스와 조선이 수교를 맺기도 전, 프랑스 외교관이 조선 땅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방문했던 사건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전에도 조선땅에 들어간 프랑스인은 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비밀리에 입국했었고, 프랑스 해군장교도 조선 앞바다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프랑스 외교관으로서는 몽티니 영사가 처음이다. 특히 몽티니 영사는 마지막 날에 지역을 관할하는 나주 목사를 만남으로써 공식적으로 양국의 관료가 만나게 됐다.


한국과 프랑스의 첫 만남이라고 생각할 때는 주로 선교사 박해, 아니면 병인양요같은 전쟁을 생각한다. 그래서 한불 관계의 첫만남은 갈등으로 시작됐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사실은 비금도 포경선의 표류사건을 통해서 한불관계 시작은 갈등보다는 인도주의적인 만남이었고, 음식과 술이 있는 문화교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비금도 사건이 전쟁이나 박해같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화합의 자리로 끝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동아일보

신안 바닷가에 핀 갯메꽃

―이후 몽타니 영사의 행보는.

“몽티니 영사는 1851년 이후로 당시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와 외무장관에게 해마다 프랑스와 조선이 수교를 맺어야 한다고 보고서를 보냈다. 프랑스 포경선원과 선교사들의 안전과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을 개항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몽티니 영사의 조선과의 수교협상 요구를 계속 무시했다. 당시 나폴레옹 3세나 외무부 장관에게 한반도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된 관심사는 중국, 일본이었고, 1850년대 말에는 주로 베트남의 개항에 관심이 더 컸다.”


신안=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2023.06.2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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