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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꿈 저당 잡힌 프리랜서 아나운서

by이투데이

[편집자주] 노동환경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많은 청년이 고통받고 있다. 일하고 돈을 받지 못하고, 과로로 건강이 나빠지기 일쑤다.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의 부당한 지시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청년이 착취당하는 현장,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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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아나운서를 '방송국의 꽃'이라고 부르곤 하지만 저흰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대형 방송국에 소속된 사람, 대중에 이름이 잘 알려진 프리랜서 아나운서들한테 해당한 말이죠. 저희 같은 아나운서를 위한 말이 아닙니다."


얼마 전 소형 방송국 '정규직' 아나운서를 그만둔 최나연(가명·31) 씨가 한 말이다. 그는 두 달 만에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왔다. 정규직이라고는 하나 월급이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쳐서다. 그가 첫 월급으로 받은 돈은 120만 원. 숙식을 제공해준다는 이유로 최저임금을 받지 못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고향인 서울을 떠나 자리를 잡았지만,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이미지와 다른 아나운서 세계…준비 비용만 '1000만 원'

프리랜서 아나운서라고 하면 화려하고 당당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부 방송국은 이제 막 아나운서 준비생 꼬리표를 뗀 청년들에게 '경력'을 빌미로 저임금 노동을 정당화하고, 아나운서 아카데미와 연계해 무급으로 일을 시키는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다. 아나운서를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기엔 그 대가가 작지 않다.


사실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비용 자체가 만만치 않다. '돈이 없으면 꿈을 이룰 수 없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다. 나연 씨도 1년 6개월 정도 준비하면서 1000만 원이 넘는 돈을 썼다. 아카데미 비용만 약 700만 원을 냈고, 면접을 볼 때마다 머리와 화장을 받기 위해 10만 원~15만 원을 쓴다. 의상을 빌리면 10만 원 정도가 또 든다. 지방에 일정이 잡히면 30만 원이 순식간에 깨진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일이 들어와도 의상이나 화장이 지원되지 않은 곳이 많아요. 행사 진행이나 리포터 등으로 한 번 일하면 15만 원~20만 원을 받는데, 이것저것 쓰고 나면 쥐는 돈이 얼마 안 돼요. 물론 근무시간 대비 수입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일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직장인들처럼 안정적으로 수입이 발생하지 않죠. 퇴직금이나 고용보험은 꿈도 못 꾸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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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만연한 저임금…방송국·아나운서 아카데미 제휴한 '노동 착취'

일부 소형 방송국과 인터넷 방송국은 정기적으로 일감을 준다며 저임금 노동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루 8시간을 근무하면서 리포트 작성과 방송 진행을 도맡지만, 일당 2만5000원~6만 원을 지급한다. 아나운서 일의 특성상 새벽과 야간에 일 할 때도 잦지만 야간수당은 기대할 수 없다.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다. 자리는 얼마 없지만, 아나운서 지망생은 꾸준해 방송국 내에서는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라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 대중에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케이블TV 방송이나 인터넷 방송국이라도 아나운서 채용에 200~300명은 금방 몰린다. 수준을 갖춘 사람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구조다. "돈을 적게 주더라도 일할 사람이 차고 넘친다"라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최근에는 이들 방송국이 아나운서 아카데미와 연계해 무급으로 일을 시킨다. 작은 경력이라도 필요한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처지를 이용한 것. 아카데미는 수료생에게는 경험을 쌓을 수 있다며 해당 방송국에 인력을 제공하고, 인재배출 목록에 이름을 기재한다. 방송국은 이 수료생에게 '아나운서'라는 이름표를 붙여준다. 노동력을 제공받지만 임금은 주지 않는다.


프리랜서 아나운서인 김수영(27·가명) 씨는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 아카데미는 증권방송국 이름을 붙인 반을 개설했어요. 이 반을 수료하면 '추천'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수강생을 모집했죠. 아카데미는 이 구실로 수강료를 챙기고, 방송국은 준비된 인력을 공짜로 쓰는 셈이에요. 방송 경험을 쌓고, 경력도 만들 수 있다지만 일한 대가를 안 주는 건 말이 안 되죠."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는 '인재 추천'이라는 시스템으로 특정 수강생의 이력을 소형 방송국에 제공한다. 공개채용을 하기 어려운 소형 방송국은 아카데미가 추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채용 절차를 진행한다. '추천'을 잘 받기 위해서는 뛰어난 실력이 선행조건이지만 해당 아카데미에 쏟아 부은 돈이 얼마인지도 중요하다는 것이 지망생들의 설명이다.

종종 일어나는 성 추문…대형 방송국 입사는 '하늘의 별 따기'

성희롱과 성추행으로 속앓이하는 프리랜서 아나운서도 있다. 특히, 지방에 있는 인터넷 방송이나 소형 방송국일수록 성 추문이 발생한다. 대표가 아나운서를 개인 비서처럼 대하거나 개인적인 모임에 동행을 요구하는 때도 있다고. PD가 마이크를 채워준다며 몸을 만지고, 자신의 지인을 소개받아보라며 강요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열악한 근무환경 탓에 다른 일을 찾는 사람도 많다. 아나운서 일과 비교적 유사한 방송기자로 진로를 바꾸거나 기업 홍보팀, 일반 회사로 취업하면서 이 바닥을 뜬다. 하지만 여전히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일하면서 기회를 노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중에 일부는 자기만족으로 일하지만 대개는 대형 방송국 입사를 꿈꾸죠. KBS·MBC·SBS처럼 지상파에 가면 최고의 시나리오지만 경쟁률이 1000:1이라는 말이 있어서 쉽지 않아요. 나이가 차서 신입으로 지원하기 어려우면 경력으로 YTN·연합뉴스TV처럼 뉴스전문 채널이나 종합편성채널(종편)에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김수영 씨)


아나운서 지망생은 넘쳐나지만, 대형 방송국 입사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공개채용 형식으로 신입 아나운서를 선발하는 곳은 KBS·MBC·SBS와 JTBC 정도다. 매년 채용을 하지 않을뿐더러 채용 인원이 4곳을 합해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뉴스전문 채널과 종편은 경력 위주로 채용하는데 최근에는 지상파 출신으로 대중에 잘 알려진 아나운서들이 자리를 옮기면서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의 자리가 갈수록 줄고 있다.


대형 방송국의 한 관계자는 "주요 방송국은 아나운서 인력이 충분하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대형 방송국의 처우나 근로 환경이 좋다 보니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이투데이/홍인석 기자( mystic@e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