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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쥐의 해가 동텄으니 이제 마우스의 이야기를 하자

by김국현

2020년 하얀 쥐의 해가 밝았다. 구찌가 미키마우스와 콜래보하는 등 사회 문화 산업 곳곳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쥐의 해를 환영하려 든다. 하지만 하얀 쥐 하면 떠오르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컴퓨터 마우스다.


개인적으로는 트랙패드가 더 편해서 마우스를 거의 쓰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예전 소싯적 쓰던 마우스에 대한 기억 한둘쯤은 있기도 한 일이다.


지금은 마우스를 집어 들면 벌겋고 퍼런빛이 (때로는 레이저가) 뿜어 나오지만, 예전에는 그곳에 공이 하나 들어 있었다. 손이 심심할 때면 그걸 괜스레 빼서 손가락 사이에 돌리며 놀곤 했다. 그 적절한 크기와 낯선 질감과 묵직한 무게는 지식인의 노리개가 되기에 충분했다.


원래 태초의 마우스에는 이 볼마저 들어 있지 않았다. 볼 대신 직각으로 배치된 두 개의 바퀴가 돌며 가로 세로의 움직임을 셈하는 방식이었는데, 직접 써보지는 못했지만 대각선이나 곡선을 그리며 움직일라치면 꽤 뻑뻑했을 것 같다. 물론 마우스 밑에 볼을 넣을 생각을 안 했을 리는 없는데, 그 이유는 볼 마우스를 뒤집은 형상의 트랙볼이 이미 마우스 이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마우스가 트랙볼보다 후발주자라니 어째 직관적이지 않다.


이처럼 가끔 역사의 타임라인은 포물선을 그리는 것 같은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마우스가 탄생하기 전 포인팅 디바이스의 대세는 바로 전자펜이었다. 지금이야 스타일러스가 애플 펜슬 등에 의해 겨우 시민권을 얻게 되었지만, 마우스가 고안된 이유가 바로 이 펜이 불편해서였다니 역사는 정점을 찍으면 역주행하곤 한다.

1968년의 겨울. 마우스가 첫선을 보인 모든 데모의 어머니

마우스가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8년 겨울이었다. 요즈음 개인적으로 레트로 문화에 빠져서 그런지 68년이라고 하면 그리 옛날이라 여겨지지 않는데 어느새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이라고 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인터넷도 PC도 아직 만들어지기 이전인 그 1968년이 저물 무렵. 한 젊은이가 긴장된 표정으로 샌프란시스코의 한 연단에서 데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데모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스탠포드 리서치 인스티튜트(현 SRI International)의 젊은 연구자였던 더글러스 엥겔바트. 오늘날의 발표회장에는 동네 구민회관이라도 빔프로젝터와 와이파이가 당연히 완비되어 있고, 시내로 나가면 때로는 무대 벽면 전체가 LED 스크린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심지어 프로젝터란 것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더글러스는 사람 크기만 한 프로젝터를 NASA에서 급히 빌려왔다. PC도 태어나기 이전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발표회장에서 남쪽으로 수십km 한참 더 내려가야 있던 실리콘밸리에 있던 주전산기를 써야만 했다. 모뎀으로 콘솔은 연결할 수 있었지만, 화면을 청중에게 보여줘야 했기에 모니터를 방송용 카메라로 찍어서 다시 전파로 전용 채널을 잡아 연결해야 했다. 듣기만 해도 쉽지 않은 일, 온갖 인맥과 자원이 총동원되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 그와 그의 팀에게는 있었다. 이 세상에는 직접 봐야만 하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데모란 미래를 맨눈으로 엿보게 하는 일. 혼자 목격한 미래를 함께 보도록 해 흥분을 대내외적으로 공유하는 일이다. 미래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바로 지금의 우리들이 어떻게 컴퓨터를 활용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해 강해지게 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데모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발표일이 다가왔다. 프로토타입을 급히 만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구두 발표만으로 때워 그냥 망칠 수도 없었다. 허락 없이 연구 자금마저 끌어쓴 마당이었다. 꼭 미래를 보여줘야만 했다.


1시간 40분의 무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버그’라고 불리던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가며 문장을 편집하고 재배열했다. (그가 처음 보여준 것은 일종의 워드프로세서였지만 세계최초의 워드프로세서로 기억되는 것은 그로부터 다시 10년 뒤에 출시된 1979년의 워드 스타였다)


간간이 들리는 청중의 웃음소리와 행여 데모가 실패할까 긴장된 화자의 목소리는 서스펜스 가득한 화음을 만들어내며 시간을 끌고 갔다. 이 데모 풍경은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테크 토크’, IT 데모의 모습 그대로다.


다행히 큰 삐걱댐 없이 무사히 끝이 났다. 워드프로세서는 물론 협업작업, 하이퍼링크, 화상통화까지 우리의 오늘이 그 안에 있었고, 그렇게 미래를 선보인 데모는 충격적이었다. 기립박수의 환호가 뒤따랐다.

후일 모든 데모의 어머니라 불리는 사건이 있던 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는 마우스와 키보드가 놓인 책상에 앉아서 데모를 진행했는데, 미래의 지식 노동자의 책상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했다. “매달려있는 전선 때문인지 모두들 미안하게도 이걸 마우스라 부른다”며 마우스를 부끄럽게 소개하기도 했다. 후일담이지만 처음에 하나의 버튼으로 시작한 이 마우스에 버튼을 다섯 개까지 넣어 봤다고 한다. 하지만 세 개 정도가 적당했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지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현대적 마우스에는 가운데 버튼이 휠 겸용으로 바뀌었지만)


그 후 마우스는 82년 로지텍이 그리고 83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시장에 참여하면서 양산 시장이 만들어졌고, 그 산업 지형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때의 명작이 아직도 그들에게 하드웨어 명가의 칭호를 주니 이 시장도 참이나 ‘고인 물’이다. 사람의 손이란 그리 변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로지텍은 감사의 마음이었는지 마우스의 창시자 더글러스에게 15년간이나 사무실을 제공했다. 하지만 사무실을 제공받아야 할 정도로 세속적 성공이 그에게는 찾아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50년간 크게 변한 것 없는 고인 물 마우스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혁신을 위한 노력은 해보려 애쓴 듯하다. 모니터처럼 해상도를 높여본 것이 일례다. 최신 게이밍 마우스는 16000 DPI 광학 센서를 탑재하고 있다. DPI란 인치당 도트수. 굳이 평이하게 번역해 보자면 1인치(2.54cm)를 이동했을 때 16,000 도트(픽셀)을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초고해상도라는 것. 그러나 게임할 때는 너무 민감해서 오히려 조준이 힘들어지니 아이러니하다. 대표적인 마케팅 인플레고 생각해 보면 일반인은 물론 게이머도 별 집착할 필요가 없는 수치다.


또 요즈음에는 번쩍번쩍 RGB LED를 단 것도 나오는데, 점잖은 어른의 책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면 기계식 스위치를 채용하여 5천만 번 클릭을 견디게 하고 키감을 좋게 한다고 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갖고 싶은 기능은 정음·정숙성 기능이다. 옆 사람의 부지런한 마우스 클릭 소리가 때로는 식후 식곤증이 초빙한 낮잠을 깨우기도 해서다.


쥐는 부지런한 동물, 올 한해도 마우스처럼 열심히 달려봅시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