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라 철모도 지급 못받고…목숨 건 현장취재였죠”

[이슈]by 동아일보

[6·25 70주년] 노병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4> 지갑종 前 로이터통신 기자

6·25전쟁 때는 종군기자들도 전쟁터에 있었다.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93)은 당시 로이터통신 기자로 2년 넘게 전후방을 누비며 역사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겪은 6·25의 실상과 소회, 전쟁 이후 활동을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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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로이터통신 종군기자로 활약한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장이 종군기자 마크가 부착된 군용 점퍼를 꺼내 입고 포즈를 취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내가 종군기자가 된 것은 1951년 5월이었다. 그해 10월경 국군을 따라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을 취재하러 갔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 때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낙오병들이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빨치산(공산 게릴라)이 됐다. 여러 지역에서 빨치산들이 활동했는데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 지리산이었다. 국군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다.


국군을 따라 전남 구례 쪽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계곡을 지날 때였다. 느닷없이 총성이 들렸다. 빨치산에게 포위가 된 것이었다. 전방에선 총알이 앞에서 온다는 것을 알지만 지리산에선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앞뒤를 알 수 없었다. 종군기자에게는 철모도 지급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면모자를 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재빨리 바위틈으로 몸을 숨겼다. 빨치산들이 기습공격을 가한 뒤 달아나면서 겨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화나 텔렉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전장에서 취재한 내용은 밤새 트럭을 타고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가서 원고를 써야 했다.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인민재판

사실 종군기자들에게 전투 현장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도 있었고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추락해 기자 5명이 한꺼번에 숨지기도 했다. 6·25전쟁 때 외국인 종군기자 16명이 총탄에 맞거나 비행기 추락 사고 등으로 죽었다. 다행히 한국인 종군기자 사망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빨치산 토벌 작전처럼 취재 중 생사를 오간 경우도 있었지만, 최전방에 가서도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일도 많았다. 지휘관들은 자신의 부대에서 기자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 접근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다. 군부대가 종군기자들에게 전투 상황에 대해 브리핑할 때는 주로 시내 다방을 이용했다. 의욕이 넘쳤던 종군기자들은 “우리가 다방 출입기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종군기자가 된 것은 미 군정청 통위부장(지금의 국방장관)이었던 프라이스 대령과의 인연 덕분이다. 광복 이후 고향 광주(光州)에서 알고 지내던 프라이스 대령이 1946년 전남도지사에서 통위부장으로 발령이 나고, 나는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면서 같이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나에게 통위부 비서실 근무를 권하며 자신의 집에서 머물 것을 제안했다. 오전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에 비서실 근무를 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2년여간 통위부 문관으로 활동하면서 통위부장을 찾아온 한국군 고위 지휘관들을 많이 알게 됐다. 그들과 만나는 자리에 자주 배석했다. 한국군 고위 지휘관들과 제법 친해졌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에 남아 있던 나는 6월 29일 인민군과 좌익들에게 붙잡혀 인민재판을 받았다. 재판장이 형 친구인 것을 확인한 나는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안도의 순간도 잠시, 재판장은 “너, 지가(池家)지? 이제 네 세상은 없어”라고 호통 쳤다. 만석꾼 집 자식이던 나를 두고 ‘너희 지주들의 세상은 끝났다’고 한 것이다.


손이 등 뒤로 밧줄에 묶인 채 유치장에 갇혔다. 빨간 완장을 찬 서울대 학생이 이름을 적어갔는데 내 이름을 듣더니 갸우뚱했다. 나를 아는 듯했다. 그가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조사를 진행해줘 7월 4일 아침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겐 생명의 은인이다.

“휴전 얘기 하려면 별을 떼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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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3월 이승만 대통령(오른쪽)이 빨치산 고아 막사를 시찰했을 때 모습. 왼쪽이 지 회장이다. 유엔한국참전국협회 제공

한 달간 숨어 지내다 8월 5일 한강을 건넜고 경기 오산을 거쳐 고향 광주까지 걸어갔다. 1951년 4월 학도병 신분으로 11사단을 따라 광주에서 동해안으로 이동하는 길에 대구에서 로이터통신 기자로 활동하는 대학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너는 군인들을 많이 아니까 나를 도와 달라”고 했다. 뭘 해주면 되느냐고 했더니 “한국 국방부 출입기자는 영어를 못한다. 유엔군을 취재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형님 동생으로 통하는 한국군 고위 지휘관들을 많이 알고 있었고 영어도 가능했다. 1951년 5월 로이터통신 외국인 기자가 경기 의정부에서 숨진 직후 종군기자로 채용됐다.


6·25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7월, 부산 경무대(임시 수도 대통령 관저)에서 특종 기사를 취재했다. 휴전에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해 6월 반공 포로 2만7000여 명을 일방적으로 풀어줬다. 미국은 강력 항의했다. 당시 세계 여론은 38선을 복구했으면 됐지 통일하겠다고 여러 나라 군대가 와서 죽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정전협정 체결(1953년 7월 27일)을 일주일 남겨두고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부산 경무대를 찾아와 이 대통령을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경무대 관계자는 클라크 사령관이 휴전 얘기를 꺼내자 이 대통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전했다. 그러고는 클라크 사령관의 어깨에 있는 별 4개 계급장을 움켜쥐며 “휴전은 정치가 하는 거야. 당신은 전투만 하면 돼. 휴전 얘기를 하려면 이 별을 떼고 와서 얘기하라”고 호통을 쳤다. 설득하러 왔던 클라크 사령관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무대를 방문했던 차에 클라크 사령관 얘기를 가장 먼저 듣고 기사를 썼다. 특종이었다. 

유엔군 참전기념비 건립에 총력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할 즈음부터는 유엔 참전국 기념사업에 힘을 쏟았다. 처음 기념사업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1958년 정부 수립 10주년 특집 기획으로 유엔 참전국들을 찾아가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할 때다. 1963년 유엔한국참전국협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유엔 참전국 병사들이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 그 나라가 참여했던 가장 유명한 전투 지역에 참전기념비를 세우자는 생각을 했다.


한 나라씩 세우자니 돈이 너무 많이 들고 해서 영연방 4개국(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을 모아 사재(私財)로 1967년 경기 가평군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나마 집안이 조금 넉넉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평은 1951년 영연방군이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었다. 호주 시드니에 ‘가평 스트리트’가 있고, 캐나다의 군 기지 이름이 ‘캠프 가평’일 정도다.


이듬해인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호주와 뉴질랜드를 순방하기 전 청와대에서 연설에 포함할 자료를 달라고 해서 “‘우리 국민은 여러분이 싸웠던 격전지 가평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라고 말하면 다 안다”고 조언했다. 호주 의회 연설에서 이 발언이 나오자 의원들이 6분간 기립박수를 쳤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7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기념비를 마지막으로 16개국 기념비 건립을 끝냈다. 6·25 때 대한민국을 도와준 참전국용사들도 기억했으면 한다.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2020.06.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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