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꽃나무가 반겨주는 바다 위 비밀정원

수국이 만개한 쑥섬 해상정원, 길고양이 아파트가 있는 고양이 섬, 그리고 나무가 품은 고요한 정원까지. 고흥의 숨겨진 섬과 자연 속으로 떠나봅니다.

박미향의 미향취향

전남 고흥 섬·자연 여행

유인도 23개와 무인도 207개 

섬마다 개성 강한 매력 뽐내

황무지에서 일군 쑥섬 

해상정원 바다 메운 간척지 금세기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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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도 ‘금세기정원’ 여행은 운치 있다. 소나무숲, 장미꽃밭 등 비가 스민 자연이 여행객에게 고요를 선물한다. 박미향 기자

7년 전 은퇴한 김희찬(66)씨는 아내 정해련(62)씨와 2019년에 귀촌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한 귀촌에서 처음 한 일은 ‘가족 카드’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으며,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를 자세히 적어 마을 사람들에게 돌렸다. 흔히 말하는 ‘귀촌 텃세’가 겁나서는 아니었다. 


지역을 지켜내는 건 공동체고, 그 공동체에 편입하기 위해선 예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그는 지역민들과 화합하며 펜션 ‘숲속의바다’를 운영한다. 


그가 노년을 의탁할 곳으로 고른 데는 전라남도 고흥. 한반도 끝자락에 주걱 모양을 하고 붙어 있는 고흥. 한국판 나사(NASA·미국 항공우주국)인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데다. 국내 대표 ‘우주여행지’다. 


하지만 기실 이곳은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섬 여행 하기 좋은 곳이다. 반도와 유인도 23개, 무인도 207개로 구성된 고흥은 섬마다 개성 강한 매력을 뽐낸다. 여기에 고흥 사람들도 모르는 힙한 정원 ‘금세기정원’까지 더하면 ‘고흥 자연 여행’의 한 축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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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갠 맑은 날 쑥섬 ‘해상정원’에선 푸른 바다가 보인다. 흐린 날 바다는 탁한 회색이지만, 색다른 흥취를 전한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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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섬 여행지. 성기령 기자

질 좋은 쑥이 쑥쑥 자라 ‘쑥섬’

이맘때 고흥 섬 여행의 대표 주자는 봉래면에 속한 쑥섬이다. ‘쑥 애’(艾) 자를 써서 애도라고도 한다. 쑥이 많이 나서 쑥섬이 아니다. 질 좋은 쑥이 나서 쑥섬이다. 


해안선 길이 3.2㎞, 넓이 0.32㎢의 작은 섬, 쑥섬. 6월 쑥섬 ‘해상정원’(별정원, 달정원, 태양정원, 치유정원, 수국정원, 동백정원)에는 수국이 ‘겁나’ 많이 핀다. 해발 높이가 고작 83m인 정원. 알록달록한 수국이 시간을 움켜쥔 주먹 모양으로 무리 지어 핀다. 지난달 16일 이곳을 찾았다.


여행객을 맞을 솜사탕 같은 해풍과 ‘천국보다 아름다운’ 수국 생각에 설렜다. 남해고속도로 고흥나들목(IC)에서 차로 60여분 거리에 있는 나로도연안여객선터미널에선 배 2척이 하루 11차례 여행자를 쑥섬으로 실어 나른다. 뱃삯은 2천원(왕복). 섬 탐방료는 성인 6천원, 아이 3천원이다. 2분이면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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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쑥섬 ‘해상정원’은 수국으로 아름답다. 고흥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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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갠 맑은 날 쑥섬 ‘해상정원’에선 푸른 바다가 보인다. 흐린 날 바다는 탁한 회색이지만, 색다른 흥취를 전한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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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 주민들이 만든 길고양이 집들. 박미향 기자

배에 적힌 문장 ‘바다 위의 비밀정원 쑥섬 어서오시야~옹’에 웃음이 났다. 쑥섬은 일명 ‘고양이 섬’이다. 고양이가 많아서다. 길고양이 전용 ‘아파트’도 주민들이 지어놓았다. 이날은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을 실감하게 했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줄기는 어깨를 타고 허리로 흘렀다. 속살은 젖은 옷이 전하는 찬기에 파르르 떨었다.


해상정원으로 향하는 탐방로의 출발지는 ‘갈매기 카페’ 옆에 난 오르막길. 이 카페는 지붕을 새 머리로 장식해 그로테스크하다. 요즘 ‘촌티’는 가장 세련된 문화 코드다. 오르막을 지나자 숲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더는 비를 맞지 않았다. 


서로를 탐하며 얽혀 있는 숲의 주인 나무들이 비를 ‘방어’하고 있었다. 쑥섬을 흔히 ‘이색적인 섬’으로 정의하는 데는 이 숲의 공이 크다. 400년을 이어온 난대 원시림이다. 2017년 산림청이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했다. 


문화관광해설사 김선미씨는 “400년간 누구도 입도를 못 하게 했고, 개·닭·고양이도 안 키웠다. 섬을 신성한 곳이라고 여겨서다. 무덤도 없다. 하지만 쥐가 많아지면서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고양이 섬’이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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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 난대 원시림.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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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갠 맑은 날 쑥섬 ‘해상정원’에선 푸른 바다가 보인다. 흐린 날 바다는 탁한 회색이지만, 색다른 흥취를 전한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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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 ‘해상공원’. 박미향 기자

숲에 발 디딜수록 빛은 옅어졌다. 커다란 잎이 하늘을 가렸다. ‘나를 붙들고 사진을 찍은 사람은 하고 있는 일이나 꿈꾸는 일이 시원하게 잘될 거야.’ 푸조나무 아래 달린 팻말에 적힌 글에 또 한번 웃음이 났다. 


나무를 소재로 한 기복 신앙이 예부터 뿌리내린 것일까. 푸조나무뿐만이 아니다. 후박나무엔 ‘옥황상제 심부름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말이 있는데 이 말이 100만명이 행복 찾도록 도우면 하늘로 올라간다’란 문장이 적힌 판이 걸려있었다. 이 나무를 만난 건, ‘당신의 행운’이라는 소리다. 믿거나 말거나 할 말이지만, 그 나무들 모양을 탐구하는 일은 알찬 재미였다. 


김씨는 말했다. “이게 말머리 나무고 저건 ‘어머니 젖가슴’ 나무, 저건 코알라 나무인데, 코알라와 똑같죠.” 옹이나 가지, 몸통이 하나같이 그가 말한 대로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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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 난대 원시림에 있는 나무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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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 난대 원시림을 걷다 보면 특별한 ‘포토존’을 만난다. 최근 2030세대를 중심으로 인기다. 박미향 기자

61그루 동백나무가 심어진 터널을 지나자 ‘쑥섬 포토존’이 나타났다. 성인 한명이 간신히 지날 정도로 좁은 구멍이었다. 나무와 바위가 만든 구조물인 셈이다. 랜선 세상에서 추앙받는 ‘인생 컷’ 장소다. 


여길 통과하자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아늑한 공간이 나타났다. 비 뿌린 회색 구름이 점령한 바다지만, 위용만은 맑은 날과 다름없이 웅장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새는 바닷물을 먹이처럼 물고 와 던져줬다. 자연의 한줌이 가슴에 가닿았다. 별정원까지 400m 남은 위치.


‘환희의 언덕’을 지나자 드디어 나타난 별정원(코티지 정원). 이어 달정원(문학정원&인연정원), 태양정원(우돌프 스타일 정원), 치유정원, 수국정원, 동백정원도 모습을 드러냈다. 전남 1호 민간정원이다. 300여종의 꽃이 피고 진다. 탐방로까지 합쳐 4만9586㎡(1만5천평) 규모다.


쑥섬 해상정원은 위대하다. 풍광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화려한 꽃 때문도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면 세상이 미약하게나마 변할 수 있다는 진실을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봉래중학교 국어 교사였던 김상현(56)씨와 ‘건강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아내 고채훈(53)씨는 2000년에 빚을 내 황무지인 땅을 사들였다. 당시 부부는 새해에 ‘남은 인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을 각자 적었다. 


‘사회공헌’에 뜻이 모아졌다. 지역의 자연을 잘 보존하면서 발전에 기여할 일을 찾았다. 김씨의 외할머니가 살던 이 섬이 대상지가 됐다. 섬을 가꾸고 역사를 기록하는 게 자신들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은 사회적 책무가 있다. 사회에서 받은 게 많아 돌려줘야 한다”고 김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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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 ‘해상공원’ 풍경.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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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섬 ‘해상공원’에 핀 꽃. 박미향 기자

이 부부가 20여년간 가꾼 정원은 쑥쑥 자라 쑥섬을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씨는 “젠트리피케이션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했다. 그는 8년간 전국 관광농원 실태 조사, 마을 가꾸기 공부 등을 했다. 


주민들과 밀착 대화를 나누면서 공감대도 형성했다. 2016년 세상과 나누기 위해 개방했다. 당시는 구경 값을 양심껏 내라는 뜻의 ‘양심통’만 운영했다. 섬과 숲 여행자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쑥과 톳 등을 팔라고 권했다.


섬에 활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로컬 매장도 생겼다. 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가 탄생한 것이다. “배 운항이 늘면서 일자리도 생겼고, 고흥 전체에도 기여한 바 있어 보람 있었고, (나는) 적자지만 좌초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구조가 생겨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는 몇년 전 은퇴했다. 부부 중 한명은 정원의 도약을 위해 애써야 했다. “교직 생활 32년 했으니, (난) 됐고, 아내 약국은 지역에 중요한 거점이니 문을 닫을 순 없죠.” 후대에 오래 이어질 이야기가 가득한 섬은 궂은 날에도 오묘한 매력이 넘쳤다. 볼에 닿은 빗방울은 설탕처럼 달았고, 반려견 등처럼 보드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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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완공된 ‘우도 레인보우교’. 알록달록한 무지개색이 독특한 풍광을 연출한다. 박미향 기자

소머리 닮은 큰 돌 있어 ‘우도’

고흥 서쪽 남양면에 속하는 우도는 본래 ‘소섬’ ‘쇠섬’이라고 불렸다. 섬에 소머리처럼 생긴 큰 돌이 있어서다. 이 명칭이 한자로 바뀌면서 우도가 됐다. 대나무가 많아 임진왜란 때는 화살을 만들어 나라에 바친 섬이다. 0.626㎢ 넓이에 해안선 길이는 3.25㎞다. 섬 중앙엔 해발 107.6m의 봉들산이 있다.


지난달 15일 찾은 우도에선 지난해 완공된 ‘우도 레인보우교’(1.32㎞)가 반겼다. 너비 2m, 길이 1320m 규모로, 국내 최장 연륙 인도교다. 다리 건설 전 우도 사람들은 갯벌 위에 시멘트 상판으로 연결한 노둣길을 이용했다. 하루 두번 바닷길이 열릴 때만 이용할 수 있었으니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물이 차도 이젠 걱정이 없다. 이 노둣길은 차량 전용 도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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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완공된 ‘우도 레인보우교’. 알록달록한 무지개색이 독특한 풍광을 연출한다. 과거 노둣길은 차량 전용 도로가 됐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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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갯벌은 온통 흑백이다. 박미향 기자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자연의 보고 갯벌이 맨살을 드러냈다. 끝없이 펼쳐지는 갯벌에선 빗소리마저 묻혔다. 겨울이면 굴 캐는 아낙네의 일터가 되는 갯벌은 온통 흑백이다. 컬러 세상에 또 다른 고립을 상징한다. 


하지만 우도의 진짜 매력은 자박자박 걷는 데 있다. 섬 트레킹 명소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도 좋다. 우도마을과 우도 부속 무인도인 각호섬, 봉들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도 인기다. 산길과 물 빠진 갯벌 풍경을 동시에 만끽하는 코스다.


오리섬, 꼬리섬, 해섬 등 주변 부속 무인도는 섬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서 살필 수 있다. 궁극의 여행은 방식을 달리해 자연을 오롯이 느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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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도 연수해수욕장에 있는 소나무 세그루. 박미향 기자

일곱가지 둘레길이 조성된 거금도는 거금생태숲, 익금해수욕장, 김일기념체육관 등 볼거리가 넘친다. 심지어 바닷속에서 자라는 소나무 세그루를 볼 수 있는 연수해수욕장도 있다. 거금도 신양선착장에서 배로 5분 거리에 있는 연홍도는 예술 섬이다. 


2006년 폐교된 금산초교 연홍분교가 연홍미술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입소문이 났다. 2017년 전라남도와 고흥군이 주도한 ‘지붕 없는 미술관’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섬은 더 유명해졌다. 길 곳곳에 설치된 예술품을 보며 걷는 맛이 일품이다.


요즘 ‘정원 맛집’으로 부상하고 있는 금세기정원은 동강면에 있는 죽암농장 안에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은 나무를 벗 삼아 걷기 좋은 여행지다. 쑥섬 정원을 키운 부부 사연처럼 이곳에도 장대한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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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도 ‘금세기정원’ 여행은 운치 있다. 소나무숲, 장미꽃밭 등 비가 스민 자연이 여행객에게 고요를 선물한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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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도 ‘금세기정원’ 여행은 운치 있다. 소나무숲, 장미꽃밭 등 비가 스민 자연이 여행객에게 고요를 선물한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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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도 ‘금세기정원’ 여행은 운치 있다. 소나무숲, 장미꽃밭 등 비가 스민 자연이 여행객에게 고요를 선물한다. 박미향 기자

1960~70년대엔 바다를 메운 농지 조성 사업이 한창이었다. 죽암농장은 경남 마산에서 쌀장사를 했던 고 김세기 회장이 고흥 죽암지구 간척사업에 뛰어들어 맺은 결실이다. 포클레인 등 중장비도 없던 시절, 김 회장은 리어카로 돌을 나르고 물막이 공사를 했다. 간척사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신기술도 개발했다. 


이를 들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찾아와 김 회장의 노하우를 전수받아 충남 서산 간척지 개발에 이용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원은 축사를 가리기 위해서 조성되었으나, 30여년이 흐른 지금 고즈넉한 숲과 나무 여행지로 변모했다. 


전남 민간정원 4호다. 5만2892㎡(1만6천평) 규모의 정원엔 123종의 나무와 꽃이 사계절을 수놓는다. 메타세쿼이아길, 소나무숲, 장미꽃밭, 한반도 모양의 수변공원, ‘우석 김세기 기념관’ 등 볼거리가 넘친다.


섬은 고립과 단절의 상징이다. 하지만 단점이 오히려 시간의 힘을 얻어 둘도 없는 특별함을 장착했다. 이보다 더 고요한 여행지가 있을까.


고흥/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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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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