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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당신 얼굴이 좀 이상해” 인생2막에 닥친 병마, 치유의 힘은 숲에…

by동아일보

[이런 인생 2막]73세에 산림치유지도사 된 박삼령 씨의 숲 예찬

65세에 찾아온 악성 림프종 극복하고 숲을 일터로

“나이 들수록 ‘녹색 갈증’은 심해지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웃과 나누는 삶 살아갈 것

치매예방 산림치유코스 개발하고 싶어

30여 년 금융맨이 자연으로 돌아간 까닭은

한국의 중년 남성들이 ‘나는 자연인이다’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산림치유지도사 박삼령(76) 씨는 나이가 들수록 ‘녹색갈증(바이오필리아)’이 커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녹색갈증은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 하버드대 교수의 이론으로, 인간 DNA에 자연과 다른 생명체에게 이끌리는 본능이 있어 그들과 연결되고자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아예 숲에서 일한다. 정확히는 숲에서 쉬고 공부하며 겸사겸사 일도 한다. 숲은 그의 일터이자 생명을 다잡는 공간, 스스로 치유되고 남들의 치유를 돕는 공간이다. “솔바람에 실려오는 피톤치트와 음이온, 호흡만 깊게 해도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고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도심에서 묻은 심신의 때를 씻어내주지요.”


8년 전 숲 근처에서 살고 싶어 아예 청계산 자락으로 이사했고, 7년 전부터 숲 해설가로 일했다. ‘공기 맑고 도심보다 평균기온이 1도 정도 낮다’는 청계산 자락에서 4일 박삼령 김지수(74)씨 부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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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 자연휴양림 내 ‘치유의 숲’ 황톳길에서 맨발로 ‘어싱(earthing)’ 중인 박 씨. 박삼령씨 제공

숲이 주는 치유의 힘

대학을 졸업한 1973년 외환은행에 입행해 정년퇴직(2004년)까지 한 우물을 팠다. 그 이듬해부터는 개방직 공무원인 전라남도투자유치단장을 맡았고 호남대 무역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했다. 대부분 퇴직해 일을 손에서 놓은 친구들이 “넌 이모작을 하는구나”라며 부러워했다. 이런 일들도 슬슬 끝이 보이던 65세 무렵,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여보, 당신 얼굴이 좀 이상해.”


부인 김 씨에 따르면 안색에 초록빛이 감돌았고 오른쪽 눈두덩이 부어 보였다. 대학병원에서 눈 뒤쪽 림프선에 숨어있던 작은 혹을 발견했다. 조직검사 결과는 악성 안와 림프종. 의사는 종양 위치가 나빠 수술은커녕, 방사선 치료조차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마침 새 표적항암치료제가 나와 임상시험 중이었는데 자리가 남아 있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응했는데 그게 효과가 좋았습니다.”


그렇게 항암주사를 6번 맞고 5년 넘는 관찰기간을 거쳐 2019년 완치판정을 받았다.


“항암주사 맞은 뒤 2주간은 좋은 세포도 따라죽는 기간이라 무척 힘듭니다. 그 뒤 다음 주사 맞기까지 2주는 조금 살 만하죠. 이런 때 전국의 산속 요양병원과 치유센터 등을 찾아다녔습니다. 좋은 공기와 명상, 산림치유가 효과가 있고, 스트레스가 가장 해롭다는 확신이 들었지요.”


하던 일 싹 정리하고 숲 해설가 공부를 시작했다. 2014년 숲 해설가 자격증을 딴 뒤에는 다시 산림치유지도사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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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들을 대상으로 숲 해설을 마친 기념으로 한컷. 아이들 표정이 천진난만하다. 박삼령 씨 제공

73세, 산림치유지도사 자격증을 따다

-숲 해설가와 산림치유지도사는 어떻게 다른가요.


“숲 해설가는 숲 현장에서 숲의 생태를 설명하는 일을 합니다. 학력제한 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어요. 현재 약 2만 5000명쯤 배출돼 있습니다. 산림치유지도사는 치유의 숲, 자연휴양림, 삼림욕장 등을 활용한 맞춤형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장에서 지도하는 일을 하는데, 자격요건부터 까다롭습니다. 원칙적으로 대학 관련학과(산림 의료 보건 간호 등) 학위가 있어야 하고 양성기관에서 1년 정도 공부해야 시험자격이 주어지죠. 현재 2500명쯤 있습니다.”


그는 산림치유지도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방송통신대 농식물학과에 편입해 농학사를 따고 평생교육원에서 1년간 산림치유지도사 양성과정을 수료했다. 2019년 자격증 딴 뒤 2020년 강릉 국립 자연휴양림에서 4개월, 2021년 완도 약산 해양 치유의 숲에서 4개월간 일했다. 일하는 기간 월 200만 원 가까이 급여가 나왔지만 지방살이 비용을 해결해야 하니 남는 건 없다. 완도 치유의 숲에서 일할 때는 근처에 숙박시설이 마땅치 않아 2시간 거리인 나주의 레지던스 호텔에서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다.


산림치유지도사들은 현장에서 사용할 2시간 길이 프로그램을 직접 짜고 방문객을 대상으로 강사 노릇도 한다. 예를 들면 먼저 준비운동을 한 뒤 호흡법을 가르친다. 깊은 호흡으로 몸속 독소를 내보내고 피톤치트와 음이온, 산소가 들어오도록 유도해 뇌를 맑게 해준다. 황톳길이 설치된 곳이라면 맨발걷기를 한 뒤 계곡물에 들어가 발 담그고 지압을 한다. 산으로 올라가다가 적당한 장소가 있으면 명상을 지도하기도 한다.


“질병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입니다. 주원인을 해소하면 면역세포인 NK세포가 활성화돼 비정상세포를 제거해주죠. 식이요법와 약용식물 발효식품에 대해 강의하기도 하고 음악과 댄스를 끼워넣기도 하죠.”


대상층과 현장 상황에 맞춰 몇가지를 섞어 프로그램을 만든다. 노인들이라면 치매예방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청년들이라면 땀이 뻘뻘 날 정도로 운동을 시켜주는 쪽으로 조절한다.


-산림치유 체험 한두번으로도 건강증진 효과가 있는지요.


“‘치료’가 아닌 ‘치유’는 즉각적인 효과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 효과가 자기 몸에 고정화되도록 7~8번 정도 반복하면 확연하게 좋아집니다. 요즘 대부분의 국립 치유의 숲에는 스트레스 측정 기계가 마련돼 있어 프로그램 참여 전과 후 수치가 달라진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호흡기 질환자가 온천에서 한달 정도 요양하는 것도 의료보험으로 커버해줄 정도로 치유 요법은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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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한껏 든 숲에서 낙엽의 생태를 설명중인 박 씨. 박삼령 씨 제공

고령의 산림치유지도사, 일할 기회 아쉬워

어렵게 자격증을 얻었지만 활동기회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지원자가 늘고 경쟁이 격화됐기 때문이다.


“‘제2의 인생’ 논하며 중고년을 위한 일자리창출 차원에서 만든 제도인데, 하겠다는 사람이 미어터지는 상황입니다. 주관하는 산림청이 고민이 많을 겁니다.”


규모가 큰 휴양림이나 치유의 숲은 매년 연초에 공개입찰을 통해 팀단위의 산림치유지도사 조합과 업무계약을 한다. 1급 산림치유지도사가 조합장이 돼 5명, 10명 등의 조합을 만들게 된다. 그는 올해 여러 군데에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개인별로 뽑는 곳들도 높은 경쟁률에 일을 잡기가 쉽지 않다.


그때마다 나이 때문인 것 같아 영 속이 상한다. “물론 나이 때문이라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은 없어요. 그런데 다른 이유가 별로 없거든요. 저 때문에 저희 팀이 떨어진 것 같아 다른 조합원들에게도 미안할 때도 있죠.”


-각자 프로그램을 구성한다면 경륜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다만 나이든 사람이 끼면 팀 전체적으로 호흡이 맞지않을 수 있으니 애초에 피하고 싶겠지요. 꼰대기질에 팀장에게도 잔소리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요즘은 40-50대 여성이나 20대 지도사도 많으세요. 제가 조합장이라 해도 말 잘 듣는 젊은이를 뽑지 할아버지 꼰대를 왜 뽑겠어요. 제가 지난해부터 산림치유지도사협회 이사를 맡고 있는데, 그것도 경계의 요인이 되는 듯합니다. ‘우릴 감시하러 온 건가’하고 말이죠. 하하하.”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는다. 지난주에도 산정호수에 답사를 다녀왔다.

“하루 빈자리를 메우는 거지만 최근 모집공고가 났어요. 16일 주민 30명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산림치유를 지도하려면 현장을 속속들이 보고 프로그램을 짜야 합니다. 얼마나 걸으면 계곡이 나오는지, 명상할 만한 공간은 어디에 있는지 미리 파악해둬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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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산 벤치에 앉아 반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박삼령씨.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조금 손해보는 선택이 이득이더라

그는 외환은행 시절 독일에서만 세 차례 주재원 생활을 했고 호주 현지법인 사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부터 1999년까지는 외환은행 독일 현지법인 사장이었다. 코메르츠방크가 2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외자유치에서 ‘독일이 가장 한국을 밀어줬다’는 기사가 나오던 무렵 그 최전선에서 일한 것. 기획재정부에서 상을 줄 테니 신청하라고 연락이 왔을 정도였다.


-금융가에서도 4번이나 주재원으로 나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던데, 해외근무가 잦으면 국내 사정에 어둡게 되지 않는지요.


“아이들에게 미안하죠. 5~6년 국내 근무하다가 3~4년 해외로 가는 생활이 반복됐으니 공부도 힘들고 친구관계도 끊어지고.”


그래도 아들과 딸은 제 몫하는 성인으로 잘 커줬다. 부인 김지수 씨는 알고 보니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당선된 작가였다. 잦은 해외살이로 활동이 끊기다보니 어느 새 밀려난 세대가 돼 버렸다고 한다. 부인에게는 미안하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대신 다른 많은 경험이 창작의 소재가 된 것 아닌가…”하며 웃는다. 김 씨가 2010년 낸 소설집 ‘누가 강으로 떠났는가(문학나무)의 표지는 호주시절 그가 찍은 사진을 사용했다.


“제게 산림치유지도사는 봉사 활동입니다. 일당도 좀 받지만 내가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이웃과 나눈다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앞으로도 여생을 봉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제가 치매예방운동지도사 자격증도 갖고 있어요. 코로나 사정이 좀 풀리면 산림치유 중에서도 치매예방코스를 중점적으로 하고 싶습니다. 전남지역에서 주간보호센터 어르신들 대상으로 교육해본 적이 있는데 호응이 아주 좋습니다. 치매예방에 태극권을 도입하는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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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면 결혼 50주년을 맞는 박삼령 김지수 부부. 남편은 숲에서, 부인은 글쓰기에 열중하는 ‘따로 또 같이’ 생활을 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ufo@donga.com

“지금 이대로 충분히 행복”

김지수 씨는 비슷한 연배 여성들에게 ‘남편이 숲 해설하러 다닌다’고 하면 다들 엄청 부러워한다고 말한다. 퇴직 뒤 한동안 활동적이던 남편들도 나이가 들면서 점차 집에서 TV만 보거나 자기 방에 틀어박힌 경우가 많다는 것.


-부군이 아프셨을 때는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암 진단 받으면 남들은 운다고 하던데, 저는 갑자기 기운이 솟으면서 ‘이 남자, 무슨 일 있어도 살려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더군요. 제 딴에는 최선 다했습니다. 그때 느낀 게 본인도 힘들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간호하는 가족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프로그램도 필요하겠다는 거였어요. 덕분에 인생설계를 새로 했어요. 식단을 건강식으로 바꾸고 이사도 하고 생활패턴도 완전히 바꿨지요. 함께 등산하고 숲 여행도 많이 가고, 제 인생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그는 2010년 마지막 소설집을 낸 뒤 10여 년 간 글을 안 썼다고 한다. 젊은 작가만 선호하고 책 내기도 힘든 세상이 서운했다. 대신 글쓰느라 못 누린 인생을 찾아보자는 쪽으로 선회해 여고동창들과 정기 여행모임을 만들도 연극 공부를 해 무대에도 섰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시니어모델 활동도 맛봤다. 그랬더니 요즘 다시 글이 쓰고 싶어져 블로그에서 독자와 소통하고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런 그는 70대가 된 지금 인생 최고의 즐거운 나날을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 “노후는 지금 이대로로 충분합니다. 너무 잘 살고 있어요. 남편은 남편대로 저는 저대로 만족합니다.”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