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록스, 우리가 잊고 있던 IT 명가

제록스, 우리가 잊고 있던 IT 명가

일본 후지필름은 지난달 말 미국 사무기기의 명가 제록스를 인수·합병하기로 발표했다. 제록스라 하면 1906년 창업이니, 100년도 넘은 그야말로 IT 업계의 시조새 같은 회사.

 

우리에게도 후지 제록스란 이름이 친숙할 정도로 이미 이 두 회사는 태평양을 뛰어넘은 동반관계를 체결해 왔는데, 무려 1962년부터니 반세기 전부터 해 왔던 일이다.

 

선진국으로부터 기술이전의 시혜를 받던 작은 회사가 결국은 큰 기업을 삼켜 버린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서양 회사가 머나먼 극동지역에 직접 진출하는 대신 현지 회사와 동반관계를 체결하여 판로를 확대하는 일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80~90년대에는 ‘삼성 휴렛팩커드’ 라는 이름의 회사 등이 꽤 있었다.

 

후지필름도 그리 상태가 좋지는 못해 작년 부정회계가 발각되어 기업통치의 신뢰에 금이 가는 등 위기 상황이다. 디지털카메라 산업에도 코닥보다는 열심이었지만, 사양산업의 근본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후지필름 입장에서는 이번이 승부수다. 사실 그간 전체 그룹 실적의 과반이 그나마 후지제록스에 기대왔다. 이를 미국 제록스와 나눌 필요없이 다 가져올 수 있게 된다. 또 중복부문의 제거로 효율화를 할 명분도 생겼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1만 명의 구조조정을 예고하기도 했다. 쓸쓸하고 씁쓸한 일이다. 

 

쓸쓸하고 씁쓸하기로 치자면 제록스 PARC(팔로알토 리서치 센터)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여러 일화가 있지만, 스티브 잡스가 제록스에 견학 가서 그들의 알토 컴퓨터로부터 GUI, 마우스 등 알찬 개념을 쏙 베껴 왔다는 이야기는 다양한 버전의 도시전설로 계승되고 있다. “겨우 이 정도밖에 못 만들었다니, 우린 더 싸게 더 잘 만들건대.”라며 제록스에 와보고 잡스가 안도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제록스 투어 동안 잡스는 꼼꼼히 메모했고 심지어 제록스 출신을 데려오기도 했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버전이 있다. 그런데 화법은 다르지만 진실은 하나. 제록스의 기술이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컴퓨터의 원천이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런 일화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은 원천 기술도 많다. 오늘날 인터넷의 기반이 되고 있는 이더넷만 봐도 그렇다. 제록스에서 73년부터 연구해 온 이 기술은 이더넷이라 불리기 전 “알토 알로하 네트워크”가 그 이름이었다. 알토는 제록스의 바로 그 컴퓨터, 알로하는 70년대 초반 하와이 대학에서 만든 네트워크. 그리고 이 네트워크가 접속한 대상 또한 놀라운 데 바로 레이저 프린터. 세계 최초의 레이저 프린터였다. 레이저 프린터를 다루는 언어 포스트스크립트는 PDF와 함께 어도비의 산물이라 알려졌지만, 어도비의 두 창업자 모두 제록스 PARC에서 그 선행기술을 연구하던 이들이었다.

 

이처럼 당시 제록스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단 하나만 눈에 보였다. 그건 바로 복사기였다. 세상은 모두 복사기만 원했고, 복사기만 팔아도 충분했다. 미래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현실만 붙잡고 있었다.

 

미래를 열어 버린 다른 모든 연구 들은 당대의 현실 속에서는 장난감 같아 보였다. 행여 설익은 장난감이 복사기 회사를 복사기 회사답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복사기가 불만을 가질까봐 그랬을 것이다. 돈은 우리가 다 벌어다 주는데, 그 돈으로 엉뚱한 일이나 한다고 말 나오는 것은 싫으니까. 대기업의 성정(性情)은 이때나 그때나 다들 그렇다.

 

비트맵, 객체지향, 모델·뷰·컨트롤러, 위지위그(WYSIWYG) 등 현존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상징적 개념과 기술은 모두 다 개발해버렸지만, 결국은 모두 남 좋은 일만 시킨 제록스. 얄궂게도 여전히 그들의 핵심 역량 PARC는 제록스의 자회사로 남아서, 과거의 영화를 후광 삼아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다.

 

그건 그렇고, 삼성과 휴렛팩커드는 어떻게 되었을까? 제휴관계 동안 많이 배운 삼성은 직접 다 만들기 시작한다. 어느새 경쟁관계가 되어 버리니 동반관계는 자연스레 해산된다. (이름을 바꿔 한국 휴렛팩커드가 된 후 IMF 시기 삼성 몫 지분을 모두 사들여 100% 자회사화한다. 또 당시 폭락한 부동산값으로 여의도에 사옥을 구매하는 등 이별은 전화위복이었다) 그리고 2016년 휴렛팩커드는 삼성의 프린터 사업부를 인수해버린다. 어느새 모든 것이 있는 삼성에게 종이를 다루는 일 따위 이제 그저 과거의 골동품 같은 것이었다.

 

종이를 다루는 일. 지금 후지필름과 제록스는 몸집을 합쳐 그 일에 뛰어들고 있다. 

2018.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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