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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키는 커도 마음은 솜사탕”… ‘거인병’과 36년 싸웠던 김영희

by동아일보

1980년대 농구 스타, LA 올림픽 銀

성장호르몬 과다 분비 말단비대증

최근 내시경 수술 치료 권장

205cm 한기범 2차례 심장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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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거인병 끝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농구 스타 출신 김영희 씨. 여자프로농구 경기위원으로 일할 때 모습. 동아일보 DB

며칠 전 1980년대 한국 여자농구 전성기를 빛낸 김영희 씨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수 시절 키가 205㎝이었던 그는 1982년 인도 뉴델리와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에서 센터로 뛰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4년 조승연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에서 은메달을 거들었다. 그때 만해도 한국 스포츠가 올림픽 구기종목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었다. 1981년 숭의여고 졸업 후 한국화장품에서 뛰며 한 게임 최다인 61점을 터뜨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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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농구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 대표팀. 김영희 씨(오른쪽에서 세 번째)도 당시 멤버였다. 박찬숙 성정아 김화순 등도 보인다. 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

● 끝없는 병마와 맞선 인생 후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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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김영희 씨의 뇌종양 투병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지면. 동아일보 PDF

하지만 김영희 씨의 인생 후반전은 병마와의 끝없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24세 때인 1987년 악성 뇌종양으로 8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뇌에 생긴 혹 때문에 호르몬샘이 막혀 당뇨병이 생겼으며 머리가 깨질 듯 아픈 증세까지 보였다.


필자는 몇 년 전 김영희 씨의 자택을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다세대 주택 2층의 20m²(약 6평) 단칸방에서 홀로 머물며 여전히 투병 중이었던 그는 “어느 날 샤워를 하는데 머리에 감각이 없었다. 두통이 너무 심해 병원을 찾았는데 뇌종양이라고 하더라. 이틀만 늦게 갔어도 위독할 뻔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생생히 떠올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던 계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은퇴식도 없이 코트에서 사라져야 했다.


그 후로도 시련은 계속됐다. 1998년 유일한 친구 같은 존재였던 어머니가 59세로 타계한 뒤 2000년 아버지마저 세 차례 암 수술 끝에 눈을 감았다.


의지할 곳이 없던 그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2002년 ‘거인병’으로 알려진 말단증후군 판정까지 받았다. “심장과 장기 등이 계속 커져 죽게 되는 병이다. 매달 150만 원 넘게 드는 성장호르몬 억제 주사를 평생 맞아야 한다. 나를 왜 이렇게 크게 만들어 힘들게 하는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그의 생전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 후로도 장(腸) 마비 증세와 폐에 물이 차고 담낭에도 염증이 생기는 등 후유증에 시달렸다. 2003년 여자프로농구(WKBL) 기술위원으로 경기장을 찾아 후배들을 지켜보기도 했으나 잠시였다. 다시 보이지 않은 적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 원인은 뇌하수체 종양 …증상 천천히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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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인 손(왼쪽 사진 왼쪽, 오른쪽 사진 왼쪽)과 말단비대증에 걸린 손. 사진 출처 현대아산병원, 메디인디아넷

말단비대증(Acromegaly)은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성장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과잉 생산되면서 나타나는 질환이다.


성장호르몬은 성장기 이후 분비량이 감소하게 된다. 말단비대증은 뇌하수체 종양이 생겨 성장기 이후에도 성장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돼 손, 발이 커지고 여러 합병증이 생긴다.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인지가 어려워 40세 이후에 발견되는 경우도 많다. 증상이 서서히 변화하기 때문에 본인이나 주변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당뇨병, 고혈압, 심근 비대, 심부전증, 수면무호흡증, 대장 폴립, 대장암의 위험도가 증가한다.


과거 김영희 씨는 “너무 작게 태어나 할머니가 백일기도를 했다고 하더라. 아버지(165cm)와 어머니(163cm)도 크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다섯 살 때부터 키가 자라기 시작해 농구를 시작한 부산 동주여중 2학년 때 189㎝까지 큰 뒤 졸업반 때는 1년 사이에 3㎝가 컸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숭의여고 입학 후 197㎝까지 큰 키는 200㎝를 훌쩍 넘었다.


말단비대증에 걸리면 뼈가 넓고 두텁게 성장해 사지가 커지고 아래턱이 길어지고 콧등이 넓어진다. 땀샘과 피지선이 커져서 피부에 기름기가 많아지고 땀이 많이 나기도 한다. 성대가 두꺼워지므로 쉰 목소리가 나고 목소리도 변할 때도 있다. 두통이나 시력 손상이 올 수 있으며, 심장 비대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포도당의 세포 내 유입이 제한돼 혈장 포도당 농도가 상승으로 당뇨병이 생기기도 한다.

●포도당 섭취 후 호르몬 측정

1차 진단은 성장호르몬의 농도 측정을 통해 이뤄진다. 포도당을 섭취하게 되면 성장호르몬의 분비가 억제되지만, 말단비대증의 경우에는 억제가 되지 않다. 포도당을 섭취한 후에 성장호르몬을 측정해도 농도가 높다면 말단비대증 진단을 내릴 수 있다. CT(컴퓨터단층촬영)나 자기공명영상(MRI)으로 뇌종양의 위치와 크기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효과가 좋은 치료법은 수술로 뇌하수체 종양을 제거하는 것이다. 코를 통한 내시경으로 종양을 제거할 수도 있다. 도파민 유도체를 복용하는 방법과 소마토스타틴 유도체를 주사하는 방법도 있다. 먹는 약은 저렴하지만, 효과가 낮으며, 주사제는 먹는 약보다 효과가 우수하지만 비싼 단점이 있다고 한다. 수술로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을 만큼 크다면 남은 종양은 방사선 치료로 제거하게 된다. 방사선 치료의 효과를 보기까지는 5~10년이 걸리므로 약물치료도 병행해야 한다.


특별한 예방법은 없으며 증상을 빨리 알아차려 조기에 치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 마르판 증후군은 유전 질환…심장 혈관 뼈 눈에 영향

동아일보

김영희 씨와 한국농구를 대표하는 센터로 활약한 한기범 씨. 한 씨 역시 거인병으로 두 차례 심장 수술을 받았다. 동아일보 DB

한국 농구의 대들보 센터로 활약했던 한기범 씨(60)는 1996년 은퇴한 후 혈관계 희귀 질환인 마르판 증후군에 시달렸다. 아버지와 동생이 모두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키가 205cm인 한 씨는 두 차례 심장 수술로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환갑을 맞은 요즘도 동호인 팀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한 씨는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김영희 씨 별세에 대해 “쓸쓸히 혼자서 고독사 비슷하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슬프고 마음도 아주 아프다”라고 비통한 심경을 밝혔다. 과거 한 씨는 자선 농구대회를 개최해 수익금 일부를 김영희 씨 돕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마르판 증후군은 말단비대증과 비슷한 거인병이다. 1896년 의사 장 말팡에 의해 처음 보고된 질환. 우리 몸의 각 부분이 잘 결합하여 유지되고 성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결합 조직의 이상에 의하여 발생하는 유전성 질환이다. 마르판 증후군은 심장, 혈관, 뼈, 관절, 눈에 잘 나타난다.


몸통보다 다리가 긴 큰 키, 긴 손가락과 발가락, 편평발, 척추의 측만, 좁은 얼굴 등이 특징으로 알려졌다.


마르판 증후군은 유전 질환이기 때문에 가족 가운데 환자가 있다면 산전이나 증상 발현 전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 “난 외계인 취급 받았지만 베푸는 삶 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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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시절 운동기구를 들며 농구 스타의 꿈을 키웠던 김영희 씨. 동아일보 DB

키가 너무 컸던 김영희 씨는 자신을 외계인에 비유하기도 했다. 주위의 낯선 시선에 우울증을 겪었다. 학생들이 “거인 나오라”라며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래도 “남에게 먼저 베푸는 삶을 살라. 힘들어도 누군가를 부축하고 일으켜야 너도 살 수 있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려운 생계에도 장애인 소년 소녀 가장을 돕기도 하고, 자신에 들어온 쌀 같은 구호품 등도 더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가 사람은 커도 마음은 솜사탕 같다”라는 생전 한 마디도 떠오른다.


< 도움말 : 삼성서울병원, 현대아산병원 >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