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단지 동화가 아니랍니다

어른이 되어 읽으면 더욱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오스카 와일드 동화 ‘행복한 왕자’에서 재발견한 자비의 본질과 전염성

그늘진 ‘자비의 사각지대’에도 언어의 햇빛을 비추는 게 문학의 역할

한겨레

오스카 와일드가 1888년에 쓴 동화 <행복한 왕자>에 들어간 월터 크레인(Walter Crane)의 삽화.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힘은 무엇일까. 그 힘을 이 세상 수많은 단어들 중에서 고르라면, 나는 자비(慈悲)를 선택하고 싶다. 자비의 핵심은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강렬한 의지다.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타인의 아픔에 마음의 안테나를 드리우고, 마침내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며, 서로 아무 상관없어 보이던 우리가 처음부터 불가해한 인연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 인간은 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도, 심지어 자신에게 해가 될 때조차도,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일까. 자비는 뜻밖의 장소에서 기적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아무리 간절히 필요한 순간에도 전혀 주어지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비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깊은 슬픔과 함께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마치 자비라는 단어에는 감정의 양극단을 동시에 자극하는 스위치가 장착된 것 같다. 자비는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적임과 동시에 여전히 이 세상에서 가장 부족한 가치처럼 느껴졌다.

‘자비의 네트워크’로 묶이는 순간

내가 자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문학작품을 통해서다. 자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야기는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다. 행복한 왕자를 예쁘장한 미담이나 동화 속 판타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동화야말로 훌륭한 문학작품들의 무한한 보물창고다. 왕자는 살아 있을 때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기에 세상의 고통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이제 왕자가 죽어 동상으로 만들어져 온 세상을 굽어보게 되니, 비로소 고통받는 타인들의 일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행복한 왕자의 동상은 처음에는 그 화려함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금박으로 입혀진 번쩍번쩍한 피부,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눈동자, 루비가 박힌 멋진 칼까지. 따스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던 제비 한 마리가 왕자의 동상에 걸터앉았다가 문득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발견한다. 왜 울고 있냐는 제비의 질문에 왕자는 대답한다. 인간으로 살아갈 때는 눈물이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행복하게 살았다고. 슬픔이라고는 스며들 틈이 없는 화려한 상수시 궁전에 살았기에. 그 화려한 세상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왕자가 죽자 사람들은 커다란 동상을 만들었는데, 동상이 세워진 곳은 바로 이 도시의 온갖 추악함과 비참함이 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제야 왕궁 너머의 세상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져 있는지 깨달은 왕자는 심장이 납으로 되어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왕자는 제비에게 자신의 손과 발과 날개가 되어주기를 부탁한다. 배고픈 아이에게 강물밖에는 먹일 것이 없는 가여운 엄마에게 자신의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선물해달라고. 제비는 왕자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져 부탁을 들어준다. 따뜻한 나라 이집트로 날아가려 했던 제비는 동료들로부터 뒤처져서, 떠날 때를 놓쳐버린다. 제비는 왕자의 간절한 부탁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약해진다. “제비야, 제비야, 작은 제비야, 하룻밤만 내 곁에 머물면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니?” “아이는 너무도 목말라하고, 엄마는 너무도 슬퍼하고 있구나.” 이런 문장을 읽을 때면, 왕자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귀를 간질이는 것 같다. 이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이 제비의 발목을 잡는다. 제비는 추위도 다급함도 제 목숨의 소중함도 잊어버린 채, 어제까지는 전혀 자신과 상관없었던 타인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정작 자신은 점점 쇠약해진다. 제비가 타인을 향한 난데없는 사랑의 기쁨을 깨닫는 장면은 언제 다시 읽어도 뭉클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날씨는 이렇게 추운데 왜 나는 이토록 따뜻한 느낌이 들까요.” 왕자는 다정하게 속삭인다. “그건 네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이야.”


왕자가 구해주고 싶은 또 하나의 비참한 존재는 가난한 예술가였다. 벽난로에 땔 장작도 없고 너무 배가 고파 글을 쓰지 못하는 극작가를 위해 왕자는 자신의 눈을 뽑아주라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내 눈뿐이구나. 내 눈은 천년 전 인도에서 가져온 진귀한 사파이어로 만들어졌단다. 내 눈을 뽑아서 그에게 가져다주렴.” 더없이 명랑하던 제비는 자신의 눈을 빼서 가난한 예술가를 살리려는 왕자의 마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왕자는 자꾸만 명랑하기 이를 데 없던 제비를 기어이 울린다. 납으로 만든 심장을 지닌 왕자는 가난한 자들의 비참에 눈물짓고,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가던 제비는 가던 길을 잊고 왕자의 꿈을 이뤄주며 눈물 흘린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자신의 눈을 파내야만 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기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행복한 왕자의 슬픔을 제비가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여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순간, 우리는 자비의 네트워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상의 모든 슬픔에는 사각지대가 있다

한겨레

오스카 와일드의 1882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마침내 성냥팔이 소녀에게 반대쪽 눈에 박힌 사파이어마저 빼준 왕자는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자비를 실천하던 행복한 왕자는 이제 자비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엾은 존재로 변신한 것이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왕자가 비참한 이들을 바라보던 그 따스한 눈으로, 제비가 왕자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왕자님은 이제 장님이 되었군요. 그러니 제가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남아 있을 거예요.” 제비의 사랑은 2차적 자비이며, 파생된 자비다. 사랑을 베푸는 자로부터 배운 사랑이다. 그런데 그 타인으로부터 배운 2차적 사랑이 원래의 사랑보다 더 커져버린다. 제비는 갈대의 아름다운 춤에 빠져 갈대를 느닷없이 사랑하는 탐미주의자였지만, 이제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왕자를 향한 사랑에 빠져 그 곁을 끝까지 지켜준다. 이제 왕자의 눈물이 제비의 눈물이며, 왕자의 삶과 죽음이 곧 제비의 삶과 죽음이다. 행복한 왕자와 다정한 제비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삶과 죽음에 깊이 연루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자비의 결정적인 본성이다. 난데없는 타인을 내 삶에 연루시키는 것. 자비는 우리를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시킨다. 자비는 우리를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한 따스한 존재로 변모시키고, 예전에는 시도조차 안 한 낯선 행동으로 이끈다.


이제 더 이상 남에게 줄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왕자는 제비에게 속삭인다. “내 온몸은 순금으로 덮여 있잖아.” 왕자의 피부에 덧붙여진 순금을 한 조각씩 떼어다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제비는 배고픔과 추위에 떨지만, 제비의 몸짓에는 어떤 위엄과 기품마저 느껴진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왕자의 자비는 멈추지 않는다. 이 자비는 처음의 자비를 뛰어넘는다. 자비를 가르쳐준 존재와 자비를 배운 존재의 완벽한 하모니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보다 더 큰 사랑이, 처음보다 더 깊고 처절한 사랑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준다. 이제 ‘왕자와 제비’는 마치 한몸처럼, 하나의 거대한 사랑을 실현한다.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입을 맞추고, 그 발치에 떨어져 죽는다. 바로 그때, 동상의 안쪽에서 무언가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난다. 납으로 된 왕자의 심장이 둘로 쪼개져버린 것이다.


<행복한 왕자>에서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장면은 제비가 죽고 나서 왕자의 심장, 납으로 만들어져 절대 뛰지 않으리라 짐작했던 바로 그 왕자의 심장이 둘로 쪼개지는 장면이다. 왕자는 가장 가까운 곳에는 오히려 다다르지 못하는 ‘자비의 사각지대’를 생각하게 한다. 남을 도와주느라 가족과 멀어지는 사람도 있고, 타인에게는 간도 쓸개도 내어줄 듯 다정하던 사람이 정작 가족으로부터는 사랑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처럼. 세상 누구보다 따스하고 다정한 왕자의 손길로도 결코 만져주지 못하는 아픔이 있으며, 아무리 보살피고 또 보살펴도 미처 보이지 않는 타인의 슬픔이 있다. 지상의 모든 슬픔에는 사각지대가 있다. 네모난 그릇의 모서리 부분을 닦기가 가장 어려운 것처럼, 아무리 꼼꼼히 세척해도 결코 닦이지 않는 눈물이 있다. ‘문학한다’는 것은 바로 그 슬픔의 사각지대를 끝까지 발굴해내어 모두가 볼 수 있는 언어의 햇빛이 쏟아지는 세상으로 데려와 주는 일이다. 아직 미처 보살피지 못한 슬픔의 사각지대가 남아 있는 한, 작가는 결코 목마른 창작의 붓질을 멈출 수가 없다. 자비는 행복한 왕자에게서 제비에게로 아름답게 전염되며 그 어떤 치료약도 없는 아름다운 질병이 된다. 결코 낫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마음의 질병, 자비. 그것이 문학이 내게 가르쳐준 자비의 본질이다.


정여울 작가

2020.05.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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