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하나의 ‘호텔’이 되다…30년 전 하숙마을 공주의 변신
‘머무는 관광’ 마을을 살린다
공주 봉황동 ‘마을 호텔’의 기적
과거 하숙마을이었던 봉황동
민박·식당·카페 등 연결 서비스
옛골목 벽화...‘작은 재미’ 제공도
“매출 20% 올라 지역활기 기대”
충남 공주시 봉황동 구도심에 있는 한옥을 리모델링해 관광객 숙소로 운영하는 권오상씨가 지난달 12일 오후 투숙객들을 상대로 마을 주변을 둘러보며 설명해주고 있다. 공주/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직장인 박은영(35)씨는 지난달 12일 또래 여성 9명과 충남 공주시 구도심인 봉황동에서 여행을 즐겼다. 호텔에 머물면서 이름난 관광지를 서둘러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이른바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밥을 먹는 그런 여행이 아니었다. 한옥을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며 오래된 동네를 찬찬히 돌아보고 끼니는 숙소 근처 마을 식당에서 해결하는, 평범하지만 어쩌면 색다른 여행이었다.
박씨는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숙소 주인의 설명을 들으며 마을을 둘러본 시간을 꼽았다. 마을의 오래된 사진관 앞을 거닐며 옛날 사진들을 구경하고, 마을 찻집에서 다도 강의를 들은 것도 좋았다고 했다. 이 마을에는 고서점과 골동품 가게도 있어 이제는 출판되지 않는 옛 책이나 오래된 물건들을 살 수도 있다. “시끌벅적하지 않은 조용한 마을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처형한 곳도 있었고, 담벼락 벽화가 예뻐서 사진을 찍게 되는 집도 있더라고요. 그런 작은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여행이었어요.” 박씨가 말했다. 그는 친구들과 이른바 ‘호캉스’(호텔에서 즐기는 바캉스)도 가봤지만 기억에 남는 여행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잠자고 호텔조식을 먹고 특별할 게 없었어요.”
봉황동 일대는 2층짜리 건물이 전부인 오래된 주택가다.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공주사대부고), 공주교육대(공주교대), 공주고, 공주여고 등이 자리해 1970년대 충청권에서 공주로 유학 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하숙집이 많았다. 하지만 학교에 기숙사가 생기며 하숙 문화가 침체하자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이에 공주시는 2014년부터 구도심 활성화를 위해 도시재생사업인 역사문화보존사업을 벌였다. 작은 하천인 제민천을 가꾸고 일제강점기 가옥을 리모델링해 나태주 시인의 작품을 전시하는 풀꽃문학관을 만들었다. 1930년대 지어진 교회 건물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공주기독교박물관도 생겼다. 하지만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마을에서 25년 동안 살았다는 주민 정재옥(75)씨는 “예전엔 이 동네로 유학 오는 학생들이 많아 집집이 하숙을 치며 경제적으로 풍족했는데, 최근엔 하숙생이 없으니 상권이 죽고 주민들도 많이 이사를 갔다. 빈집도 많아지고 노인네들만 남았다”고 말했다.
마을, 하나의 ‘호텔’이 되다
충남 공주시 봉황동 구도심에 있는 한옥을 리모델링해 관광객 숙소로 운영하는 권오상씨가 지난달 12일 오후 투숙객을 상대로 마을 주변을 둘러보며 설명해주고 있다. 공주/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지방정부의 노력에도 도심이 비어가자 주민들이 나섰다. 관광객과 마을 주민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는 젊은 자영업자들이 주축이 됐다. 1960년대 지어진 한옥을 사들여 리모델링한 뒤 지난해 게스트하우스(공유숙박업 에어비앤비)를 차린 권오상(43)씨는 관광객과 마을 자영업자가 상생할 수 있는 ‘마을 호텔’(커뮤니티 호텔)을 기획했다. 동네에 있는 민박, 식당, 카페, 사진관, 갤러리 등을 조직해 마을이 마치 호텔처럼 관광객에게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권씨의 민박집은 호텔 객실이 되고 이웃 식당은 호텔 레스토랑, 이웃 카페는 호텔 커피숍이 되는 식이다.
마을 호텔은 주민들의 인식도 바꿔놓았다. 20여년 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장사를 한 허현주(55)씨는 “우리 식당은 이제 나 혼자만의 가게가 아니다. 마을이 관광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가운데 나는 두부요리 담당”이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이 연대하자 조금씩 마을을 찾는 이가 늘기 시작했고 이는 매출로도 이어졌다. 허씨는 “마을 호텔을 하기 전과 견줘 매출이 20%가량 올랐다”고 말했다.
봉황동 자영업자 10여명은 2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모여 머리를 맞댄다. 이곳에서 초밥집을 운영하는 최재용(38)씨는 “함께 도시재생에 대해 공부하고, 다른 지역 사례도 나눈다”며 “이 모임의 세를 키워 올해 안에 ‘마을호텔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들어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허씨도 “마을 협의체가 만들어져 손님들에게 숙소, 식당, 카페 등 마을 서비스를 한번에 즐길 수 있는 1박2일 티켓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고 아이디어를 냈다.
체류는 곧 소비, 생기 도는 마을
그래픽/이임정 |
봉황동 주민들의 이런 움직임은 정부 지원에만 의존하는 사업이 아니라 스스로 형성된 연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권오상씨는 “외지인과 현지인, 다른 업종 상인들 사이에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부조가 되는 것이 의미 깊다”고 말했다.
마을 호텔을 통해 공주 구도심 주민들이 기대하는 것은 지역이 활력을 찾는 일이다. 저출산·고령화와 인구 유출 등으로 ‘지방 소멸 위기론’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외부인이 마을을 찾는다면 인구 유입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공주 반죽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황순형(29)씨는 “우리가 바라는 건 마을 호텔로 대단한 매출을 올리자는 것이 아니다. 공주 구도심을 찾는 사람이 꾸준히 늘어 지역에 활기가 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선 이미 자리잡은 마을 호텔
충남 공주시 봉황동 구도심에 있는 한옥을 리모델링해 관광객 숙소로 운영하는 권오상씨가 지난달 12일 오후 투숙객들을 상대로 마을 주변을 둘러보며 설명해주고 있다. 공주/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일본에서는 마을 전체가 하나로 조직돼 관광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마을 호텔이 몇몇 도시를 중심으로 보편화돼 있다. 일본 교토 인근 이시카와현 와지마시 미이지구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호텔이 된 대표적 사례다. 다다미방이 있는 150년 된 억새지붕 집은 관광객들의 숙소가 되고, 지역민들이 재배한 식재료로 만든 요릿집은 호텔 식당이 된다. 이 호텔 마을에선 한지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 마을이 직접 재배한 허브 오일 마사지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마을 호텔을 잘 둘러보게 자전거 대여 시스템도 마련해놓았다. 이 마을 호텔은 한달에 관광객 1천여명이 찾아 아베 정부가 추진한 체류형 ‘농박’(농촌민박)의 모범사례로 떠올랐다.
도쿄 야나카 지역의 하나레는 2015년에 문을 연 마을 호텔이다. 낡은 목조 다세대주택인 ‘하기소’에서 도쿄예대 건축학과 학생들이 작업하고 전시회를 연 것이 마을 호텔의 시발점이 됐다. 학생들의 전시회를 보러 오는 관람객이 늘자 하기소는 점차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자리잡았다. 하기소 근처 숙소에서 묵고 골목 어귀 가게에서 기념품을 사고 동네 목욕탕에서 사우나를 즐기며 동네 사찰에서 문화 체험까지 하는 게 하나의 동네 관광 코스가 되면서 마을 전체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자영업자들이 협업해서 휴대용 마을지도를 제작하고 마을 안에서 쓸 수 있는 쿠폰을 발행하자 마을이 하나의 서비스로 묶이는 마을 호텔이 된 것이다.
쇠퇴한 도심 살리는 대안으로 떠오르는 마을 호텔
충남 공주시 봉황동 구도심에 있는 한옥을 리모델링해 관광객 숙소로 운영하는 권오상씨가 지난달 12일 오후 투숙객들을 상대로 마을 주변을 둘러보며 설명해주고 있다. 공주/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마을 호텔은 호텔을 경영하는 대기업만 이익을 얻는 기존 호텔과 달리 관광객이 쓴 돈이 마을 주민들에게 돌아가고 쇠락하는 지방 도심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도시재생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봉구 동의대 교수(국제관광경영학과)는 “일본에서 마을 호텔이 정착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해당 지역의 문화를 잘 아는 주민이 주체가 됐기 때문”이라며 “지역이 가진 고유한 문화를 관광객이 체험하고 지역 주민은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면 지역은 일자리 창출 기회부터 인구 유입 효과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 호텔은 지역 주민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건강한 관광이란 분석도 나온다. 사람이 모이고 골목상권이 살아난 국내외 도시들의 성공 사례를 담은 책 <골목길 자본론>을 쓴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정치경제학)는 “휴식 공간을 인위적으로 만든 호텔이 아니라 마을의 자원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는 ‘마을 호텔’은 관광객을 체류시키는 효과가 크다. 체류는 곧 소비와 직결되고 지역에 대한 이해도와 애착을 발생시킨다”고 설명했다.
공주/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