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세까진 인생여행 워밍업… 100세에도 캐리어 끌고 싶어요”

[라이프]by 동아일보

[이런 인생 2막] 72세 여행작가 김원희 씨

아들 장가 보낸 후 세상 탐험 나서… 67세에 파리여행 책 내고 작가 데뷔

숙소-티켓 직접 예약 20개국 누벼… 12년간 블로그 콘텐츠 2500개 빼곡

요즘은 잊혀지는 간이역에 동질감… 마음만 먹으면 돈 벌고 활력도 찾아

나이 들수록 뭐든 새로운 일 벌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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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희 씨는 가족 건사의 책임이 끝난 60세 넘어서야 해외자유여행에 도전했다. 10년간 20여 개국을 다녀왔고 여행의 경험을 세 권의 책에 담았다. 이 중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여행길이 막히자 국내에 있는 간이역들을 찾아다닌기록을 책으로 펴냈다. 한때 한반도 철도의 중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지고 있는 간이역들에서 그는 동질감을 느낀다고 한다. 부산=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살아보니 인생은 60부터였습니다.”

72세 여행작가 김원희 씨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 60세부터 ‘진짜 내 인생’을 살게 됐다는 것. 시어머니와 남편, 아들 딸 가족을 건사하며 컴퓨터 강사 일을 이어온 그가 ‘해방’을 선언한 계기는 아들의 결혼이었다. 서른 넘기고도 짝을 찾지 못했던 아들이 예비신부를 데려온 날, 그는 기쁨에 차 “난 이제 여행이나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늦깎이 작가의 인생 2막 스토리가 궁금해 지난달 28일 부산을 찾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생기가 넘쳐 첫 저서에 쓴 ‘할매’라는 호칭이 민망할 정도였다.

○60부터 시작한 나만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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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전 딸과 함께한 슬로베니아 여행에서. 서울에서 직장생활 중인 딸과 긴 여행을 함께 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자녀들의 독립을 기다렸다는 듯이 활동을 시작한 엄마를, 딸은늘 응원하고 격려해준다고. 김원희 씨 제공

손주까지 본 60세 할매가 넓은 세상 탐험에 나섰다. 50대 초반에 친구들과 난생처음 떠났던 유럽 패키지여행이 주마간산으로 끝나 너무도 아쉬웠다. 한곳에 오래 머물며 그 지역을 천천히 체험하는 자유여행을 계획했다. 출발 전 자료를 뒤지고 숙소와 티켓 등도 일일이 예약했다. 그런 식으로 10여 년간 유럽 20여 개국을 누볐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도 다녀왔다.


‘맑고맑은’이란 필명으로 여행기를 블로그에 올렸다. 12년간 쌓인 콘텐츠는 4일 현재 2494개. 5000명이 넘는 이웃이 있다. 서툰 영어로 해프닝을 겪고 현지 실정에 어두워 실수를 하는 좌충우돌 여행기에는 후배들을 위한 깨알 정보와 노하우가 가득했다.


“(팁 문화가 발달한) 유럽 식당에서 밥값 24유로를 계산하려 50유로 지폐를 내밀었다. 웨이터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블로그 평판이 좋다 보니 출판사와 연결돼 2017년 67세에 첫 책 ‘할매는 파리여행으로 부재중’(봄빛서원)을 냈다. 인생 2막에 ‘여행작가’ 타이틀이 붙었다. 2020년에 낸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달)는 최근 11쇄에 들어갔고 1월 대만의 출판사로부터 번역출판 제안이 들어왔다. 지난해 11월 말에는 국내 곳곳에 산재한 35개의 간이역을 찾아다닌 기록 ‘나는 간이역입니다’(봄빛서원)를 냈다.


―가족은 잘 이해해 주시나요.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아들 장가만 보내면 난 여행 다닐 거야’라고 말해왔어요. 그렇다고 가정에서 손떼고 여행만 다니는 것도 아니에요. 길어야 한 달이고 1년에 한두 번 정도니까요.”


김 씨와 달리 남편은 게이트볼에 푹 빠져 있다. 출근하듯 나가는 게이트볼 팀에서 동네 할머니들의 리더 역할을 한다고.


―해외여행 다닐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 있냐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텐데….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았죠. 그런데 자유여행은 미리 준비를 잘하면 절약할 수 있어요. 제 식으로 하면 유럽에서 한 달 여행에 300만 원 정도 듭니다. 그리고 제가 끊임없이 일을 하잖아요. 지금도 주 3일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 강의를 합니다. 전에는 구청 강의도 했었고 10여 년간 중증장애인 방문 강사일도 했어요. 그렇게 모은 돈을 오롯이 자신에게 투자하는 거죠.”


―코로나19 탓에 해외여행길이 막혔는데요.


“그 대신 국내 간이역들을 찾아다녔습니다. 2016년에 1년간 코레일 시민명예기자로 일했는데 그때 사라져가는 간이역의 매력에 빠졌어요. 오래 묵은 동네, 그곳에 남겨진 간이역의 과거를 공부하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활동 끝내고서도 혼자 여행을 다녔죠.”


―책을 보니 하루에 한두 명 찾는 역, 아예 인적이 끊어진 역이 많더군요.


“이런 역들은 무궁화호를 타야 갈 수 있어요. 운임이 싼 데다 경로할인까지 되니 나이 들어 여행하기 좋습니다. 시대의 변화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이런 역들은 초라하지만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힘도 느껴지죠. 그런 간이역이나 무궁화호가 마치 나를 닮은 것 같아서 더욱 정이 가더군요.”


그는 나이 들어 여행하는 것은 어쩌면 아직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날 때는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내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할머니 작가의 글은 감수성이 남달라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책 낼 때 나이 든 분들이 읽어줄 것을 기대했는데, 출간한 뒤 딸이 ‘엄마 책은 노인보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100세 시대라는데, 나이 들어 뭐 할까 걱정인데 나도 충분히 할 게 있겠구나’라며 좋아한다는 거예요.”


문득 몇 년 전부터 일본에서 ‘아라한’(around hundred)이라 하여 100세 전후 할머니 작가들이 조명 받는 현상이 떠올랐다. 그들만의 경험과 감수성, 감각이 묻어나는 책들이 밀리언셀러가 됐는데, 장수시대 롤모델을 찾는 50∼70대 여성들이 열심히 사서 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출판사들은 “80대도 젊다”며 90대 이상 신진 작가를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문화도 수요와 공급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한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일을 벌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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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희 씨가 낸 책들.

“나이 들수록 뭔가 새로운 일을 벌여야 해요. 저로서는 몇 년 새 책을 3권 냈으니 나름대로 새로운 일을 벌인 셈인데, 소소하지만 돈도 벌고 활력도 얻을 수 있었어요. 노년은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를 가르는 나이가 아니라 내 마음, 내 의지가 관건인 시기인 거죠. 적어도 재미있게 시간은 보낼 수 있어야죠.”


―‘시간을 보낸다’고 표현하시네요. 나이 들면 시간이 버겁고 때워야 할 대상처럼 되는 걸까요.


“현실은 현실이죠. 전 아직 바쁘게 지내지만, 뭘 할지 몰라 하는 제 나이대 분들도 많아요. 6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80대 들어서면서 부쩍 ‘사는 게 지루하다’고 하시더군요. 늘어나는 수명을 어쩔 수 없다면 기왕이면 보람되고 생산적인 일을 하며 그 시간들을 덜 지루하게, 스스로가 충만하게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흔히 노후를 말하면 사람들이 경제만 생각하는데 사실 나이 먹으면 돈 쓸 일이 많지 않아요. 병원비도 한국의 의료제도가 생각보다 잘돼 있고요. 저는 경제보다 시간이 문제인 것 같아요. 고독, 무료함, 이런 데서 우울증 불면증도 생기죠.”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살아보니 60∼75세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라고 했는데….


“동감합니다. 그 전에는 결혼이건 아이건 누군가를 책임져줘야 하는 시간이었다면 이제 자기만의 시간, 오롯이 나를 책임져야 할 시간이 온 거죠. 자기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아직 60대가 안 되신 분들은 지금 워밍업이라고 생각하시고 너무 힘 빼지는 마세요. 무슨 일이건 연습처럼 가볍고 즐겁게 하세요.”


―60세쯤 은퇴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얘기가 위로가 될까요.


“세상도, 생각도 자꾸 바뀌는 것 같아요. 이제는 100세까지 산다는 것을 전제로 인생설계를 해야 하지요. 그러니 60대 이후로도 무슨 일이건 하셔야 할 겁니다. 전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쉬어가면서 일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너무 빡빡하게 열심히 살지 말라고. 100세까지 살아야 하는데 너무 지치면 안 되는 거죠. 전 30대 후반인 제 딸에게도 쉬면서 하라고 얘기해요. 이제 자식들에게 ‘열심히, 부지런히‘를 강요하면 안 됩니다.”

○언젠가는… ‘할매는 천국으로 여행 중’

‘100세에도 지팡이가 아닌 캐리어를 끌고 싶다’는 그의 요즘 블로그 문패는 ‘할매는 항상 부재중’. 그는 언젠가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왔음을 직감하는 날, ‘할매는 천국으로 여행 중’이라는 문패를 내걸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많이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고.


“여느 때처럼 엄마는 멋진 곳을 여행 중이구나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니 재미있더라고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는 것 같고요. 사는 것도 여행이요 떠나는 것도 여행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갑니다.”


부산=서영아 기자 sya@donga.com

2022.08.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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