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의 철학을 잉태한 자연

[테크]by 김국현

IT의 철학을 잉태한 자연
노르웨이 왕국, 북해 유전에다가 노르웨이 고등어로 알려진 자원왕국. 게다가 2천km의 기나긴 국토마다 피오르(피요르드)가 만들어내는 대자연의 절경이 펼쳐진다. 피오르 해안선의 총 거리는 무려 2만km.


유전, 어업, 관광이라는 자연 유산이 준 3대 산업은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이 물질적 여유는 북유럽, 그중에서도 독특한 노르웨이 디자인으로 피어난다. 땅을 파는 똑같은 국책 산업을 해도 NTR(National Tourist Routes)처럼 전세계 여행가들의 마음을 흔드는 세계적인 명물이 나온다. 한국 정치가들의 포퓰리즘이 만들어낸 겉도는 인공적 디자인 감각과 비교하면 서글퍼지기까지 하는데, 대자연이 알려준 철학을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았겠냐 체념하면 또 다 이해가 된다.


동네는 부자인데 인구는 우리의 10분의 1이니, 말 그대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노르웨이가 우리를 부럽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배경이 가져다준 유산이 아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만든 유산들이다. 노르웨이 디자인은 시각적 설계가 다가 아니다. 사람이 대상물과 함께 영위하는 언어, 미디어, 브랜딩, 공간, 철학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래서인지 디지털이라는 낯선 대상이 처음 등장할 무렵, 그 미래를 디자인하는데 탁월한 성과를 남기고 만다.


1960년대 시뮬라(시뮬라 1과 시뮬라 67)라는 언어가 두 명의 노르웨이인 올요한 달(Ole-Johan Dahl)과 크리슨 니고(Kristen Nygaard)에 의해 만들어진다. 세계최초의 객체 지향 언어였다. 오브젝트(객체), 클래스(틀, 설계도), 상속(계승), 멀티스레딩 등 후세의 대다수 프로그래밍 언어가 의존하게 되는 큰 사상이 시뮬라와 함께 형성된다.


그 덕에 우리는 컴퓨터를 위해 순차적으로 코드와 데이터를 맞춰 넣던 코딩에서, 사무용 프로그램에서는 장표를 클래스로 만들고, 수학자라면 행열을 클래스로 만들고, 게임에서는 괴물을 클래스로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위대한 업적은 IT 업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튜링상과 IEEE 폰노이만 메달로 인정 받게 된다. 무려 35년 뒤인 2001년의 일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상을 받고 곧 나란히 타계하는데, 이들을 기리며 달-니고(Dahl-Nygaard)상이 만들어져 객체지향 학문에 기여한 두 명의 개인에게 매년 수여되고 있다. 작년 수상자는 시뮬라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C++의 아버지인 덴마크인 비야네 스트롭스트룹(Bjarne Stroustrup)이었으니, 스캔디나비안 학파의 전통은 그렇게 면면히 이어져 간다.


흥미로운 것은 올요한과 크리슨이 속해 있던 회사인 노르웨이 컴퓨팅 센터. 이름과는 달리 민간 비영리 기구인데, 무려 1952년에 설립되었다.


노르웨이발 IT 혁신은 이처럼 민간에서 피어났다. 시뮬라 67의 그 1967년. 노스크 데이터(Norsk Data)라는 컴퓨터 회사가 등장, 25년의 황금기를 시작한다. 80년대에는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회사로 등극하지만 90년대 초 결국 망하고 만다. PC 때문이었다. 세계최초의 32비트 컴퓨터를 만든 것도, 세계최초로 부동소수점 연산을 표준도입한 것도 이 노르웨이 컴퓨팅의 황금기였건만 지나간 시절이 아련하고 야속하다.


하지만 그 혁신의 유산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갔고, 고향 땅에도 씨앗을 내렸다. 크로스 플랫폼 GUI 프레임워크 Qt라든가, 대안 브라우저의 선두주자 오페라도 모두 이 유산의 후계자들이다. 2008년 1조 2천억 원에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된 검색엔진회사 FAST도 빠지면 섭섭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국민이 디지털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


DAB라는 디지털 오디오로 대체 하기 위해, 전국 FM 방송이 전파 송출을 정지하는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올해가 마지막이다. 노르웨이의 한 고등학교는 e스포츠를 선택 과목에 채택했다. 게임이 커뮤니케이션, 협조성, 전략능력, 인내심 등을 가르칠 수 있다고 평가한 것. 대안 학교가 아닌 일반 고교에서 게임을 가르친다니. IT 강국의 조건은 디지털을 향한 이와 같은 열린 마음이다. 노르웨이의 새 지폐는 8비트를 연상시키는 도트 그림이다.

IT의 철학을 잉태한 자연

참, 한국에는 튜링상 수상자가 아직 한 명도 없듯이, 안타깝게도 달-니고 상의 한국인 수상자도 한 명도 없다.

201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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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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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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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닷컴, 조선일보, 한겨레 등에 글을 연재중이며 '오프라인의 귀환' 등 유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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