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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오래된 마을을 되살리는 사람들

by전원속의 내집

염색 공방이 된 주막, 웃-집

충남 부여, 조용한 마을 ‘규암’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잊혀져가던 도시를 되살리는 자온길 프로젝트, 그 첫 번째 이야기.


‘웃-집’ 전경과 세 주인공의 모습. 왼쪽부터 웃-집에 입주한 이진향 작가, 리노베이션을 진행한 스타시스 박현희 디자이너, 프로젝트를 기획·총괄한 ㈜세간 박경아 대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백제의 수도로 문화의 최전성기를 화려하게 누렸던 부여. 그안에서도 규암면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200가구가 넘는 대촌을 형성했던 수운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 역사와 명성이 무색하게도, 지금의 마을은 고요하다. 그저 묵묵히 흐르는 백마강처럼 풍경은 여전히 그때 그 시절에 머문 채, 골목골목 북적이던 사람들만 아스라이 사라졌다.


전면 통창으로 종일 환한 빛이 들어오는 쇼룸. 이진향 작가뿐 아니라 세간과 함께하는 여러 작가의 다양한 염색 공예품이 전시·판매된다.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전통미술공예를 학부, 석사까지 공부했으니, 이곳과 인연이 아주 없지는 않아요(웃음). 한창 민속조사를 하던 때, 목욕탕에서 서로 등 밀어주다 만난 할머니가 ‘우리 동네 놀러 와’ 그러셨는데 그곳이 바로 규암이었죠. 한옥, 적산가옥 등 유서 깊은 건축물을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이 마치 드라마 세트장 같았어요.”

규암면 수북로 거리 일원을 되살리는 ‘자온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이끈 주역은 예술그룹 ㈜세간의 박경아 대표. 서울 삼청동, 인사동 그리고 파주 헤이리 등에서 13년째 작가들과 전통 공예 살림살이를 선보이는 숍을 운영하고 있다. 자리를 잡을 만하면 급등한 임대료에 쫓겨나길 여러 번 겪고 지켜본 그녀는 작가들이 긴 시간 작업에 집중하고 대중과 꾸준히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오랜 소망이었다고. 그러다 기억 저편에서 규암 마을을 끄집어냈고, 뜻이 통하는 투자자들을 만나 가슴에 품었던 기획을 현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웃-집’의 후면은 집 위에 집을 얹은 디자인 콘셉트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밖에 있던 화장실을 안으로 들이고, 주방 겸 거실과 단차를 두어 염색 작업에 필요한 수도 시설을 마련했다. 옛 벽에서 밖으로 고개를 내민 구조목은 화분 걸이가 되었다. ©홍석규

뒤뜰의 감나무를 바라보며 벽에 기대어 선 박현희 디자이너. 낡고 오래된 기억을 꼭 살리고 싶었다는 그의 바람이 건물 곳곳에 담겨 있다.

박경아 대표는 가장 먼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근대 건축물들을 매입했다. 오일장과 상설시장이 열리는 번화가였던 터라 극장, 주막, 선술집, 요정, 담배 가게 등 저마다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어 재미난곳이 많았다. 그렇게 열여섯 채의 건물을 확보하는 데 2년 가까이 걸렸다. 지난 4월 문을 연 천연염색 공방 ‘웃-집’은 자온길 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처음에는 최대한 원형을 지켜 간단하게 리모델링하는 방향이었지만, 막상 철거작업에 들어가 보니 제멋대로 뻗은 벽체와 아슬아슬하게 지붕을 받치고 있는 구조재가 불안해 보였어요. 그런데, 이 모습이 오히려 감동적으로 다가왔죠.”


쇼룸에 진열된 옷을 정리하는 박경아 대표. 그녀가 입은 원피스도 천연염색으로 만든 것이다. / 웃-집 안쪽에는 2개의 방이 자리한다. 그중 가장 안쪽 방의 모습.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이 원단 수납장을 겸한다. ©홍석규

장이 섰던 넓은 공터를 앞에 둔 파란 슬레이트 지붕의 건물은 국밥을 팔던 평범한 주막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주거 공간으로 쓰이다 주인 없이 홀로 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 이곳이 웃-집의 모태가 되었다. 리노베이션 작업은 건축디자인 그룹 ‘스타시스’의 박현희 디자이너가 맡았다.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내고, 불안한 구조는 거의 신축에 가깝게 보강 공사했다.


BEFORE

대신 이 공간만의 이야기를 간직하기 위해 옛 흔적을 곳곳에 남겨두었다. 겹겹이 덧댄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벽, 연식이 묻어나는 두꺼비집, 한식 창호와 서까래까지. 허름해진 웃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며 박현희 디자이너는 ‘집 위에 집을 얹는다’는 의미를 담아 ‘웃-집’이란 이름을 붙였다.


쇼룸 공간으로 창이 난 이 방은 지금 이진향 작가가 개인 침실로 쓰고 있다. ©홍석규


고운 색감의 염색 공예품이 화사하게 생기를 더하는 쇼룸에는 기존 건물의 벽과 서까래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앞으로 웃-집에는 천연염색을 하는 이진향 작가가 머물며 공방 운영을 맡기로 했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부여로 내려온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번잡한 서울을 벗어나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작업하며 지낼 생각에 걱정보다는 설렘이 앞선다는 그녀. 비어 있던 웃-집의 볕 좋은 마당에는 이제 곱게 물들여 널어놓은 천이 바람에 나부낀다.

옛집의 흔적들. 세월이 겹겹이 묻어나는 벽은 박현희 디자이너가 일일이 헤라로 긁어낸 것으로, 마치 유화 같은 느낌도 든다.(아래 사진 ©홍석규)

자온길 프로젝트를 통해 올봄 문을 열 계획인 곳은 웃-집을 포함, 총 일곱 군데다. ‘임씨네 담배 가게’가 마당 있는 책방으로, ‘금강사진관’은 문화가 있는 특별한 사진관으로, 3층짜리 ‘성광해네 건물’은 목공방 및 스테이로 변신할 예정. 옛 동물병원은 규방 공예 공방이 될 준비 중이고, 요정이었던 수월옥과 바로 옆 주막집은 박현희 디자이너의 손을 통해 소곡주 전문점과 찻집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그 후에도 백년한옥과 양조장, 노인사랑방, 옛 우체국과 극장 등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박경아 대표는 가을까지 총 16채 건물의 재생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3년간 조금씩 추가 확장할 계획이라고 했다. 스러져가던 도시에 예술로 온기를 불어넣는 일.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자온길 프로젝트는 지금부터 진짜 시작이다.


취재협조_ 자온길 프로젝트 ‘웃-집’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수북로41번길 8

취재_ 조고은  |  사진_ 변종석, 홍석규

ⓒ 월간 전원속의 내집    2018년 5월호 / Vol.231  www.uuj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