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예술가와 장인들이 만든 공동체, 피스카스 마을
피스카스 마을 /flickr |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좀 떨어져 있는 피스카스 마을은 17세기에 세워진 곳으로, 오늘날 핀란드 예술과 디자인을 연구하는 예술가들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레스토랑이나 호텔뿐만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워크숍과 이벤트가 일년 내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관람객들은 피스카스 마을에 오면 오래된 목조 가옥들을 구경할 수 있으며, 도로 한 켠에는 공방과 예술가들을 위한 레지던스가 곳곳에 있다. 현재 피스카스 마을은 600여명의 주민 중 1/4이 디자인과 공예 쪽에서 일하고 있다.
전통의 보존에 예술가들의 열정이 한자리에
1915년의 피스카스 /flickr |
피스카스에서 만들었던 여러 공구들 /flickr |
오늘날 피스카스 마을은 핀란드 예술과 디자인의 중심이며, 100명이 넘는 장인들이 실제 살면서 일하는 곳이다. 피스카스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라고 하면 대장장이나 철을 들 수 있는데 피스카스 가위가 대표적인 물건으로, 피스카스 제철소는 1649년 네덜란드의 사업가인 피터 또르외스테가 설립했다. 그는 스웨덴 정부에서 이 지역에 제철소를 만드는 것을 허락받아 못, 수레바퀴용 부품, 망치 등을 만들었고 용광로와 자연적인 수력을 이용해 마을을 발전시켰다.
피스카스 강은 이 마을의 중요한 수로였고, 철공소에 전력을 공급하는 곳이기도 했다. 자연히 강둑을 따라 발전소 주변으로 마을이 생겼다. 오랜 시간 동안 제철소 주변에는 공방과 여러 가게들이 생겼고 오늘날 이 작업실들은 여러 예술가들의 아뜰리에와 스튜디오로 재탄생했다. 18세기까지 이 제철소는 여러 사업가들로 주인이 바뀌었고, 1822년 요한 줄린이 이 회사를 인수했다. 이 시기는 피스카스 마을의 전성기였고 중요한 시기기도 했다. 당시 줄린이 있을 시기 피스카스 마을의 인구가 두 배로 뛸 정도였다.
피스카스의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줄린은 제철소 마을 주변의 농업과 임업 또한 발전하게 만들었다. 그는 핀란드 최초의 단조, 기계 작업장을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피스카스 마을은 의료와 교육 쪽에서도 앞서갔고, 여러 비공식 협회들이 피스카스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스포츠나 음악, 봉사 등 다양한 여가 활동을 제공했다. 1853년 줄린이 세상을 떠났을 때 후견인들이 회사를 대신 운영했고 1883년 피스카스유한책임회사가 설립된다.
공예품 가게에서 볼 수 있는 기념품들 /flickr |
17세기까지 핀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철 생산 중심지로, 제철 산업으로 승승장구하던 피스카스 마을은 제2차세계대전과 석유파동 사건 이후 철강 산업이 무너지면서 마을 분위기도 점점 가라앉아 갔다. 빈 공장, 빈집들이 늘어나면서 피스카스 회사 대표인 잉코 린드베리는 마을을 되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가 생각한 건 비어버린 공장과 집을 활용해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헬싱키 크리에이티브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고, 스무 명 정도가 모이자 곧 아티스트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살아 있는 제철소 마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통 예술을 보존하고,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다시 마을이 번영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장소를 구상했다. 빈 건물들, 아름다운 주변 자연 경관은 그에겐 충분히 잠재력이 있었다. 이 아이디어는 먹혔고, 여러 분야의 예술가와 공예가들이 다시 마을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예술가의 피를 가진 사람들은 피스카스의 평화로움과 평온함에 이끌렸다. 린드베리는 건물 복원을 위해 주의를 기울였고 피스카스 마을을 개발하기 위한 장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약 100여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피스카스 마을로 이주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건물들은 옛 피스카스 제철소가 속속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남아 있던 것들이다. 주민들의 피스카스 마을 복원 프로젝트는 새로운 건물과 옛 건물의 조화를 만들면서 성공했다. 이후 1996년 공예가들과 예술가들이 모여 디자인 협동조합 '오노마 ONOMA'를 설립한다. 피스카스 마을의 장인,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협동조합인 오노마의 회원들은 모두 피스카스 마을에 거주하거나 근무 중이다.
여러 레지던스 /flickr |
작업자들을 위한 공간 /flickr |
오노마는 피스카스 마을에 전시회를 열어 매년 공예, 디자인, 미술 등을 선보인다. 공진원에 따르면 오노마에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있으며,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디자이너, 건축가, 음악가, 예술가, 큐레이터, 작가, 기자 등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고 한다. 매년 9월 전 세계의 지원자 중 12명을 가려 뽑으며 최종 선정된 사람에게는 일정 기간 피스카스 마을에서 머물 집과 작업실을 제공한다. 마을에 머무는 동안 이들에게는 작품을 전시하고 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 피스카스사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유는 국내외 여러 작가를 마을에 불러들여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즉 피스카스 마을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과 해외에 있는 예술가들간의 전문적인 교류와 네트워크를 활성화한다. 피스카스 마을은 연령과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장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곳이다. 공예가, 디자이너, 건축가, 큐레이터, 프로듀서, 연구원 등 모든 분야의 전문인들이 포함된다. 피스카스의 'Artist in Residence', 통칭 '피스카스 AiR'은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넓히고 지역 사회를 풍요롭게 만듦을 의미한다.
푸르른 자연, 평화로운 호수,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 피스카스의 자연 환경은 지역 예술가들과 방문 예술가들 모두에게 끝없는 영감의 원천을 제공한다. 일종의 이 공동체는 창의적이고, 호기심이 많고, 다문화적이며, 자유롭고 활동적이다. 레지던스는 1-2인, 또는 소규모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예술가들의 작업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지하실은 워크숍, 작가와의 토크, 비디오 상영, 전시회 같은 여러 이벤트로 활용되며 거주 기간 끝났을 시 자신들의 예술 작품을 기부할 수도 있다. 예술가들은 이 레지던스의 임대료를 내지 않아도 되며, 다만 거주 기간 동안에는 매월 관리비 정도를 내야 한다. 또 예술가들은 마을을 오가며 작업 재료를 포함한 기타 일상 물품들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피스카스 마을의 전시회 /flickr |
피스카스 제철소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했고, 오늘날의 제철소와 근방의 여러 공방, 가게들은 다양한 문화 관광지로써 그 마을의 전통을 존중하는 바람직한 방식으로 개발됐다. 오래된 공장 건물터에는 공방과 여러 건물들이 생기고, 예술가들이 이곳에 터를 잡아 모여 작업을 하는 곳이 됐다. 마을 전통의 예술, 디자인, 공예 외에도 피스카스는 여러 전시회와 박물관도 관람객들에게 제공한다.
작업중인 장인 /Fiskars Village 유튜브 |
도자기를 빚는 장인 /Fiskars Village 유튜브 |
피스카스 박물관은 마을의 오래된 역사에 대해 듣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투어를 제공하며 장인들이 전통 기술을 연습하고, 쇠를 두드리고, 대장장이로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투어도 있다고. 이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전통 문화의 결합은 피스카스 마을이 관람객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여름에 작업장에 가 장난감 병정을 만들어 보는 등 직접 체험도 가능하며 핀란드의 운동 기구 제작 업체인 랍셋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디자인한 어린이 놀이터도 있다.
시계탑 /flickr |
마을의 심장부인 시계탑은 1849년 지어진 것으로, 수공예품을 즐길 수 있는 카페 앤티크와 이딸라, 피스카스 등 핀란드의 유명 디자인 브랜드 상품들을 판매하는 피스카스 샵이 있다. 이 시계탑 반대편에는 예술가들의 협동조합인 오노마가 있다. 피스카스 강 옆 비포장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아그라스 양조장, 피스카스 양조장 등을 볼 수 있는데 거의 필수 코스다.
카린 비드내스가 만든 스튜디오 레지던스 /karinwidnas.fi |
핀란드의 세라믹 디자이너인 카린 비드내스는 헬싱키의 도시 생활에 지쳐 피스카스 마을로 이주했는데, 건물에 사용된 세라믹 자재들을 다 손수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건축한 100여평 규모의 스튜디오 레지던스는 약 10년이 걸렸고, 2006년 핀란드에서 '올해의 목조 건축물'로 선정되며 피스카스 빌리지의 명소가 됐다. 그는 1995년 자신이 피스카스 마을로 이사 왔을 때 마을이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3년 후 그는 국제 도자기 전시회를 추선했고, 많은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이 이곳으로 이사오게끔 만들었다. 그는 "세라믹 공예란 끊임없는 실험 작업이다. 세라믹은 재료와 과학에 대한 이해, 디자인, 실험, 열정과 육체적 노고를 모두 요한다"고 말했다. 예술과 그에 대한 열정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장소에를 만든 그의 아이디어는 2019년 헬싱키 디자인 위크 어워드에서 오디언스 초이스 어워드를 수상했다.
샵에서 판매중인 핀란드의 '이딸라' /flickr |
혹자는 피스카스 마을이 예술가들의 성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목표가 이윤이 아닌 공동체의 수립이라는 것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마을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것이라 말한다. 관광객을 굳이 데려오지 않아도, 수익을 필수로 얻는 게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 마을은 이들의 상상 이상으로도 잘 꾸려지고 있다.
영국의 산업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은 어떤 한 사회가 한번 거꾸러진 뒤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피스카스 마을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대부분의 관람객들과 마찬가지로 정기적으로 이 마을에 방문하면서 언젠가, 이 곳에서 사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한다고.
피스카스 박물관 /flickr |
2019년 피스카스 마을은 전세계 60여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1회 피스카스 빌리지 아트&디자인 비엔날레를 열었다. 2년마다 개최되는 이 비엔날레는 피스카스에서 국내외 유명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이다. 2022년 피스카스 빌리지 아트&디자인 비엔날레는 두 번째로 열릴 예정이며, 5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개최할 계획이다. 세 개의 주요 전시회를 비롯해 여러 콘텐츠 투어도 기획 중이라 밝혔다.
이 비엔날레의 목적은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기술과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관객들이 그들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대로 사라졌을지도 모를 빈 마을에서, 한때 융성했던 옛 기억과 함께 되살아난 전통이 현대의 예술가들과 융합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피스카스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