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수컷의 정자 만드는 ‘대리부’가 등장했다

유전자가위로 고환에 다른 수컷 정자 줄기세포 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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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컷의 정자를 만드는 대리부 황소. 워싱턴주립대 제공

좀 더 나은 육종 방식의 개발인가, 생명윤리에 어긋나는 또 다른 유전자변형 기술인가?


생각해야 할 거리를 던져주는 새로운 생명과학 기술이 등장했다. 유전자편집을 이용해 다른 수컷의 정자를 생산하는 기술이다. 미국 워싱턴주립대 수의대 존 오틀리 교수가 이끄는 미-영 공동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유전자가 아닌 다른 수컷의 유전자를 가진 정자를 생산하는 동물을 만들었다. 대리모가 타인의 유전자가 자라는 자궁을 빌려주는 것이라면, 이 기술은 타인의 정자를 생산하는 고환을 빌려준다는 점에서 ‘대리부’ 기술이라고 부를 만하다.


현재 소싸움이나 경주에서 우승한 황소나 말의 후손을 번식시키려면 비싼값을 치르고 교배시키거나 정액을 받아 인공수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 개발된 대리부 기술을 이용하면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우수한 형질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수컷의 정자를 저렴한 비용으로 손쉽게 번식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과학자들은 6년 간의 연구개발 끝에 크리스퍼-카스9이라는 유전자가위를 이용해 수컷의 번식을 관장하는 유전자(NANOS2)가 작동하지 않는 생쥐, 돼지, 염소와 소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크리스퍼-카스9은 DNA에서 원하는 부위를 잘라내고 이어붙이는 역할을 하는 효소와 단백질로 이뤄진 유전자 가위다. 크리스퍼는 표적으로 삼은 유전자 부위로 안내해주는 물질이고, 카스9은 이를 절단하는 분해 효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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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부 염소.

우수 형질 가축 보급이나 멸종위기종 복원에 이용 가능


연구진은 우선 이 가위를 이용해 정자를 만들지 못하는 불임 수컷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다른 수컷의 정자 생산 줄기세포를 이 불임 수컷의 고환에 이식했다. 그러면 이 수컷들은 다른 수컷의 유전자 정보만을 가진 정자를 생산하게 된다. 연구진은 대리부 기술을 이용해 짝짓기한 생쥐한테서 다른 수컷 생쥐의 유전자를 가진 2세가 태어난 것을 확인했다. 대형 동물한테서는 아직 2세까지는 나오지 않은 상태이지만, 이 기술이 축산업에 적용될 경우 우수한 유전자 특성이 자연스러운 교배 방식에 의해서도 널리 퍼질 수 있게 된다.


연구진은 이 기술을 이용하면 더 좋은 고기를 더 많이 생산하거나 질병에도 강하고 더위에도 잘 견디는 가축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환경과 건강에 부담을 주는 물과 사료, 항생제 투여량을 줄여주는 효과도 있다. 또 멸종위기종의 번식을 돕고 근친 교배로 인한 악영향을 막는 데도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연구진의 일원인 유타주립대 이리나 폴레재바 교수는 "이 기술은 우수한 형질의 가축을 보급하기 위해 선택적 교배 기술에만 의존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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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부 기술 연구를 이끈 존 오틀리 교수.

생명윤리 논란…현재 규정상으론 축산업 적용 어려워


대리부 기술이 앞으로 넘어야 할 벽은 기술 자체보다는 유전자조작과 관련한 규정과 윤리 문제다.


연구진은 보도자료를 통해 "상용화할 수 있는 단계까지 기술이 충분히 개발돼도 대리부 기술은 현재의 세계 규정 아래서는 유전자편집 기술이 직접 적용되지 않은 새끼의 경우에도 식품공급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게 돼 있다"며 현재의 규제 법규와 대중의 인식이 바뀌지 않고서는 대리부 기술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틀리 교수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가축의 유전자편집에 관한 국가태스크포스'에 최근 참여했다. 현재 유럽연합의 경우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 편집은 유전자변형 유기체(GMO)를 규제하는 엄격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유전자편집도 유전자 변형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는 1996년 세계 최초의 체세포 복제동물인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 로슬린연구소도 함께했다. 이번 연구는 15일 국제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렸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2020.09.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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