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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TV직시

온몸에 진흙 칠하고 버텨온 여성 희극인들

by한겨레21

못생겼다고 예쁘다고 비난받았지만… ‘남성’ 위주 판 바꾸는 여성 희극인들

한겨레21

KBS 에 출연한 개그우먼들. 이들은 여성에게 허용되는 웃음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시대를 바꾸고 있다. KBS 화면 갈무리

‘너구나?’ ‘미녀 개그우먼’ ‘비호감’. 6월18일 방송된 KBS <다큐 인사이트-개그우먼>(이하 <개그우먼>)은 여성 희극인을 옭아매온 대표적 열쇳말을 정확히 짚으며 시작된다. 2008년 KBS 23기 공채 개그맨으로 들어온 오나미는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해본 적 없지만 “이번엔 너구나?”라고 불리면서 얼굴로 웃기기 담당이 되었다. 얼굴로 웃긴다는 건, 대개 외모 비하를 당하거나 ‘주제 파악’ 못하는 캐릭터를 맡는다는 뜻이다.


“‘너 뭐야?’ 하면 제가 ‘난 여자다!’라고 하는 게 웃음 포인트고 관객도 빵빵 터지더라고요.” 2년 먼저 공채에 합격한 김지민은 ‘미녀 개그우먼’이라는 타이틀로 알려지며 신인상을 받고 인지도를 높였다. 그러나 얼굴로 웃기지 않는 여성 희극인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의미로 박했다. “개그우먼인데 왜 예쁜 척해?” “언제 웃길 거야?” 그가 악플에 시달리는 사이 ‘미녀 개그우먼’ 자리는 새로 나온 ‘미녀 개그우먼’으로 교체됐다. 김지민의 공채 동기이자 최연소 합격자(당시 22살)로 의욕이 넘쳤던 박나래는 ‘과하다’는 부정적 평가 속에 맡았던 캐릭터를 잃고 빛을 보지 못했다.

주된 배역에서 배제되고 보조자 역할

“‘뚱뚱한 여성, 못생긴 여성, 예쁜 여성’인 경우 웃음을 만들기 쉬워지거든요.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런 식의 기준이 있어서.” 박나래가 신인이던 시절 <개그 콘서트>의 조연출이었고, 올해 박나래가 진행을 맡은 <스탠드 업>을 연출한 김상미 피디(PD)는 공개 코미디에서 여성 캐릭터를 그려냈던 방식을 반성적으로 회고한다. “(여성이) 연기를 세게 하면 시청자가 비호감이라고 하니까 주된 역할을 하기보다 극의 진행을 돕는 역할을 주로 했다.” 김 피디의 회상은 2018년 MBC에서 방송된 여성 희극인 다큐멘터리 <언니는 살아 있다>에서 이국주가 했던 말과 연결된다. “‘비호감을 호감으로 바꾸는 걸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고민은 제가 제일 많이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개그맨이 되자마자 ‘너는 비호감이야’ ‘호감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해’라는 말을 피디님, 선배님들에게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예쁘지 않으면 우습게 취급하고, 예쁘면 능력 없다 여기고, 발 벗고 뛰면 부담스럽다 하고, 비호감이 될까 신경 쓰면 ‘여자라서 몸 사린다’고 비난하는 까다로운 잣대 사이에서도 여성 희극인들은 고군분투해왔다. “저는 반남자였던 것 같아요.” 남자들 틈에서 거의 언제나 혼자였던 데뷔 41년차 이성미는 말한다. “여자들은 몸을 사리지 않아요. ‘저렇게 해도 돼?’ 할 정도로 정말 벗고 뛰거든요.” 매니저에게 정글 가는 프로그램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가 “괜히 가셨다 잘못하면 돌아가세요”라는 말을 들었던 박미선은 데뷔 33년째인 올해 유튜브 <미선 임파서블>에서 실내 스카이다이빙과 서핑에 도전했다. 그는 여성 희극인에 대해 “우린 정말 온몸에 진흙칠을 하고도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28년 만에 받았던 ‘연예대상’

그럼에도 1990년 김미화가 KBS 코미디대상을 받았을 때부터 2018년 이영자가 KBS 연예대상을 받을 때까지 긴 시간 동안 영광의 자리는 남자만의 것이었다. 김상미 피디는 특히 “2000년대가 시작되고 (리얼) 버라이어티 장르가 유행하면서 자기 캐릭터가 보이는, 주어진 규칙을 어기는 강한 캐릭터가 더 요구받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규칙을 어기는, 강한 캐릭터는 여성에겐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고, 이는 당연히 여성에게 더 불리해진 판이었다.


‘남자끼리’ 짜는 판만 늘어나고 가족예능이 유행하자 송은이와 김숙 같은 비혼여성 희극인이 설 자리가 사라졌지만, 기혼여성 희극인이 방송에 출연하며 지는 심적 부담 또한 적지 않았다. 동료 희극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은 정경미는 “나가서 가족 얘기를 하면 누군가에게는 꼭 상처가 되더라”는 고민 끝에 김경아와 손잡고 아이 엄마들을 위한 공연 <투맘쇼>를 만들었다.


2015년, 여성 희극인이 설 자리가 거의 모두 사라졌을 때 돌파구를 찾은 것은 모두가 알다시피 KBS 공채 10기로 데뷔한 송은이다. “주말 저녁 6~8시에 예능을 해야 뭔가 1등 같고 메인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그는 어느 순간 그 시간대 방송을 할 수 없게 됐고, 아예 할 방송이 없게 된 시기를 거친 끝에 공채 12기 김숙과 함께 팟캐스트로 방향을 틀었다. 그 뒤 5년, 예능판의 흐름이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송은이가 꾸준히 여성 희극인을 모으고 호명하고 지원한 결과다. 이영자부터 안영미까지 여러 여성 희극인이 송은이의 기획과 함께 다시 빛을 발했고, 그가 운영하는 매니지먼트사 ‘미디어랩 시소’에는 신봉선과 김신영이 들어왔으며, 여성 대중을 중심으로 여성 희극인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팟캐스트·유튜브로 영역 확장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주말 저녁 예능’만이 1등이라고 할 수 없게 된 요즘, 유튜브에서 가장 사랑받는 희극인은 코미디TV <맛있는 녀석들>의 스핀오프(파생작) 웹예능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의 김민경이다. 2년 전만 해도 방송 일이 없던 홍현희 역시 그사이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JTBC <1호가 될 순 없어>의 결정적 재미는 희극인 부부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미선, 최양락 잡는 폭발적인 입담의 소유자 팽현숙, “(개그맨이 아니라) 저런 개그우먼을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는 장도연의 스튜디오 토크에서 나온다.


여전히 많은 기획이 ‘남자끼리’를 토대로 만들어지지만, (그리고 MBC <끼리끼리>처럼 뻔하게 실패하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여성 희극인들은 매 순간 자신들의 저력을 증명하려 최선을 다한다. <개그우먼>에서 김숙은 자신이나 박나래, 안영미 등 과감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여성 희극인에게 ‘시대를 잘 만났다’고 하는 세간의 말이 좋은 칭찬이라면서도 반문한다. “‘시대가 바뀌었다’가 아니라 시대를 바꾼 사람 아닐까요?” 그렇다. 여성에게 허용되는 웃음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그들은 지금도 시대를 바꾸고 있다.


최지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