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라이프 ]

웹소설 작가가 된 의사…비결은 “매일 100원짜리 글 쓰기”

by동아일보

복수자들

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이자 웹소설 작가. 어느 하나 녹록치 않은 타이틀을 서른여덟의 나이에 거머쥔 사람이 있습니다. 웹소설 마니아 사이에서는 ‘한산이가’라는 필명으로 친숙한 의사 이낙준 씨입니다. 낮에는 의사, 저녁에는 작가로 이중생활을 하며 쓴 웹소설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와 ‘A.I. 닥터’는 드라마화가 결정됐습니다.


그를 뭘 해도 쉽게 성공하는 ‘타고난 천재’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학창시절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중학교 땐 반에서 20등을 왔다 갔다 했고, 학교가 끝나면 PC방이나 만화방으로 직행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뒷심을 발휘해 의대에 갔지만 거기서도 그는 청개구리였습니다. ‘의사는 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행정고시를 공부했고, 인턴시절 전공을 네 번이나 바꿔 ‘배반의 장미’라는 별명도 붙었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렸던 그가 딱 하나 놓지 않았던 것은 소설입니다. 유년시절 판타지·무협 소설과 만화책을 끼고 살았던 그는 군의관 시절 독자에서 필자가 됐습니다. 히트작이 나오지 않아 글 쓰는 걸 포기하려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는 2년 전 병원을 나와 웹소설 작가로 전업했습니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이 씨와 만나 의사와 웹소설 작가를 병행한 과정과 성공의 비결을 들었습니다.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에서 이 씨의 의사 시절(https://www.youtube.com/watch?v=Dln1UcrBxLY)과, 웹소설 작가 때 이야기(https://www.youtube.com/watch?v=cpLziXyGo4I)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반에서 20등 하던 ‘만화광’, 이비인후과 의사 되다

동아일보

―의사 겸 작가라니 학창시절이 궁금해요. 반에서 1등만 하던 모범생이었죠?


중학교 땐 반에서 20등 정도 했어요. 공부에 관심도 없었고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았어요. 겨울방학엔 친구들과 군고구마 팔고 방과 후엔 만화방을 갔죠.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 정신을 차렸어요. 모의고사에서 400점 만점에 310점 정도를 받았는데 ‘이 성적으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죠. 2학년 2학기부터 모의고사를 매일 풀었어요. 어렸을 때 판타지소설을 많이 읽어서 언어 점수가 받쳐줬던 게 도움이 됐어요. 이후부턴 쭉 전교 1등이었어요.


―고2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인하대 의대에 진학하셨어요. 의대 시절은 어떠셨어요?


예과 시절엔 의사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행정고시를 공부하기도 했었고, 인턴 때 재활의학과, 응급의학과, 안과, 내과, 이비인후과까지 전공을 네 번이나 바꿔서 별명이 ‘배반의 장미’였어요. 이비인후과는 귀, 코, 목 세 개 장기를 보잖아요. 다양한 진료를 할 수 있는 게 좋아서 이비인후과를 택했죠.

동아일보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레지던트 시절의 이낙준. 이낙준 제공

―여러 곳 기웃기웃 하셨지만 결국 시의적절하게 길을 잘 찾아가셨어요.


지금까지도 잘 하는 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런 게 생겼을 때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거에요.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거든요.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선배에게서 제안이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인턴 때 열심히 한 덕이었죠.

●부업으로 시작한 웹소설, 의사 수입의 3배

―의사라는 직업 하나만으로도 바쁘셨을 텐데 웹소설은 언제 시작하셨나요?


군의관 시절이었던 2016년 처음 웹소설을 시작했어요. 오후 5시에 퇴근하고 매일 두 시간씩 A4용지 4~5장 분량을 썼어요. 그 때 쓴 게 ‘군의관, 이계가다’인데 문피아(웹소설 플랫폼)에서 욕 많이 먹었어요. 지금 읽어보면 비문도 많고, 캐릭터나 구성도 허술해요. 대학에서 문학상을 받은 남동생은 ‘혈육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글’이라고 혹평했죠.

동아일보

―혹평을 이겨내고 2019년에 쓰신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는 웹툰에 이어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게 됐어요. 성공 비결이 궁금해요.


‘열혈닥터, 명의를 향해’ ‘의술의 탑’ ‘닥터, 조선 가다’ 세 편이 연달아 잘되면서 승승장구하다가 ‘의느님을 믿습니까?’가 데뷔작 수준으로 망했어요.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썼어요. 무조건 잘 돼야 했기에 대학병원 배경, 의사 주인공, 디테일한 수술 장면 등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넣었어요.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어게인 마이 라이프’처럼 웹소설 원작 드라마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잖아요. 웹소설이 주목받는 시대가 오면서 제 작품도 빛을 본 것 같아요.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의 성공 후 웹소설 작가로 전업하셨다고 들었어요.


2020년 1월에 병원을 그만 뒀어요. 웹소설 작가 일을 시작할 때 ‘본업의 3배 이상을 부업에서 벌면 본업을 그만 두자’는 기준을 정했거든요.


―일각에선 낙준 님 작품 조회수가 8000만 회 정도고, 회당 100원이니 80억 원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가장 성공한 두 작품 ‘A.I. 닥터’와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 조회수를 합치면 8000만 회 정도 돼요. 그런데 무료회차가 있어서 매출은 전체 조회수의 80%정도에요. 플랫폼 사업자 등과 나누고 나면 전 매출의 절반 정도를 가져와요.

동아일보

웹소설 ‘중증외상센터: 골든아워’의 단행본을 들고 있는 이낙준 씨.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00원짜리 글을 쓰자” 2만 자씩 매일 집필하는 법

―대박작품, 쪽박작품 다 써 보셨는데 ‘성공하는 웹소설의 특징’은 뭘까요?


주인공의 욕망을 독자가 응원하거나 동일시할 수 있는 소설이 뜬다고 생각해요. ‘재벌집 막내아들’ 주인공 진도준도 나쁜 짓을 하지만 독자가 그의 욕망을 응원하잖아요. 과거엔 이타적이고 정의로운 주인공이 각광받았다면 지금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내 것을 챙기는 주인공도 인기가 많아요.


―‘검은머리 영국의사’ ‘포스트 팬데믹’ ‘A.I. 닥터’ 총 세 편을 연재 중이세요. 하루에 2만 자 넘게 쓰고 있는데 매일 많은 양을 쓰는 비법이 있을까요?


모든 글을 100점으로 쓰려는 욕심은 버려야 해요. 모든 회차를 최선을 다해 쓰려다보면 마감을 못 할 수 있어요. 독자와의 약속을 어기는 거죠. 100점 만점에 90점정도만 지키면 돼요. 저는 100원짜리 글을 쓰는 사람이잖아요(웹소설 회당 100원). 제 글의 퀄리티가 100원에 합당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작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신작을 준비할 때 스스로에게 ‘너 이 소재로 몇 화까지 재밌게 쓸 수 있어?’를 물어요. 웹소설은 300화 이상은 써야 하는 시장이거든요. 아무리 소재가 재밌어도 ‘100화 넘어가면 못 쓸 것 같다’ 싶으면 과감히 내려놔야 해요.

동아일보

이낙준의 점심식사.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메뉴는 건강식 도시락으로 통일했다. 이낙준 제공

―시간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쓸데없는 고민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식단을 통일했어요. 도시락을 주문해놓고 점심은 매일 같은 걸 먹어요. ‘애착옷’이 있어서 옷도 거의 그것만 입고요.


―웹소설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 ‘이것만은 기억해라’ 팁 하나 주신다면?


한 번에 잘 될 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유념하고 너무 빨리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초반에 기대가 크면 무너지기 쉽거든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에요. 중꺾마, 시대를 관통하는 말이네요.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