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USIM)은 이심(eSIM)의 꿈을 꾸는가

[테크]by 김국현
유심(USIM)은 이심(eSIM)의

유심은 계륵이다.

 

유심 덕에 폰과 통신 계약은 분리될 수 있다. 유심만 갈아 끼우면 그 폰이 내 폰이 된다. 다른 나라에 가서도 공항에서 유심만 갈아 끼우면 그 나라 폰이 된다.

하지만 폰을 바꿀 때마다 새로운 규격의 유심이 필요하다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8,800원을 내기도 하고, 이 비용 좀 아끼려 유심을 오려서 구겨 넣다가 폰의 유심 슬롯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유심슬롯은 폰에서 가장 약한 부분에 속한다. 벌레 다리처럼 얇은 금속이 유심의 금속 면에 닿아 정보를 읽는 구조이다 보니, 유심을 넣고 빼는 과정에서 파손되는 일이 허다하다. 특히 유심을 재단하거나, 작은 유심에 어댑터를 끼워서 쓰다가 이 봉변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 경우 금속 하나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귀찮은 납땜은 안 해주니, 기판 전체를 갈아야 하는 불쌍한 처지가 되곤 하기도 한다. 수많은 고장 중에서도 가장 허망한 축에 속하는 체험이다.

사실 유심은 제조사에게도 성가시다. 아이폰 X의 기판은 아이폰 8 플러스 대비 70%나 그 공간 소비가 줄어들었는데, 그 비결은 기판을 두 겹으로 만든 장인 정신에 있었다. 기판 용적이 줄어들수록 배터리 등 조금이라도 더 면적이 필요한 내장에게 양보할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그 아이폰 X조차도 피해가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유심 슬롯. 이미 가장 작은 유심인 나노 유심을 채택하고 있지만, 그 기판에 비해 유심 슬롯은 너무나도 거대해 보인다. 유심만 없었다면 CPU라도 하나 더 올릴법한 넓은 공간이 확보된다. 유심은 또 방수의 적이기도 하다. 방수에 신경 쓴 폰 들은 유심 트레이에도, 또 핀으로 누르는 구멍에도 고무 패킹을 둘러놨다. 그래도 어째 영 불안하다.

유심은 과연 필요한 것일까? 물론 예전에는 기기 등록 정보(IMEI)와 가입자 정보를 분리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통신사에 등록된 단말이 아니고서야 쓸 수 없었던 암흑시대가 유심만 갈아 끼우면 어떤 단말도 (그럭저럭) 쓸 수 있게 되면서 해방되었으니 그 공적은 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에 취해 본질적 부조리에 둔감해지기도 한 것이 바로 사람들이기도 하다. 2017년 현재 우리는 정말 유심을 살 필요가 있는지 스스로 묻지 않는다.

유심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똑같이 생긴 IC 신용카드는 카드사가 무료로 그것도 분실할 때마다 새로 주는데, 유심도 주지 말란 법은 없다. 또 통신사만이 독점적으로 판매하니 시장 경쟁에 의한 가격 인하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 결과 쓸모를 잃은 외국 동전처럼 서랍에 몇 개씩 묻혀 있는 집도 있다.

깔끔한 해법은 있다. 바로 단말 내장형 이심(eSIM, embedded SIM)이다. 이심이란 끼우는 심카드가 아닌 폰의 기판에 박힌 심을 말한다. 최신형 아이패드 프로나 애플 워치, 그리고 최신형 구글 픽셀이 이심을 탑재하고 있다. 물리적 유심의 단점은 모두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전화 한 통이나 온라인으로 복수의 통신회선에 필요에 따라 가입하고 탈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해외에서는 우리와 달리 심카드를 두 개씩 꼽을 수 있는 듀얼심이 유행이라 (갤럭시도 해외에서는 듀얼심 모델 절찬 판매 중) 필요에 따라 여러 통신사의 좋은 점만 취사선택하는 소비생활을 하고 있다. 이심의 세상이 되면 이런 일이 훨씬 편해진다.

그러나 변화는 좀처럼 쉽지 않다. 애플 워치 3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직은 이심이 보조 수단이다. 통신사들이 이에 찬동하여 지원해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애플이나 구글과 같이 통신사의 눈치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이들이 이런 실험을 하고 있을 뿐, 통신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제조사들은 그 동네 통신사의 눈치를 볼 뿐이다. 대개 유심이란 폰을 살 때 대리점에서 한 번 (유료로) 꼽아주면 두 번 다시 뽑아서는 안 될 그 무엇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심은 우리에게는 좋지만, 통신사 입장에서는 당장 별로 좋은 점이 없다. 유심의 잡수입도 사라지게 되고, 유심 설정이라는 역할을 창구를 통해 하는 전통이 지금의 대리점 유통 구조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오프라인 밖에서 벌어질 수 있다면 동네마다 있는 대리점의 의미는 급히 퇴색한다. 아직 모두 업을 흔들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다. 

혁신이란 기술의 발명에 더해 당면한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용기와 교섭력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완성되곤 한다. 이심이라는 유심의 혁신, 아직은 혁명전야다.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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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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