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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소박하게 세계를 의존하게 하는 일에 관하여

IT 강국의 품격 대만편

by김국현

컴퓨터를 쓰는 우리 모두 대만에 의존하고 있지만, 대만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ASUS, ASRock, MSI, GIGABYTE 등 PC 부품을 골라 조립을 하거나 Synology 등 NAS 장비를 쓰는 컴퓨터 애호가는 아니더라도, 폭스콘(공장은 중국에 있지만 대만 기업)이 만든 아이폰이나 킨들은 쓰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도 TSMC를 벗어날 수는 없다. 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파운드리 세계 시장 점유율 50%의 TSMC는 최근 파운드리 사업으로 확장 중인 삼성전자도 따라 잡고 싶어하는 회사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대만 회사들은 이처럼 수줍은 듯 막후에서 암약 중이다.


대만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에서도 한국과 종종 비교되지만 서로 많이 다르다. 일단 대만은 화려하지 않다. 콘텐츠나 패션처럼 앞에 나서는 일 대신 세계로부터 하청받아 묵묵히 처리하는 국제 가공 기지의 역할에 충실히 집중한다. 대기업은 있지만, 한국과 같은 문어발 재벌도 없다. 모두 OEM에서 ODM, 그리고 독립으로 이어지는 성장 과정을 거쳐 각자의 업에서 커졌을 뿐, 한국 재벌처럼 정부의 비호와 원조를 통해 입지를 다지는 일은 없었다.


물론 달리 생각하면 국책으로 자본을 집중시켜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 준 것이 한국 대표 기업들의 성공 비결이었고, 이는 대만이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대만 정부는 고만고만한 기업들이 난립해 과당 경쟁하면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고 규모를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자국 기업이 잘 나가면 내가 거기서 녹을 먹고 있지 않아도 기분이 우쭐해지기도 한다. 개인을 조직에 속한 일원으로 여겨온 문화적 특성에서 자라왔으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거대 엔터프라이즈에 의한 자본의 집중 없이 주먹구구식이었다면, 한류나 삼성과 같은 세계적 성공이 있었겠느냐며 자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 조직의 일원이 아니고, 결국 고용을 흡수하고 신산업을 만드는 것은 중소기업이다. 국민경제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은 중소기업의 활력 여부지만 이를 잊곤 한다.


IMF 시절 한국형 재벌기업들이 차입으로 팽창했다가 직격탄을 입고 전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것에 비해 대만 기업들은 버텨낼 수 있었다. 오너쉽을 잃을 수 있는 경영 리스크가 뒤따르는 에쿼티 파이낸스에 인간관계에 의존한 전통적 자금 조달을 조합한 구조 덕이었다. 전자 부품 산업만 봐도 그룹 하에 도열하는 대신, 신뢰관계에 의해 이합집산을 하며 다른 중소기업들을 마치 계열사처럼 동원하는 상호보완적 분업체제가 성립되어 있다. 이 수평적 인적 네트워크는 세계로 커져 나간다. 예를 들자면 앞서 말한 TSMC의 주요 고객인 AMD나 엔비디아의 CEO들 모두 대만인들이다.


고도성장에는 두 가지 성공법이 있다. 복잡한 순환 출자로 일가족 오너의 광범위한 지배와 영향력을 허락했던 한국식 대기업 경제, 돈만 된다면야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망라적인 인적 교류를 감행하는 대만식 중소기업 경제. 최근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일본 여행의 대체재로 대만이 고려되듯이 대만은 중국보다는 일본의 분위기가 나는데, 대만도 똑같이 식민지였건만 반일 감정이 없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고도 성장기에 일본 상사를 통해 대만 중소기업이 일거리 공급을 받는 등 망라적 인적 네트워크가 기능하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그룹사가 없는 대만에서는 미국 소매업과 직거래를 하거나 일본 상사가 조달에서 마케팅까지 처리해줬다.)


올 초 대만 선거에서 최연소로 입법위원(국회의원)이 된 여성은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아스카를 분한 코스프레로 선거운동을 하면서 ‘AT필드(극중에서 등장하는 보호막)’로 대만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표를 얻기 위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원래부터 취미였다 하니, 자기검열 없는 자유로운 발상은 분명 새로운 세대에게 기회를 준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나의 일을 해야 한다. 라오반(老板)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독립 정신이다. 한국식으로 치자면 사장님인데, 우리도 ‘사장님' 많기로는 대만에 지지 않는다. 다만 '대만 카스테라' 열풍에서 볼 수 있듯이 나의 아이디어와 기량으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유행 따라 대거 급조된 프렌차이즈들에 의존하곤 한다. 조직에 속해서만 살아왔기에 회사를 떠났어도 또 다른 조직을 찾아 의존하려 드는 서글픈 습성은 우리 발목을 잡는다.


대만 중소기업의 경쟁력, 그 비결로 다산다사(多産多死)를 꼽곤 한다. 창업은 망하는 것이 당연한 것, 대신 그만큼 더 생기면 된다. 한국처럼 유명한 글로벌 브랜드는 없지만, 모두가 그 안전망에 편입하려 애쓰다 지치지도 않는다. 비교적 단순한 가공생산이라고 하더라도 나만의 일을 한다면 언젠가 누군가는 손을 잡고 끌어주리라는 낙관. 이런 꿈을 꾸게 하기에 중소기업은 사회 활력과 고용 창출의 원천이 된다. 겉보기에는 소박해 보여도 대만의 구매력환산 기준 1인당 GDP는 한국과 일본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