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가기 전에 디지털 대청소를

[테크]by 김국현

다사다난했던 올해도 흘러가고 있다. 별일 없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 어느 쪽이라도 세월의 흔적은 곳곳에 쌓인다. 한 해를 정리하려 할 때 어딘가 삶이 정리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면 일상에 지쳐 있다는 뜻일 수 있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 기준이 흔들리거나, 중요도를 분류하는 의사 결정 활동을 할 기력조차 없을 때 주변은 어지러워진다. 호더(hoarder)의 나락에 빠지는 함정이 지쳤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이 개운하지 못한 전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왜 어떤 물건을 쓰지 않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때로는 기록해 보면 좋다. 소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촉감과 같은 제품의 UI가 어색하다거나, 배색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등등 마음이 떠난 사물에 대해 왜 마음이 멀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정리해보는 일은 나의 취향을 가다듬는 일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세련된 안목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 나대로의 취향이 완성되면 앞으로 순간의 기분이나 마케팅에 휘둘려 물건을 들이는 일을 방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는 소비자를 위해 무언가를 생각해 내야 하는 일에 종사할 확률이 높은 모든 현대인에게는 좋은 직능 훈련 또한 될 수 있다. 


몇 년 전 인스타그램 등 SNS에 하루에 하나씩 버리기(비우기) 운동 또는 1일 1폐 운동이라 하여 그림이나 사진으로 일기 쓰듯 버림을 인증하는 일이 잠시나마 유행한 적이 있었다. 


폰으로 사진을 찍어 디지털화하면 물질을 박제하는 듯한 심리적 효과를 준다. 버리기 뭐하지만 그렇다고 쌓아둘 수는 없는 것들도 디지털화하고 감사의 마음을 기록해 둔다면 거리낌 없이 떠나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를 매일 꾸준히 반복한다면 어느덧 수행이 된다. 불교에서 청소를 주요한 수행의 하나로 보고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디지털 정보를 떠나보내기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후자를 떠나보내는 일은 청소의 기본이다. 우리가 늘 쓰는 컴퓨터 안에는 이 둘이 늘 뒤엉켜 있다. 컴퓨터를 사온 날에는 용량이 넉넉했는데 어느새 휴지통 비우느라 헉헉대곤 한다. 청소가 필요한 순간이다.


컴퓨터 안에서 중요한 정보란 내가 만들거나 내 손길이 닿은 정보뿐이다. 나머지는 그 정보의 주인이 관리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만든 정보만을 잘 보관하고 나머지는 주기적으로 쓸어 버리는 것이 좋다.


폰을 포함한 모든 컴퓨터는 공장 초기화만 하더라도 묵은 때가 벗겨져 한결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포장을 뜯던 그 날의 가벼움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청소가 바로 공장 초기화다. 중요한 정보만 따로 모아둔다면 컴퓨터의 이런 목욕 재개도 마음 편히 할 수 있다.


내가 만든 중요한 정보는 원드라이브나 구글드라이브의 무료 용량에 수납될 정도만 가지고 있도록 하자. (일러스트레이터나 유튜버 등 외장 하드 몇 개 정도를 끼고 살아야 하는 생활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예외적 상황. 일반인들은 대개 자신이 만든 정보만으로는 이 무료 용량을 채우기도 쉽지 않다.)


생산된 모든 정보는 클라우드에 동기화하자. 아니 아예 기본 폴더를 그곳으로 삼자. 그러면 공장 초기화는 물론 분실·고장과 같이 공허한 상실감을 느낀 후라도 원드라이브나 구글드라이브만 재설치하면 빠르게 원상 복귀할 수 있다. 단언컨대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의 클라우드가 여러분의 컴퓨터보다 안전하다. 게다가 파일의 이력 관리까지 해주니 실수로 덮어쓰는 일로부터도 소생할 수 있다.


이처럼 클라우드 폴더 이외의 모든 정보는 지금 이 순간 다 사라져도 좋은 것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수납함만 정리하면 되는 일이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우리가 언제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 그 이별은 대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갑자기 찾아온다. 내 클라우드 중 일부를 소중한 사람과의 공유 폴더로 설정해 두는 것도 좋다. 소중한 사람이 하드디스크를 뒤지는 걱정스러운 수고를 하지 않도록.

하드웨어도 떠나보내자

버리는 일이 쉬웠으면 그렇게 많은 정리 수납 책들이 서점에 쌓여있지 않았을 것이다. 소유물을 떠나보내는 일에는 심리적 장벽이 분명히 있다. 쓰면 좋을 것 같아도 지금 쓰고 있지 않은 물건은 앞으로도 쓰이지 않는다는 철칙은 인간의 심리와 맞지 않는다.


하드웨어도 마찬가지다. 그간 써왔던 폰들이 서랍 가득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앱 개발자라면 모르겠으나 옛날 폰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컴퓨터 박물관을 운영할 것이 아니라면 철 지난 제품은 그때그때 떠나 보내는 편이 좋다. 누구나 제각각의 사정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한 철 지난 제품도 운치 있게 사용해줄 이들이 전국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니 중고로 팔아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나 스스로 사용처를 찾아줘서 여생을 현역으로 뛰게 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예컨대 여러분의 차가 안드로이드 오토나 애플 카플레이를 지원하는 최신 기종이 아니라면 구형 폰에 티맵이나 카카오나비, 네이버 지도 등을 깔아 전용 네비 화면으로 활용해도 좋다. 시동을 걸면 알아서 켜지고, 여러분 주머니 속 폰과 블루투스 테더링으로 데이터를 자동으로 나눠쓰고, 알아서 내비 앱까지 띄워주게 할 수도 있다.


각종 케이블류 등 잡동사니도 당장 버릴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지퍼백에 종류를 나눠서 한곳에 모아둬야지 그렇지 않다면 뒤엉켜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사태가 펼쳐진다. 분류 시에 사진을 찍어 놓고, 그 사진들을 하나의 폴더에 넣어 놓으면 창고에 엉켜있는 박스를 뒤지지 않더라도 비교적 편리하게 내게 무엇이 있는지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조만간 USB-C로 통일이 되면 그간 모아뒀던 마이크로 USB나 미니 USB 케이블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다 버려도 아쉬워할 일은 별로 없을 테지만 우리 서랍 속에서 굴러다니는 케이블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그것이 무용지물이라도 손실은 회피하려는 인간의 본성은 거스르기 힘든가 보다.

[BOX] 디지털 청소를 위한 팁.

(버리기 전에) 버퍼를 두자

연옥(煉獄)이란 죽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 남은 죄를 씻기 위해 단련하는 곳을 말한다. 단호하게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 없다면 이 연옥에 해당하는 상자나 공간에 던져 놓고 일주일 정도의 기회를 주자.


컴퓨터 안에도 그런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좋다. 보통은 휴지통 폴더가 그 역할을 하지만 Temp나 Download 등 막 쓰는 폴더를 활용해도 좋다. 


(버리기 전에) 기록을 하자

버려지는 물건에는 이야기가 깃들어서 떨어지기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야기란 적절히 기록되지 못할 때 아쉬워 떠돌게 된다. 대개의 추억은 사진과 곁들인 감성만으로 충분히 재현될 수 있는바, 이야기를 분리해내 디지털로 기록하자. 블로그 포스팅이나 유튜브 영상으로 남으면 물건은 사라져도 이야기를 남길 수 있다.


어쩌면 모든 물건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주기 위한 거리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야기를 만들게 해줬으면 이제 떠나도 좋은 셈이다.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 이야기를 남기고.


(버리기 전에) 가상화를 하자

추억을 위해 추억이 쌓인 기기들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혼(魂)이 디지털화되어 더 신선한 육체에 깃들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거 8비트 컴퓨터도 최신 PC에서 에뮬레이터로 돌릴 수 있다.


그렇게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여러분이 직전에 쓰던 컴퓨터를 OS 그대로 통째로 VHD 파일로 탁본을 떠서 새 컴퓨터 안에서 Hyper-V로 돌릴 수 있다. 윈도 XP, 윈도 7 모두 지원이 끊겼어도 윈도10 안에서 여생을 마무리할 수 있다.


낡은 컴퓨터를 고철로 내놓기 전에 Disk2vhd로 파일 하나로 만들어 두면 언제든 떠나간 PC를 소생시킬 수 있다.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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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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