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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도전의 아이콘

by동아일보

동아일보

조지 벨로스 ‘뎀프시와 피르포’, 1924년.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특히 스포츠 경기에서는 승자만이 부와 명예를 독차지한다. 지금은 그 인기가 시들었지만 복싱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인이 열광하는 스포츠였다. 잽, 훅, 녹다운 같은 복싱 용어는 일상에서도 흔히 쓰인다. 운동선수 출신의 미국 화가 조지 벨로스는 세기의 복싱 대결 장면을 생생하게 그림으로 남겼다.


1923년 9월 14일 역사적인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이 뉴욕에서 열렸다. 미국의 복싱 스타 잭 뎀프시의 5차 챔피언 방어전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도전자 루이스 앙헬 피르포 역시 세계 최정상 선수 중 한 명으로 중남미 출신의 첫 세계 챔피언 도전이라 큰 주목을 받았다. 대결을 보기 위해 몰려든 8만6000명의 관객이 관중석을 가득 메웠다. 경기가 시작되자 뎀프시는 단 1분 30초 만에 피르포를 무려 일곱 번이나 쓰러뜨렸다. 당시만 해도 세 번 녹다운에 경기가 끝나는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과 30초 후 반전이 일어났다. 뎀프시는 도전자가 날린 훅에 턱을 세게 맞아 링 밖으로 몸이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이때 뒤통수가 타자기에 부딪혀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관중은 그를 다시 링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극적인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가 시작되자 뎀프시의 반격이 시작됐다. 두 번 연속 피르포를 녹다운시킨 후 단 57초 만에 완승을 거뒀다.


최후의 승자는 뎀프시였지만 그림은 피르포가 챔피언을 링 밖으로 쓰러뜨리는 극적인 찰나를 묘사하고 있다. 일곱 번을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선 피르포의 도전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었는지 화가는 그림 맨 왼쪽에 자신을 관중으로 그려 넣었다. 비록 챔피언은 못 됐지만 피르포는 도전의 아이콘이 됐다. 중남미 전역에서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학교, 축구팀이 생겨났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하지만 화가는 패자의 가장 빛났던 역사를 우리에게 영원히 각인시킨다. 어쩌면 이는 수많은 패자들에 대한 응원과 위로일지도 모른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