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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정년퇴직 다음날 새 직장 출근, 어느 빌딩 관리소장의 ‘가늘고 긴’ 평생취업기

by동아일보

지식산업센터 관리소장 최경묵 씨

만년 ‘차장’에서 ‘소장’으로

나이 60세 현실적 재취업,

정년퇴직 10년 전부터 준비

“새 직장생활 너무 행복”

퇴직하면 모두 똑같아지더라

과거 내려놔야 미래 시작돼

1961년생 최경묵 씨는 2021년 12월 31일 정년퇴직하고 이듬해 1월 3일 새 직장에 출근했다. 연면적 5만 평 규모 빌딩의 관리소장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요일까지 전 직장에서 근무하고, 신정을 낀 주말 쉬고 월요일부터 출근했어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최 씨)


단순히 운으로만 돌리기엔 설명이 부족하다. 50대 초반부터 그가 노심초사하며 쌓아온 준비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게 막막하게 느껴지는 퇴직 후 삶. 그는 어떻게 막간도 없이 인생2막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까. 그건 또 어떤 느낌일까.


그를 만나러 17일 서울 송파구 문정현대지식산업센터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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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산업센터 지하에는 빌딩 전체의 냉난방과 급탕, 전기 등을 관장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설비실이 있다. 현장 점검 중인 최경묵 관리소장.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무조건 생존하라, ‘가늘고 길게’


지하 2층에 자리한 관리사무소 소장실. 그는 이곳에서 아침저녁으로 회의를 하고 소속 직원 50여 명의 중간보고를 받는다. 평일 상주인구 1만1000명이 넘는 건물의 냉난방과 급탕, 소방 안전관리가 그의 책임하에 돌아간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비자발적 퇴직 평균연령은 49.5세. 법정 정년인 60세를 채우는 것은 천운이라고들 한다. 반면 한국인이 일을 손에서 놓는 시기는 72세까지 늦춰진다. 충분하지 않은 노후준비 탓이다.


―퇴직과 동시에 재취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요.


“틈틈이 따놓은 자격증 덕분이죠. 재직 중에 자격증을 활용해 경력까지 쌓아 놓았어요.”


그가 가진 자격증은 안전, 소방, 위험물 관련의 3가지. 용의주도하게 퇴직을 준비한 배경에는 남들보다 일찌감치 ‘철이 든’ 과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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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소장 사무실은 회의공간과 사무공간을 합쳐 20평은 돼 보였다. 데스크에서 서류 작업 중인 최경묵 소장.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이직 5년 만에 부도가 나버린 회사


행정학을 전공한 그는 대형 건설사 인사팀에서 6년 반 정도 일한 뒤 당시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는 한신공영으로 소속을 옮겼다. 하지만 회사는 그가 이직한 5년 뒤인 1997년 부도가 났고 우여곡절 끝에 중견 유통기업에 흡수돼 버렸다.


“고용승계 조건으로 회사가 정리됐으니 우선은 버틸 수 있었지만, 동료의 절반 이상은 회사를 나갔습니다. 회사는 수시로 구조조정을 했고 눈치를 줬습니다. 피합병회사의 직원으로서 갑자기 한직으로 발령이 나거나 진급이 안 되거나, 여러모로 한계가 느껴졌죠.”


그의 직급은 1992년 이직할 때 과장이었는데, 정년 1년 전까지 ‘차장’에 머물렀다.

어제까지 그의 업무지시를 받던 부하 직원이 상사로 오는 일은 다반사. 40대 후반쯤 되니 ‘나이가 많다’는 눈치가 더해졌다.


“그런 모멸감을 이겨내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호기롭게 나간 사람들이 예외 없이 후회하는 모습을 봤거든요. 이구동성으로 ‘힘들어도 참고 다니라’고 하더군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정년퇴직하는 게 최고의 노후 대책’이라고 충고하는 분도 있었죠.”


최 씨는 전형적인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1955년~1963년생). 자존심 세우고 목소리 크지만 컴퓨터 앞에서는 ‘독수리타법’이나 구사하는 ‘꼰대’ 동년배들과 선을 긋고 ‘가늘고 길게’ 생존하는 길을 택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령에 묵묵히 따랐고 지방 발령을 받자 더 열심히 일했다. 새벽에 컴퓨터학원에 다니며 파워포인트 포토샵 동영상 제작을 배워 20대 청년보다 빠른 정보화 능력을 탑재했다. 회사에서도 중요한 보고서 작성 때마다 그를 찾게 됐다. 승진은 못 했어도 밥값은 하며 살았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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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직장 근무 시절의 최경묵 씨. 중견 유통업체에서 건물과 용역관리 일을 맡았다. 최경묵 씨 제공

●만년 차장의 설움, “자격증이 날 지켜줄 것”


전 직장에서의 마지막 직책은 경영지원부장. 주로 건물과 용역관리 일을 하면서 관련 자격증이 있다는 데 눈을 떴다.


―회사 일하면서 자격증 도전, 할 만한가요.


“본격 공부는 3년 정도 했는데, 회사일 정상적으로 하면서 시험공부 하는 건 정말 힘듭니다. 기술 자격증은 대체로 공대 출신에 유리하고 문과 출신에게는 용어부터 생소해요. 책만 보면 졸리고, 봐도 봐도 잊어버리고…. ”


3차까지 있는 시험에서 수차례 실패했지만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실력이 쌓였다.


“근무시간에는 회사 일을 열심히 하되 밤시간과 주말 등 자기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는 퇴근 후 바로 도서관에 가서 평균 2시간 정도는 공부했고, 시험 임박해서는 밤 12시에 집에 와서 씻고 한두 시간 더 하곤 했습니다. 이런 때는 하루 서너 시간 자고 공부했던 거 같아요.”


●자격증+경력 있으면 좋은 기회 늘어


다만 자격증이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즉시 현장에 투입되려면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제 경우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딴 뒤 퇴직할 때까지 3년 정도 면허를 걸고 경력을 쌓았어요.”


―무슨 말씀인가요.


“구청이나 소방서, 산업안전공단 등 공식 기관에 자격증 면허 신고를 하고 실제 활동을 해야 경력이 됩니다. 사전에 회사에 문의를 했어요. ‘자격증을 따면 면허를 걸 테니까 해도 되겠느냐’고. 인사 담당자는 ‘자격증만 따시라, 그 뒤에 얘기하자’고. 아마 수당도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


그는 자격증을 딴 뒤 회사를 통해 구청에 ‘총괄재난관리자’로 신고하고 3년간 일했다.


―다른 퇴직 예정자도 따라 할 수 있는 걸까요.


“자격증을 딴 뒤 회사와 잘 협의해 공식 기관에 회사의 ‘총괄재난관리자’로 신고할 수 있으면 근무 기간이 경력으로 인정되죠. 그러면 퇴직과 동시에 취업으로 연결될 수 있어요.


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전기 안전 소방 등의 ‘기사’ 자격증을 가지면 취직이 수월해져요. 예컨대 소방 관련 자격증을 따면 아파트 같은 데서 근무할 수 있습니다. 기사로 근무하다가 경험이 쌓이고 능력이 되면 관리소장에 도전해 볼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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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이 힘들 때 그에게 가장 힘이 되어준 것은 마라톤이었다. 40대 후반에는 연간 3500km를 달린 해도 있을 정도다. 최경묵 씨 제공

●“퇴직하면 모두 똑같아지더라”


물론 누구에게나 미래는 알 수 없고 불안하다. 그 또한 다르지 않았다.


“퇴직 1년 남기고는 ‘뭐 하고 사나’ 걱정의 연속이었지요. 자격증을 준비는 했지만 이게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디서건 청소부라도 하겠다고 작심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퇴직 6개월 전부터 인터넷으로 직장을 알아보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냈더니 한 곳에서 ‘당장 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퇴직일로 정해진 12월 31일까지 마무리는 해주고 나가는 게 도리인 것 같다고 그쪽 회사에 사정했어요. 그런데 그쪽은 당장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못 갔어요. 그 뒤 연결된 지금 직장은 기다려줄 수 있다고 해서 이곳으로 결정했지요.”


관리소장으로서 연봉은 5000만 원 수준. 4대보험, 주 5일 근무가 보장된다.


“이 정도 큰 빌딩을 관리하다 보니 나름 책임감도 크고 자부심도 느낍니다. 여기서 일하는 게 행복합니다. 보통 퇴직자들이 제2의 직장을 잡아도 2년 이상 다니기 힘들고 경력을 살리기도 힘들죠. 저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아내가 그러더군요. 요즘은 퇴근할 때 표정이 편안해서 너무 좋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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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수락산 정상에서. 최 씨는 회사 일로 고민이 한창일 때 야간산행에서 만난 동년배들과 소통하며 힘을 얻기도 했다고. 최경묵 씨 제공

●“나는 ‘최부장’ 아닌 ‘최씨 아저씨’”


―퇴직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과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정년퇴직하고 밖에 나오면 다 똑같아져요. 직책이 어땠건, 학력이 높건 낮건, 재취업을 하면 급여는 대개 200만 원대 초반이에요. 지금 여기서 일하는 기사님들 중에도 서울대 출신, 은행 지점장 출신, 공무원 출신이 있어요.


50대 초반쯤 구조조정 당해서 산전수전 겪고 자격증 딴 케이스가 많아요. 제가 볼 때 ‘깨인’ 분들이죠. 이렇게 깨인 분이라야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일할 수 있어요.”


―어차피 퇴직하면 누구나 힘이 빠지지 않습니까.


“전화 통화 목소리나 태도에서 보면 옛날을 내려놓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높은 지위였을수록 그렇겠지요. 퇴직하면 모두 똑같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본인만 괴롭죠.”


이런 그는 옛 직원들이 그를 ‘최 부장님’이라 부르면 “그냥 ‘최씨 아저씨’라 부르라”고 한다고. 반대로 진급이 빨라 한때 상사가 됐던 친구가 퇴직 후에도 상사 마인드로 자신을 대하는 걸 느낀 순간, 그 친구를 손절해버렸다고 한다.


●남은 꿈은 기술사 도전


그에게는 아직 꿈이 남아 있다.


“기술사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여러 번 떨어졌습니다. 소방설비기술사 같은 자격증은 최하 연봉 8000만 원 이상이고 건강만 받쳐준다면 80세까지는 일할 수 있어요. 문제는 시험이 어렵다는 거죠. 제대로 준비하려면 전업으로 한 2년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다른 한편으로는 더 늦기 전에 좀 놀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다리 성할 때 집사람과 여행도 좀 다니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전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기술사는 응시 자격 자체가 까다롭다. 기사 자격증을 딴 뒤에도 다시 오랜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 가서 면접과 심사를 거쳐 응시 자격을 인정받았다. 전 직장에 자격증을 걸었던 3년은 물론, 그곳에서 20여년간 건물 시설 관리 업무를 한 이력이 도움이 됐다.


-혹시 ‘일 중독’이란 생각은 안 드시는지요.


“그냥 그렇게 됐어요. 지난 추석 때 6일 연휴가 있었잖아요. 제 평생 가장 길게 쉰 것 같아요. 전 직장에서는 여름휴가 일주일 받아도 2, 3일 쉬고 회사에 나갔어요. 시설관리라는 일 자체가 마음 놓고 쉬기 어려운 데다가 위에서도 은근히 눈치를 주곤 했지요.”


● “이 나이 되면 공부보다 운동이 중요”


―언제까지 일할 생각이세요.


“지금 직장은 제가 그만둘 때까지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65세까지 바라보고 있고, 그 후에는 상황을 봐야죠. 다만 모든 건 건강을 전제로 합니다. 이 나이에는 공부보다 체력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사람을 많이 고용하다 보니 딱 보면 알아요. 그분의 건강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행동이나 말, 걸음걸이가 어눌해지면 일하기 어렵죠. 이건 제게도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요즘 운동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어요.”


40, 50대 때 열중했던 마라톤 대신 요즘은 근력운동과 걷기를 열심히 한다.


“얼마 전 동창 모임이 있어 고향에 갔는데 열두어 명 중 현역은 저 혼자였어요. 친구들이 ‘도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됐길래 지금까지 일을 하느냐’며 놀리더군요. 친구들이 저를 칭찬해주고 부러워하는 걸 보니까 내가 잘하고 있구나 싶고, 친구들에게 밥이라도 한 번 더 사게 되니 ‘이게 행복이구나’ 싶기도 합니다.”


1막에서 마음껏 꽃피우지 못한 아쉬움은 다 풀린 걸까. 부단한 준비로 화려한 2막을 시작하며 웃는 그를 보며 보통 사람의 성공담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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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관리하는 건물은 15층짜리 건물 3개동이 지하로 연결돼 있다. ‘외부인 통제구역’에서 빼곡히 들어찬 설비들을 점검하는 최경묵 관리소장.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