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대기업 임원 ‘잘린’ 50대, 지금은… [서영아의 100세 카페]
대기업 임원이던 그가 퇴직 후 작가, 강연자로 인생을 새롭게 개척했다. 퇴직 5년 차, 그는 어떻게 스스로 빛나는 삶을 만들었을까?
작가 겸 강사 겸 유튜버 정선용 씨
회사 후광으로 빛났던 40대 접고
스스로 빛나는 반딧불의 삶 지향
습관과 몰입으로 시간의 주도권 쥐고
내면의 성장 통한 단단함 추구
2020년 9월 마지막 금요일, 정선용 씨(57)는 25년간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 갑작스런 퇴직 통보를 받았다. 당시 52세. 너무 빨리 임원 승진을 했던 탓일까. 주말을 이용해 종이상자 3개 분량의 짐을 챙겨 나온 뒤 다시는 그 건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곧바로 추석이었지만 연휴가 끝나면 갈 곳이 없어져 버린 현실에 당혹했다.
![]() 정선용 씨의 명함에는 이제 ‘작가’라는 직함이 어색하지 않게 붙어 있다. 정 씨는 매년 한 권씩 책을 내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착실히 지켜 왔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
명함이 없어진다는 것
‘삶도 직장도 시한부인데, 왜 언제까지라도 이어질 거라고 착각했을까.’ 추석을 보내며 자신이 처한 곤궁한 처지의 근원은 경제구조에 있다고 봤다. ‘하루 한 편씩 경제에 관한 글을 쓰자.’ 다음날부터 경제와 인생에 대한 통찰을 매일 자신의 블로그(정스토리)에 풀어냈다.
이를 네이버 카페 ‘부동산스터디’에 시리즈로 올리자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리는 등 반향이 컸다. 20편쯤 올렸을 때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2021년 3월 펴낸 첫 책 ‘아들아 돈 공부해야 한다’(RHK코리아)는 지금까지 12만 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갑자기 막을 내린 인생 1막의 상처를 부여안은 채 작가이자 유튜버로서 새 인생을 꿈꿨다.
여기까지가 2021년 12월 100세 카페에 소개된 정 씨의 모습이다.
최근 그가 새 책을 낸다며 연락을 해 왔다. ‘언제까지 흐르는대로 살 것인가’(테라코타)라는 제목에 ‘마흔부터 인생의 밀도를 높이는 6가지 방법’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그로서는 다섯 번째 책이다. 사실 그간에도 새 책이 나올 때마다 보내 주며 건재를 알려 왔었다.
퇴직 후 만 4년 반, 100세 카페 지면에 나간 지도 3년 여가 지났다. 퇴직의 충격을 솔직히 표현하고 거기서 헤어나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그의 요즘 삶은 어떨까. 14일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나 봤다.
작가- 강사- 유튜버로 두번째 인생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책 쓰고 유튜브 만들고 강연도 다닙니다. ‘작가’라는 타이틀에 익숙해진 편이예요. 책은 1년에 한 권씩은 꼭 쓰겠다던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의 일상은 오전 5시에 시작한다. 집 근처 뒷산까지 운동 겸 산책을 2시간 정도 한 뒤 귀가해 영어회화 공부, 필사 및 낭독, 독서, 글쓰기 순으로 습관화된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간다. 이 일과를 오전 중에는 마무리한다.
“주로 김훈 작가의 글을 (베껴) 쓰고, 읽고 있습니다. 필사를 할수록 책의 깊이가 더 이해가 되요. 필사와 낭독은 글을 제 안에 내재화하는 큰 힘이 되는 듯합니다.”
![]()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15분)’ 강연장에서 다른 강연자들과 함께 무대에 선 정선용 씨(왼쪽에서 두 번째). 그는 ‘내 삶의 성장을 점검하는 법’에 대해 강연했다. 정선용 씨 제공 |
―유튜브나 강연 쪽은 어떤지요.
“유튜브는 제가 직접 만드는 것보다 다른 사람 채널에 패널로 참여하는 정도가 적절한 것 같아요. 강연은 사람들 눈을 보면서 소통하니까 즐겁습니다. 기업체나 지방자치단체 도서관 등에서 요청이 오는데, 강연료와 무관하게 불러 주는 곳은 다 갑니다.
지금까지는 ‘월급쟁이들의 재테크’나 ‘4050 세대가 경제적 안정을 위해 해야 할 일’ 같은 주제가 많았고 앞으로 4050이 퇴직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얘기하려 합니다.”
―퇴직 첫해에 인세 수입이 연봉 빈자리를 채워 줬다고 했는데, 그 후로도 순조로운가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인세와 강연료 수입이 대부분인데 두 번째, 세 번째 책은 첫 책만큼 팔리지 않았고 앞의 책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어요. 일부러 출판사도 바꿔 보고 문체도 바꾸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세 정산은 1년에 두 번이고, 강연료 수입도 들쑥날쑥해서 가계에는 크게 도움이 못 되고 있죠.”
![]() 정 씨가 지금까지 쓴 책들. |
직장생활은 단체전, 퇴직 이후는 개인전
―이번 책 앞머리에 ‘콩나물세대’라는 표현이 등장하던데요.
“1960년에서 1979년생까지를 ‘콩나물세대’라고 제가 명명했어요. 매년 100만 명 안팎이 태어나 성장 과정 내내 빽빽한 콩나물시루처럼 북적이며 치열하게 살아온 세대라는 뜻입니다. 또 콩나물처럼 물만 주면 무럭무럭 자라난 세대이기도 하죠.
이 세대의 일과 자기 계발, 시간 관리, 인간관계, 재테크, 건강 등에 대해 제 직장생활과 퇴직 이후 경험을 통해 알아낸 것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요즘은 지자체나 기업들이 직원 퇴직 교육을 많이 하죠.
“맞습니다. 지난번에 포스코 임원 대상으로도 강의했어요. 강의하다 보면 의외로 직장인들이 퇴직 이후 어떤 삶이 전개될지 잘 모른다고 느낍니다. 실제 퇴직해서 5년 정도 지낸 사람의 경험담을 듣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퇴직 후는 직장 때하고는 완전히 결이 다른 삶이 되거든요.”
―어떻게 다른가요.
“운동으로 치면 단체전에서 개인전으로 바뀌는 거예요. 축구 하던 사람이 갑자기 역도를 해야 하는 상황이죠. 사용하는 근육이 전혀 다릅니다. 직장에서 대표이사였건 본부장이었건 퇴직 후 개인전에서 성공은 장담 못 하죠. 후배들이 그런 부분을 미리 알면 퇴직 이후를 준비하는 데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요즘 주된 직장에서 퇴직 연령이 평균 49.3세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흔부터는 여기 대비해야 합니다.”
마흔의 직장인이 짚어봐야 할 3가지
![]() 라디오방송에 출연한 정선용 씨.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탁자 위 플라스틱 칸막이가 보인다. 정선용 씨 제공 |
![]() 2030 독서 모임에서 강연하는 정선용 씨. 오프라인 강연은 사람 눈을 보고 소통할 수 있어 무척 즐겁다고 한다. 정선용 씨 제공 |
―직장인이라면 마흔에 꼭 짚어 봐야 할 것들이 있다고요.
“첫째, 자신의 자산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짚어 보고 그때부터 반드시 재테크를 해야 합니다. 이 나이대에 의외로 자산 점검을 하지 않아요. 다달이 나오는 월급에 중독된 거죠. 월급은 한 달 동안의 생활비뿐 아니라 평생 살아갈 자산의 시드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퇴직하면 명함이 없어집니다. 명함은 사회적 지위를 말하죠. 명함을 이겨 내는 방법은 개인 이름이 명함이 될 정도로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겁니다. 그걸 개발하려면 글쓰기가 효율적이예요. 작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고 내 안의 가능성이 무엇인가 찾아보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죠. 이런 노력을 최소한 마흔쯤에는 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셋째, 일을 놀이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일을 재미있게 했던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일을 놀이처럼 하며 그 안에서 흥미로운 걸 발견해낸다면 퇴직 후에 새로운 일을 잘 찾아내더군요.
롯데에서 했던 가장 획기적인 경품 행사가 아파트분양권, 우주여행권을 건 ‘대한민국 꿈 시리즈’였는데 그걸 만든 사장님은 일을 놀이처럼 재밌게 하던 분이예요. 1958년생이지만 지금도 다른 기업으로 옮겨 현역으로 일하시죠.”
50대, 시간의 주도권을 가져라
―50대가 챙겨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요.
“50대면 이미 상당수가 첫 직장에서 물러나는 상황에 내몰립니다. 우선 ‘시간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퇴직 후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촘촘하게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습관이 되니 시간의 주도권을 내가 쥐게 되더군요. 또 하나, ‘몰입’은 시간의 질을 높여 줍니다. 그러려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죠.
둘째는 건강입니다. 50대가 되면 신체 기능이 떨어지니 식단 관리하고 운동해야죠. 질 높은 수면도 중요합니다. 낮 동안의 습관을 관리하지 않으면 잠을 잘 못 자게 됩니다. 잠, 먹는 거, 몸 움직이는 거, 이런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50대 정도에는 꼭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인간관계입니다. 회사라는 집단 속 관계와 퇴직 후 관계는 전혀 다릅니다. 회사 안에서는 폭넓고 얕게 사람들을 만나죠. 퇴직 후에는 가족과 친구, 특별히 알고 지내는 몇몇 사람만 남게 됩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상대로 회사 다닐 때의 넓고 얕은 관계로 접근할 수는 없죠. 이걸 어떻게 바꿔 갈지 50대는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특히 퇴직 후 제일 먼저 부딪히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 거냐가 인간관계의 중심축이 됩니다.
―배우자 문제는 겪어본 분일수록 심각하게 말씀하시더군요.
“인간관계 중 제일 어려운 게 배우자예요. 제 와이프는 큰일에는 대범한데 작은 거에 까칠해요. 치약 가운데 눌러 짰다고, 화장실에서 서서 소변본다고, 불 안 껐다고, 집이 더운데 보일러 안 껐다고 혼나요. 밥 먹고 나서 반찬통을 왜 냉장고에 안 넣느냐고…. 이런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퇴직 후에 크게 부각됩니다.”
―혼날 일만 하신 것 같은데요.
“이런 얘기를 와이프가 곱게 하진 않잖아요. 저로서는 ‘이 사람이 내가 퇴직했다고 이러는구나’ ‘날 우습게 보는구나’ 이런 못난 마음이 일어나죠. 악순환이 생겨요.”
고독을 견디는 자가 인간관계도 좋아
![]() 직장인 시절 롯데마트가 국가고객만족도 1위를 한 인증서를 들고 포즈를 취한 정선용 씨. 복장도 표정도 헤어스타일도 요즘과는 많이 다르다. 정선용 씨 제공 |
그가 찾은 해결책은 자립적인 생활을 늘리는 것.
“아침에 알아서 일어나 밥도 차려 먹고 홀로 있는 연습을 많이 합니다. 필요하면 와이프가 말 걸어와요. ‘주말인데 산책이나 가자’고. 그래서 아내와 궁이나 능 같은 곳을 다니고 있어요. 저는 그런 장소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막상 가 보니 좋더라고요. 그런 시간 외에는 저 혼자서 제 루틴대로 살아가죠.”
―너무 애를 많이 쓰면서 사시는 거 아닌가요.
“전 이게 더 행복해요. 흐트러져 있을 때가 힘들어요. 제가 주로 8월하고 1월에 주기적으로 무기력증에 빠지는데, 며칠간 아무 것도 못해요. 그렇게 흐트러진 생활을 할 때가 제일 괴로워요.”
―일종의 모범생 증후군?
“나이를 먹을수록 생활 루틴을 지켜 가는 것이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걸 깨달았고, 그렇게 하니까 내가 조금씩 단단해진다고 느껴져 행복하더라고요. 옛날에 쓴 글과 요즘 쓴 글을 보며 약간의 발전을 느낄 때, 매일의 루틴이 반복되며 쌓여간 덕이라는 생각이 들죠. 소소한 하루를 반복하는 그 시간들이 내 삶의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습관과 몰입의 나날들
![]()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
10년 뒤, 20년 뒤에도 지금처럼 루틴을 지키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일본 도쿄 시부야에 있는 공중화장실 청소부의 삶을 다룬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언급했다. 주인공은 매일 반복되는 아침 기상부터 일, 취미활동, 인간관계에 최선을 다하며 충만한 일상을 살아간다.
“주인공이 제 롤모델이예요. 하루 루틴을 지키며 소소한 행복들을 누리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거움을 발견하고. 저도 그 주인공처럼 살아가고 싶어요. 고독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좋은 인간관계도 성립해요. 가족 관계도 제 스스로 외로움을 견뎌 내는 힘이 있을 때 생기가 돕니다.”
그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례로 빈번하게 술친구를 찾는 전 직장 동료들을 꼽았다.
“혼자 있는 걸 못 견디는 거예요. ‘인생 뭐 있냐, 좋은 사람 만나 즐거움을 나누는 거지’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고독을 못 견디고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거잖아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가 단단하지 않아서라고 봐요. 혼자서 살아갈 힘을 기르는 게 퇴직 이후 생활에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충격 못 헤어난 3년 전… 그 뒤 성찰의 시간
3년 전 인터뷰한 그는 퇴직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모습이었다. 퇴직을 통해 깨닫게 된 회사와 자신의 여러 현실에 대해 추슬러지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 만난 그는 좀 더 차분하고 안정된, 그의 말대로 ‘조금은 더 단단해진’ 모습인 듯했다. 자꾸만 솟구쳐 오는 불안에 맞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가족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늠하고, 세상과 인생에 순응하는 성찰의 태도가 읽혔다.
![]() 정선용 씨 가족의 단란한 한때. 부인(왼쪽)이 암 진단을 받자 큰아들(오른쪽)이 집안일을 많이 도와줬다고 한다. 정선용 씨 제공 |
![]() 큰아들 대학 졸업 작품전에 온 가족이 출동했다. 정선용 씨 제공 |
그 사이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했고 고등학생이던 둘째 아들은 대학 4학년생이 됐다. 그가 직장에서 바쁜 사이 알뜰살뜰 재테크를 잘했던 부인은 2년 전 유방암 2기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거쳐 회복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을 함께하며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무척 많다고 한다.
이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스스로의 힘으로 남은 삶을 밀도 있게 채워가는 그는, 반딧불이의 삶을 닮고자 한다고 했다. 남의 후광으로 빛나는 휘황한 별이 아니라 미약해도 스스로 빛을 내는 반딧불이다.
![]() 돌이켜 보면 직장인으로서 누린 40대의 화려한 성공은 회사의 후광 덕이었다는 정선용 씨는, 이제 반사체가 아니라 발광체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자기 몸속에서 작은 빛을 내는 반딧불이처럼.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