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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구름에 달 가듯 임 마중 가는 길… 氣찬 바위들 날 보라 아우성

by동아일보

[여행 이야기]‘氣의 고장’ 영암 월출산

정기 응축된 용바위의 너른 품

氣를 즐기는 관광명소 즐비

2200년 역사 구림마을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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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10m 상공에 걸려 있는 월출산 구름다리. 시루봉과 매봉을 잇는 이 현수교(길이 54m)에서는 월출산의 기암괴석과 바위 능선, 수려한 산세를 감상할 수 있다.

《2023년을 맞이하는 겨울 여행으로 ‘기(氣)의 고장’ 전남 영암 월출산 자락을 찾았다. 남도의 따스한 해바라기를 즐기며 월출산의 영험한 기운을 받으면, 삶이 더욱 팍팍해질 내년을 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해서다. 월출산 자락 중 풍수적으로 검증된 기(氣) 포인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 월출산 정기 축적된 용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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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사지구탐방로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용바위. 천황봉에서 지내던 소사(小祀·국가 차원의 제사)가 현재 이곳에서 치러진다.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준험한 암봉,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월출산(809m)은 남도의 대표적 명산이다. 기암괴석에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어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 불려왔다. 영암(靈巖)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 월출산의 영험한 바위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용바위다. 월출산 정기가 가장 많이, 그리고 밀도 높게 모인 것으로 소문난 바위다.


용바위는 월출산으로 오르는 천황사지구탐방로(영암군 영암읍)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 8m, 폭 9m의 거대한 화강암이다. 누구나 보기만 해도 예사롭지 않은 바위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월출산 기 체험 명소로 소개된 이곳은 풍수적으로 대단한 명당 터에 해당한다.


바위 아래로는 제단이 설치돼 있다. 매년 월출산 암영지신(巖靈之神)에게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산천제인 ‘월출산 바우제’가 이곳에서 거행된다. ‘바우’는 바위의 전라도 사투리다. 용바위를 품 안 가득 안아 보거나 바위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명상을 하다 보면 바위 에너지가 몸으로 전달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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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천황사. 법당 뒤로 사자봉이 올려다 보인다.

월출산에서 용바위 체험만으로는 아쉽다면 바로 인근 천황사와 구름다리 코스 산행을 해볼 만하다. 용바위에서 울창한 대나무 숲을 통과해 400m쯤 오르다 보면 천황사가 나타난다. 사자봉이 올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천황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천황사에서 한숨 돌리고 이어지는 구름다리까지는 가파른 돌산이 시작된다. 거리로는 1km에 불과하지만 그 품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는 월출산의 ‘명성’을 충분히 체험할 수 있는 코스다. 1시간 남짓 오르막길을 밟는 동안 초겨울에도 구슬땀이 흐르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마침내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월출산의 명물인 구름다리에 도착하면 장엄한 산에 동화되는 쾌감이 느껴진다.


짙은 오렌지색 구름다리는 월출산의 웅장한 암릉과 대비돼 눈에 확 띈다. 구름다리는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해발 510m, 길이 54m의 현수교다. 구름다리에서 사방이 탁 트인 경관을 보면 ‘천상의 바위 조각공원’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고려시대 문인 김극기는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며 기이함을 자랑한다”고 표현했다. 구름다리에서 하산하는 구간 또한 만만치 않다. 철제 계단과 돌계단으로 이뤄진 경사로가 급하고 협소하기 때문에 조심조심 내려와야 한다.

○기운을 사는 기찬묏길과 기찬랜드

영암군은 월출산의 기를 관광 상품화했다. 산책을 하며 월출산의 기를 즐길 수 있는 코스는 ‘氣(기)찬묏길’이 대표적이다. 월출산 기슭을 따라 조성된 산자락 길인 기찬묏길은 1구간(4.5km·천황사∼탑동약수터∼솔바람숲∼기체육공원), 2구간(2km·기체육공원∼국민여가캠핑장∼기찬랜드), 3구간(6.5km·기찬랜드∼대동제∼문산재·양사재), 4구간(2km·문산재·양사재∼왕인 박사 유적지) 등 총 15km 구간이다. 물(水), 숲(林), 바위(巖), 길(路)이 조화를 이뤄 월출산의 정기를 듬뿍 쐴 수 있다는 길이다.


이 중 2구간 끝이자 3구간 시작 지점인 기찬랜드는 영암군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명소다. 월출산 용추골의 기찬랜드를 찾은 우승희 영암군수는 “월출산 천황봉 자락 맥반석에서 나오는 월출산의 기(氣)와 월출산 계곡을 흐르는 청정 자연수를 활용해 조성해 놓은 이곳은 영암의 대표적인 관광지”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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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골 기찬랜드에 있는 가야금산조기념관. 악성 김창조 선생을 기리는 흉상이 세워져 있다.

기찬랜드에는 볼거리도 많다. 영암 출신의 악성 김창조(1865∼1919)를 기리는 가야금산조기념관, ‘영암의 딸’인 가수 하춘화를 기념하는 노래비 및 대한민국 최초의 한국트로트가요센터, 조훈현 바둑기념관 등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기찬랜드에서 기 포인트로 주목되는 곳은 김창조의 생가 터와 가야금동산의 신선바위다. 한 시대를 풍미한 악성을 배출한 생가는 현재 빈터로 남아 있지만, 땅의 기운만큼은 출중하다. 팔각 정자(산조루)가 있는 가야금동산의 신선바위는 김창조가 천황봉을 바라보며 가야금을 연주하고, 산조 음악을 창안한 곳이라고 한다. 신선이 이 바위에 앉아 쉬어 갔다는 전설을 가진 신선바위는 주변 경치를 즐기며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다.

○ 주민자치제의 원조 구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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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 동네가 모여 이룬 구림마을에는 백제 왕인 박사 등 역사적 인물들의 스토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은 자그마치 22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이다. 12개 동네가 모여 광역 마을을 이룬 이곳은 고색창연한 고택과 돌담 길, 웅장한 고목들을 곁에 둔 누각과 정자들로 가득한 곳이다. 지금도 낭주 최씨, 함양 박씨, 해주 최씨, 창녕 조씨, 연주 현씨 등이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자그마한 호수 모양의 ‘상대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원래 포구였음을 말해준다. 일본에 한문과 선진 백제 문화를 전한 구림마을 출신 왕인 박사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최치원도 모두 이곳에서 배를 탔다. 이름난 국제무역항이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이후 간척 사업과 영산강 하굿둑 공사 등으로 옛 모습을 잃었다. 지금은 배를 댔던 포구와 물길 모습을 되살려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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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마을 입구에 있는 상대포역사공원. 한때 번성했던 국제 무역항이었음을 말해 준다.

마을 안쪽에 들어서면 솔숲 사이로 커다란 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회사정(會社亭)’이란 간판이 걸린 이 정자는 마치 관아 건물처럼 웅장한 기품이 느껴진다. 바로 이곳이 구림 대동계의 집회 장소다. 구림 대동계는 1565년 조선 명종 때 창설된 이후 지금까지 450여 년간 이어온 주민자치 조직이다. 향약적 성격이 강한 대동계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다수결 투표 등 민주적 절차로 전통을 이어 왔다. 계원들의 상부상조를 주목적으로 하면서도 엄격한 규율을 강조해 마을 질서를 유지하는 등 주변 고을의 귀감이 됐다고 한다. “혼사 때 구림 대동계원이면 집안 내력을 따지지도 말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회사정 바로 옆으로는 범상치 않은 땅 기운도 서려 있다. ‘회사정 제단’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구림마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풍년을 빌고 감사제를 올리던 제사 터였음을 알려준다. 제단 주변에는 풍기문란, 불효 등으로 마을의 규약을 어긴 이들을 벌주던 돌도 있다.


마을 곳곳에는 역사적 향기가 짙게 밴 기념물들이 숨은 듯이 자리하고 있다. 연주 현씨 가문이 건립한 정자 죽림정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친필 편지(사본)가 보관돼 있다. 충무공은 임진왜란 당시 군수물자 보급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호남의 지인에게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는 친필 편지를 보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구림마을의 현덕승, 현건 부자였다. 충무공은 이 마을을 두 번이나 찾았다고 전해진다.


함양 박씨 가문이 세운 육우당의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다. 한석봉은 스승인 신희남을 따라 영암으로 내려와 죽림정사에 머물며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한석봉과 어머니가 글쓰기와 떡 썰기 시합을 했다는 곳도 바로 이 구림마을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풍수지리로 유명한 도선 국사의 탄생과 관련된 국사암, 왕인 박사의 발자취를 복원해 놓은 왕인 박사 유적지 등이 있다. 영암군이 세운 ‘도기박물관’과 가마터, ‘하정웅미술관’도 방문해볼 만하다. 이처럼 명당 마을 한 바퀴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기운 충전과 함께 충분히 힐링이 된다.


글·사진 영암=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