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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마을에서 생존자가 단 한 명

by한겨레21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인 청와대 청원

마을에서 생존자가 단 한 명

대한민국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이 피해를 당한 베트남 꽝남성, 꽝응아이성 내 17개 마을의 위치다. 위령비·공동묘·가족묘 좌표 또는 위령비 주변 마을의 좌표를 지도에 표시했다. 한베평화재단 누리집(kovietpeace.org)에서 더 많은 장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1966~72년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파병된 전투부대인 청룡부대는 남쪽의 꽝응아이성에서 북쪽 꽝남성으로 이동하며 마을을 차례로 파괴했습니다. 베트남의 대동맥인 1번 국도 사수가 주요 임무였던 청룡부대는 남베트남인민해방전선 인민해방군(베트콩) 수색을 쉽게 하기 위한 ‘주민 소개’ 작전을 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한국군 파병기간(1964~73년)에 민간인 학살 피해자 9천 명 중 4천 명이 꽝남성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지난 20년간 <한겨레21>과 한베평화재단 등 시민사회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으로 한국 사회에 조금씩 알려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직접 한국 정부를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진상 규명과 공식 사과, 피해 회복 조처를 요구했습니다. 그 시작이 청와대 청원입니다. 17개 마을에서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자 103명이 청원서에 서명했습니다. 103개 청원서는 4월4일 이들 손으로 직접 청와대에 전달됩니다. <한겨레21>은 17개 마을에 살았던 17명의 청원서를 공개합니다. 그리고 103명의 얼굴을 모두 담았습니다. 청와대는 최대 150일 안에 청원인에게 대답을 줘야 합니다. 17개 마을에 살았던 17명의 청원서를 5개 기사로 각각 나눠 실었습니다.

군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꽝남성 탕빈현 빈즈엉사 5촌 마을(짜 할아버지 방공호 학살)

마을에서 생존자가 단 한 명

쩐티리(Trần Thị Lý)

  1. 생년: 1953년
  2. 피해 날짜: 1969년 11월12일(양력)
  3. 피해 내용: 오빠 쩐반전(당시 21살)과 함께 마을 밖으로 달아나는데 등 뒤에서 총과 수류탄 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우리 남매는 한국군이 마을로 몰려온다는 얘기를 듣고 도망치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16살이었습니다. 총성이 멎고 며칠 뒤 가족 생사를 확인하러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 레티더우, 여동생 쩐티떤(11살), 두 남동생인 쩐반떤(13살)과 쩐반응오아(약 4살)는 짜 할아버지네 집 방공호에 몸을 숨겼지만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뒤였습니다. 주검들은 누가 누구인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했습니다. 지독한 냄새가 났습니다. 방공호 밖에 주검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방공호 안에서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사람들이 흙으로 방공호를 덮어버렸습니다. 나는 방공호에서 마지막까지 버텼을 가족의 주검도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어머니와 세 동생을 잃고, 살아남은 우리 삼 남매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다낭을 거쳐 호이안으로 갔습니다. 군인들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았습니다. 남의 집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해주고 양식을 얻어 하루하루 겨우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늘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총성이 완전히 그친 뒤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콰이미 같은 구황작물도 심고 벼농사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학살로 마을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4. 한국에 바라는 것: 나는 늙고 병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인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나요?

마을에서 생존자가 단 한 명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호아사 라토 마을(라토 학살)

마을에서 생존자가 단 한 명

타이부이(Thái Vui)

  1. 생년: 1956년
  2. 피해 날짜: 1968년 1월18일(양력)
  3. 피해 내용: 나는 43명이 죽은 라토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그때 11살이었습니다. 그날 아침부터 포격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국군이 온다는 소문에 아버지(당시 33살)를 비롯한 성인 남성들은 모두 마을 밖으로 도망쳤어요. 내 가족을 포함해 9명 정도가 이웃집에 모여 있었는데 한국군이 유탄발사기를 쐈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귀에 작은 상처를 입었는데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봤습니다. 여동생 타이티뭉(7살), 남동생 타이바끄이(4살)는 죽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숨이 붙어 있었지만 피를 계속 흘렸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피투성이 어머니를 끌고 방공호로 내려왔습니다. 고통에 신음하던 어머니는 결국 숨을 거뒀습니다. 다음날 오후 길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이틀 뒤 인근 투이보 마을에서도 한국군의 학살이 있었습니다. 한국군이 집까지 불태워 고향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다낭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고생했지만 극심한 가난으로 계속 떠돌아야 했습니다. 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습니다. (고경태 <1968년 2월12일> 저자는 2017년 2월19일 베트남 현지에서 타이부이를 만났다. ‘43명 숨진 라토 학살, 나는 유일한 생존자’(<한겨레>4월8일치) 기사에서 “라토 학살은 퐁니·퐁넛 학살보다 이른 1968년 1월18일 일어났다. 라토 학살은 소문으로만 떠돌았는데, 생존자의 증언으로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밝혔다.)
  4. 한국에 바라는 것: 당시 마을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은 남은 가족 가운데 생존자가 하나도 없어 가족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학살 피해 조사도 어렵고, 아직 희생자 명단도 위령비도 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이 학살의 역사를 기록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비 건립을 지원해주길 바랍니다.

“한국 정부는 사과하기 바랍니다”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터사 투이보 마을(투이보 학살)

마을에서 생존자가 단 한 명

응우옌티땀(Nguyễn Thị Tam)

  1. 생년월일: 1930년 1월15일
  2. 피해 날짜: 1968년 1월19일(양력)
  3. 피해 내용: “VC(베트콩)냐.” 그날 아침 마을로 들이닥친 한국군은 이렇게 물은 뒤 사람들을 한 명씩 총으로 쐈습니다. 38살이던 나는 만삭의 임신부였습니다. 한국군이 땅에 엎드린 내 등을 밟고 지나갔을 뿐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머니 응우옌티뚝(당시 51살), 여동생 응우옌티미(6살), 세 명의 조카 레훙·레티호에(8살), 레티피(6살)는 숨이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딸 응우옌티후에(6살)는 살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손녀를 온몸으로 감싼 덕분에 목숨을 구한 거죠. 섣불리 움직였다가 총에 맞을까 두려워 숨죽인 채 계속 엎드려 있었습니다. 저녁에야 살아남은 주민들이 나를 발견했습니다. 당시 남편은 유격대원으로 마을을 떠나 있어 학살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희생자들 주검을 이고 지고 저 멀리 있는 ‘보보 초소’(미군 초소인지 남베트남 초소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까지 가서 항의했지만 결국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어디에 하소연할 데가 없어 더욱 힘들었습니다. 사흘 뒤 고모와 딸과 함께 다낭으로 피란 갔고 며칠 뒤 아들을 낳았습니다. (앞서 <한겨레21>은 투이보 마을을 찾아 제312호(2000년 6월) ‘땅굴의 악몽’을 지울 수 있을까’ 기사에서 학살 생존자 5명의 인터뷰를 전했다. 생존자들은 한국군이 마을 곳곳의 땅굴을 수색한 뒤 굴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차례대로 쏘았다고 증언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145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4. 한국에 바라는 것: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한국 정부의 사과를 받기 원합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나와 같은 피해 유가족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주기 바랍니다.

복수를 벼르다 18살에 자원입대했습니다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프억빈 마을(프억빈 학살)

마을에서 생존자가 단 한 명

응우옌응아(Nguyễn Nga)

  1. 생년: 1955년
  2. 피해 날짜: 1966년 11월9일(양력)
  3. 피해 내용: 마을에 한국군이 들어왔습니다. 집집이 수색하더니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죽였습니다. 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까스로 도망쳤습니다. 그때 11살이었습니다. 목숨을 구했지만 멀리서 한국군이 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친지를 죽이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어머니 호티뜨(당시 31살)는 막내를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까지 모두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날 가족과 친척 10명이 숨졌습니다. 어머니와 응우옌티호아(9살), 응우옌티륵(7살), 응우옌티러(5살) 등 여동생 3명, 그리고 할머니 쩐티레오까지 살육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한국군은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붙잡아 한곳에 모아놓고 죽였습니다. 큰 방공호에 주민들을 몰아넣은 뒤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학살했습니다. 끌려가던 노인이 더는 걷지 못하자 한국군은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우리 마을에 살던 팜티프엉은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에 오른쪽 다리와 왼쪽 눈을 잃었습니다. 왼쪽 팔다리도 다쳤습니다. 이날 희생된 주민은 모두 68명입니다. 이 가운데 47명이 여성과 아이였습니다. 학살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잃은 저는 전쟁고아가 됐습니다. 외할아버지를 따라 소 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겨우 목숨을 이어가며 힘겹게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죽음에 원한과 분노로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복수를 벼르다 18살에 자원입대했습니다.
  4. 한국에 바라는 것: 지금도 원한이 깊게 남아 있습니다. 최소한 한국 정부는 제 가족을 비롯해 많은 민간인을 죽인 일에 사과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족묘를 다시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줬으면 합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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