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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게놈으로 밝혀냈다… 3500년전 이역만리 우물서 숨진 여인의 고향

by동아일보

잊혀진 과거 밝히는 ‘古유전체학’

‘이란서 3000km 거리 터키로 이동’… 서남아시아 유골 DNA서 확인

고대 유골-화석에 남은 유전자로 유전적 특성과 이주의 역사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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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아프리카에서 멕시코로 온 첫 아프리카인의 유골.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20세기 터키 남부 고유적지 알라라크의 우물에서 이상한 유골 화석이 발견됐다.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골의 주인공은 숨지기 직전 큰 상처를 입고 우물 안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골의 주인공이 숨진 시기를 연대측정 방식으로 추정한 결과 3500년 전으로 확인됐다.


가장 이상한 점은 유골 주인공의 유전자에서 발견됐다. 한국과 미국, 독일의 과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이 유골을 포함해 서남아시아에서 발굴된 유골 110구의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우물 속 여인’은 유골이 발견된 곳에서 3000km나 떨어진 중앙아시아나 이란 동부에서 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무슨 사연으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는지 밝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이역만리까지 와서 숨졌다는 사실은 알아낸 것이다.

게놈이 밝히는 역사 바깥의 역사

최근 20년간 게놈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자들과 인류사를 연구하는 역사학과 고고학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고(古)유전체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인류와 동물의 유골이나 화석에서 DNA 파편을 찾아 해독한 뒤 유전적 특징을 밝히고 인류의 잊혀진 과거를 밝히는 새 영역이다. 게놈을 이용한 고고학과 역사학은 최근 20년 사이에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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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북동부 고대 도시 유적 ‘알라라크’의 우물에서 발견된 3500년 전 여성의 유골이다. 게놈 해독 분석 결과 3000km 떨어진 곳이 고향으로 밝혀졌다.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

문헌에 남지 않은 수백∼수만 년 전 인류 집단이 언제 어디에 존재했고 어느 곳으로 이동해 섞였는지를 통계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2015년 독일 예나에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가 세워졌고, 미국 하버드대와 덴마크 코펜하겐대에서도 연구 결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간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빗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우물 속 여인의 고향 찾기 연구도 연장선에 해당한다.


정충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2016년부터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에서 주요한 연구를 이끌다 지난해 서울대로 자리를 옮겼다. 정 교수는 “네안데르탈인만 해도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와 차이가 있어 오염을 피해 게놈을 해독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현생인류를 다루는 연구는 매우 까다롭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운영되는 연구실도 몇 곳에 불과하다.

고대 유럽, 북미 대륙의 이주 역사를 밝혀

이 분야는 최근 빠른 속도로 성과를 내며 인간이 글로 남긴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던 역사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정 교수는 올 5월 말 미국, 독일, 터키 연구자들과 신석기 말기와 청동기 시대인 약 7500∼3000년 전 유럽 문명의 발상지인 서아시아에서 인류가 어떤 유전적 특성을 보이며 어떻게 이동했는지 밝힌 연구를 공개했다. 지금의 터키와 이란의 자그로스산맥에 흩어져 살던 집단이 처음에는 서로 교류를 하다 점차 동질성을 갖게 되는 과정을 밝혔다. ‘우물 속 여인’처럼 이역만리에서 온 사람의 존재도 이 과정에서 발견됐다.

지금의 터키와 그리스를 잇는 에게해 인근에 살던 신석기인들이 지중해 북부와 유럽 내륙의 다뉴브강을 따라 이동해 중부 유럽인 프랑스에 각각 도달하는 과정도 알아냈다. 이미 유럽에 살던 수렵채집인과 어떻게 섞이는지도 구체적으로 밝혔다. 고대 시베리아 북부에 살던 집단이 복잡하게 교류하고 그중 일부가 북미 대륙으로 건너가 최초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되는 과정도 밝혔다.


연구팀은 이달 1일에도 중국 황허강 중하류 지역과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에서 각각 벼와 기장 농사를 하던 집단이 세를 확장하면서 중국 요서 지역에 시대별로 각기 다른 혈통이 섞였다는 사실을 규명한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정 교수팀의 논문은 불과 2주 사이에 국제학술지 셀에 두 편, 또 다른 학술지인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동시에 공개되며 학계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인 남중국과 동남아인 혼혈 사실도 밝혀

고유전체학은 국내와 아시아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박종화 울산과학기술원(UNIST) 생명과학부 교수는 아시아인 게놈을 토대로 한국인의 기원을 추적한 결과 수만 년 전부터 남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건너온 이주민이 여러 차례 섞이면서 현재의 한국인을 형성했다는 결과를 최근 공개했다. 박 교수는 고대인 115구의 게놈을 해독해 유전적 조상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이런 결과를 내놨다.

중국과학원 연구팀은 앞서 9500∼300년 전 유골 화석 26개의 게놈을 해독한 뒤 분석한 결과 중국은 북쪽과 남쪽 간에 유전적 차이가 매우 컸다는 결과를 5월 공개했다. 북부 지역에 살던 집단은 지금의 동아시아인과 비슷한 반면 남쪽에 살던 집단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중부·남부의 여러 섬(오스트로네시아)의 거주민에 가깝다는 결과다.


게놈으로 역사의 실마리를 푸는 연구는 때론 거대한 역사에서 무시되던 개인사까지 파고들기도 한다. 막스플랑크 인류사과학연구소팀은 500년 전 멕시코에 도착한 첫 아프리카 노예 유골 세 구를 분석한 결과 생전에 서아프리카에서 멕시코로 끌려왔고 과격한 노동으로 비정상적으로 근육이 발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골의 주인공들은 아프리카에서 감염된 풍토병을 앓은 채 고된 노역에 시달렸고 총에 맞고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연구팀은 “게놈 연구가 역사에서 억눌렸던 계급과 민족의 사연을 밝히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