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의 컴퓨터 생활 - MSX의 추억

[김국현의 만평줌] 제28화

응답하라 1988의 컴퓨터 생활 -

신드롬을 일으켰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그 1988년은 그 시절을 살았던 IT 마니아들에게는 어떤 해였을까? 1988년은 80년대를 풍미했던 8비트 문화가 그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해였다.

 

물론 1988년은 인텔의 대중형 32비트 프로세서 386SX가 발표된 해이기도, 잡스의 NeXT가 처음 선보인 해이기도 하니 미래가 시작된 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맥이나 아이폰용 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배워야만 하는 오브젝티브C도 바로 이 해 NeXT에 의해 라이센스되었으니, 그 후 밀어닥치게 될 엄청난 변화의 태풍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1988년은 태풍전야였다. 한국의 컴퓨터 키드들은 한국 8비트 문화의 양대산맥이었던 애플][(애플 2는 이렇게 대괄호를 뒤집어써야 제 맛이었다)와 MSX가 만들어 준 서브컬쳐를 나름의 자부심으로 지켜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우, 금성, 삼성 등이 채택했던 8비트 공통 규격 MSX는 그 전성기였는데, 하드웨어의 제약을 장인정신으로 격파하던 패기가 있었다. R-Type과 같은 당시의 게임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다. 역시 제약은 창조력의 원천이다. 대부분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게임이지만, 당시의 마니아들은 언젠가 일본보다 더 게임을 잘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수도 있고, 후일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비록 짧은 기간 명멸했던 하위문화였지만, 젊은이의 문화가 실질적 산업으로 이어지고 미래의 기회를 잉태하는 문화적 유산의 힘을 모두에게 목격하게 해 준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소셜미디어도 블로그도 PC통신도 없었지만, 그 자리에는 잡지가 있었다. 몇 페이지나 넘는 독자 투고 프로그램을 한 줄 한 줄 입력하고 실행해 보면서 어느 소셜 못지 않은 동지애를 느끼기도 했다. 다만 그 고생 후에 실행이 안 돼도 댓글을 달 수 없으니 하소연할 데도 없었던 시절이다. <월간 학생과 컴퓨터>는 1987년 폐간되었지만,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와 <월간 컴퓨터학습>이 건재하고 있었다. 컴퓨터 잡지야말로 특화된 정보의 해방구이자 강한 연대감을 유지해주던 매체였다.

 

또 당시는 마니아 문화의 메카가 세운상가에서 용산전자상가로 강제 이주되던 때이기도 했다. 드라마의 에피소드처럼 상가 앞에는 정말 건달들이 상주하고 있었는데, 나도 세운상가에서 같은 건달을 세 번 만났던 추억이 있다. 납땜 냄새와 담배 냄새로 절어 있던 세운상가의 그 골목 내음이 생생하다.

 

그러나 전성기란 내리막이 있기에 가능한 칭호다. 바로 이듬해인 1989년, 정부는 교육용 컴퓨터를 16비트라고 콕 집어서 채택함으로써, 한반도의 모든 8비트 컴퓨터를 절멸시키고 만다.

 

위안으로 삼았던 것은 전세계적으로도, MSX의 운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는 사실. MSX2+, Turbo R 등이 일본에서만 등장했지만, 이미 286, 386, 486으로 행진하기 시작한 PC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

 

8비트 키드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컴퓨터학습은 이름을 마이컴으로 개명 16비트 시대를 버텼지만 IMF의 소용돌이에 1998년 휴간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모두의 빈자리를 지키던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는 2015년 12월 휴간하게 된다. 2016년 현재 재개발이 진행중인 용산전자상가는 예전의 활력을 확연히 잃어가고 있다.

 

IT는 늘 미래를 보는 분야이지만, 다른 모든 추억처럼 그 시절을 가끔 그리워하게 하곤 한다. 구 소련 우주정거장 미르(Mir)에 MSX2가 탑재되어 있었다는 풍문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고 옛 친구를 찾은 것처럼 기뻐하고, 최신형 PC에 MSX 에뮬레이터를 돌려 보며 앨범을 넘기는 상념에 빠지며 말이다.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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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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