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산이 장밋빛으로 물든 저녁…지금, 삶의 명장면이구나
김남희의 걷다 보면 이탈리아 돌로미테
암벽등반 메카 돌로미테
암봉 18개와 41개의 빙하
일몰·일출 때 바위 색 변화
에델바이스 등 야생화 장관
저녁노을을 받아 장밋빛으로 물들어가는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 김남희 제공 |
나지막한 신음과 한숨이 번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길을 보니 다들 기가 막힌 듯했다. 60도는 가뿐히 넘을 것 같은 급한 경사의 오르막은 지그재그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설마 저길 오른다는 건 아니죠?” “이거 실화인가요?” 이럴 때는 부인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게 낫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계,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 위해 나는 먼저 발을 떼었다. 뒷다리의 햄스트링이 팽팽히 당겨졌다. 고개를 오를수록 허벅지의 신경줄은 더 팽팽해졌다. 이러다 툭 끊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자고로 산행은 이 맛에 하는 거지. 나는 자학적인 말을 중얼거리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뒤를 돌아보니 방과후 산책단 단원들이 체념한 듯 하나둘 올라오고 있었다.
출발할 때 나를 스쳐 갔던 서양인 청년은 이미 아득히 멀어졌다. 이 가파른 고개를 그는 산책이라도 하듯 사뿐사뿐 오르고 있었다. 이 동네 청년인 걸까. 그의 뒷모습에 라인홀트 메스너의 모습이 겹쳐졌다. 인류 최초로 8000m급 봉우리 14개를 모두 올랐던,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산악인은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산악문학’에 빠져 있던 시절, 그의 책을 읽으며 나는 이 남자와 동시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전율했다. 몇년 뒤인 2007년, 이곳을 찾아와 열흘간 머물렀다. 그가 걸었을 법한 길을 걷고, 그가 올랐을 법한 바위 봉우리를 바라보면서. 암벽등반의 메카. 바위마다 전설적인 등반가들의 눈물과 땀이 스며 있는 곳. 3000m급 암봉 18개와 41개의 빙하. 석회암과 백운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군.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이탈리안 알프스 돌로미테(돌로미티)에 서 있었다.
사소 포르도이 지역을 걷는 트레커들. 김남희 제공 |
집 바로 뒤에 이런 고봉들을 두고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도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면 라인홀트 메스너 같은 산악인이 되었으려나. 아니지, 이 동네에도 비열하거나 어리석은 인간은 있을 테니 나고 자란 곳이 한 인간의 성정에 큰 영향을 안 미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메스너가 이 동네가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그가 되었을까? 나도 다음 생에는 히말라야나 파타고니아 같은 곳에서 태어나 양 치고 소 몰면서 동네 아이들과 뒷산 좀 오르다 보면 삶이 달라질까? 더, 더, 더 높이 오르겠다고, 공기통도 없이, 셰르파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누구도 가지 않은 길로 오르겠다며 오르고 또 오르다가 위대한 단독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걷고 또 걷다 보니 아득하던 오르막도 어느새 끝나고, 라가추오이 산장이 눈앞에 우뚝 서 있다. 산장 바로 옆 케이블카 정거장을 본 단원들이 잠시 항변한다. “지금 10분 만에 올 수 있는 곳을 네시간 넘게 걸어오도록 뺑뺑이를 돌리신 거죠?” 말은 이렇게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랐을 때와 걸어 올라왔을 때 같은 느낌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읽어낸 풍경은 영혼에 새겨져 쉬이 잊히지 않는 법이라는 진리도.
돌로미테를 제대로 누리는 최고의 방법은 산장에서의 숙박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 사진만 찍다가 내려간다면 ‘인생샷’은 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인생의 명장면’을 만들기는 어렵다. 활활 타오르던 태양이 기세를 잃고 산을 넘어가고, 사위에 침묵의 그늘이 드리우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거대한 암봉이 촘촘한 어둠의 그물에 갇히고, 뭇별들이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느슨해진 어둠의 그물 사이로 희미한 푸른빛이 스며드는 새벽의 서늘한 공기 속에 서 있어야 한다.
태양이 사라지는 시간과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 그 사이에 몸을 묻은 채 시시각각 달라지는 산들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볼 것. 그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할 때, 주변의 모든 생명을 부드럽게 감싸는 어떤 신성한 기운을, 내 안의 가장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찰나의 위안을 얻기 위해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라가추오이 산장은 듣던 대로 시설이 좋았다. 침대에는 깨끗한 침구가 놓여 있고, 등산화를 말릴 수 있는 보일러실도 있었다. 뜨거운 물에 씻을 수도 있지만 샤워비는 3분에 4유로. 3분 만에 어떻게 샤워를 하냐고? 해보면 머리 감고 몸을 씻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산장의 저녁 식사는 전채부터 디저트까지 코스로 나오는데다가 맛도 꽤 괜찮다. 디저트가 나오기를 기다리다 밖에 나오니 돌로미테의 봉우리들 위로 저녁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식당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불렀다. “지금 디저트를 기다릴 때가 아니에요!” 우리는 밀려오는 안개와 구름 사이로 바위산들이 물들어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신의 손길이 깃들었음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 고요히 내려앉고 있었다.
돌로미테 최고봉인 마르몰라다를 바라보는 트레커들. 김남희 제공 |
산악 전쟁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로카텔리 산장. 김남희 제공 |
돌로미테가 속한 남티롤 지역은 본래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1차대전 당시 600㎞ 길이의 전선이 석회암 바위들과 알프스의 빙하들 사이로 그어졌고, 두 나라는 뺏고 빼앗기고 다시 빼앗는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탈리아에는 등반과 스키에 능한 청년들로 꾸려진 산악부대 ‘알피니’가 있었고, 이들을 주축으로 전투가 치러졌다. 그 시절의 전사들은 총과 포탄뿐 아니라 눈사태로 몰살당하기도 했다. 해발고도 2752m에 자리한 라가추오이 산장은 그런 비극을 고스란히 지켜본 곳이다.
이곳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 진지가 있었고, 수백m 절벽 아래 친퀘토리에 이탈리아군이 참호를 파고 대치했다. 1차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는 티롤의 남쪽을 이탈리아에 넘겼다. 이탈리아는 이 영토를 편입해 트렌티노알토아디제주를 만들었고. 지구 위 어디든 그 땅에 깃들여 산 이들의 피와 눈물이 섞이지 않은 길이 없듯이 이곳도 마찬가지다.
라가추오이에서 내려와 미수리나 호수를 걸은 오후에 향한 곳은 해발고도 2405m의 로카텔리. 돌로미테의 수많은 산장 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덕분에 예약하기도 가장 어려운 곳으로 유명하다.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 돌로미테를 상징하는 세 개의 봉우리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위치 덕분이다. 나도 당연히 가장 먼저 이 산장으로 예약 메일을 보냈다. 2월 말에 보낸 내 예약 메일에 답이 온 건 꼬박 석달 뒤인 5월 말. “너희 예약 완료해놨는데 오는 거 맞지?”라는 메일이었다. 나는 울면서 루트를 다시 짜야 했다. 그런데 막상 오니 샤워 시설 고장으로 샤워도 안 되고, 어디에서도 인터넷은 안 터지고, 산장지기의 태도도 사무적이기만 하다.
은근슬쩍 쌓일 뻔한 불만은 산장 앞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세 봉우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싹 사라진다. 가장 작은 봉우리 치마 피콜라(2856m), 동쪽 봉우리 치마 오베스트(2972m), 가장 큰 봉우리 치마 그란데(3003m). 이 봉우리의 초등은 1869년에 이뤄졌다. 오스트리아 등반가 프란츠 이너코플러와 파울 그로만, 페터 잘허가 나무 지팡이를 짚고 서로의 허리에 밧줄을 묶어 남쪽 사면을 올랐다. 2002년에는 독일인 알렉산더 후버가 로프를 사용하지 않고 단독 등반으로 치마 그란데를 오르는 엄청난 일을 벌였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런 이야기를 담은 “돌로미테 150년 등반의 역사”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저녁 햇살을 받으면 회색의 봉우리들은 연한 핑크빛에서 장밋빛으로 붉어진다. 바위의 성분인 탄산칼슘과 마그네슘 덕분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그 현상에 ‘엔로사디라’(장미색으로 붉어지는)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산장 뒤 동굴로 올라가 트레 치메가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돌체 파르 니엔테’(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를 누리면서. 붉게 물들었던 바위는 차분한 갈색으로 가라앉았다. 곧 어둠이 내릴 터였다. 동굴을 내려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에는 조급함이 실렸다.
2026년 겨울올림픽 개최 예정지인 코르티나담페초에서 며칠을 보낸 뒤, 우리는 산악도로를 가로질러 오르티세이로 넘어갔다. 야생화 트레킹으로 유명한 세체다와 알페디시우시를 걷기 위해서다. 6월 말의 돌로미테는 야생화가 지천이었다. 퍼프 소매가 달린 원피스 같은 불가리아장구채, 우아한 귀족 여인처럼 반듯하게 뻗은 노란 금매화, 하늘하늘 흔들리는 분홍색 범의꼬리, 은빛 솜털이 보송보송한 에델바이스, 습자지로 접은 보라색 종 같은 캄파넬라…. 발을 딛는 곳마다, 눈을 두는 곳마다 천상의 화원이었다. 매 순간 감탄하고, 몸을 낮춰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느라 발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앞으로 나아갈 길도, 이미 지나온 길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세계 3대 자전거대회에 참여해 포르도이 고개를 넘고 있는 선수들. 김남희 제공 |
서울시보다 26배나 더 크다는 돌로미테 지역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사소 포르도이. 돌로미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던 바늘잎나무들이 사라지고 황량한 회색 바위들만 남은 사소 포르도이를 걷고 내려온 날, 산장 주인이 말을 건넸다. “내일 돌로미테 자전거 마라톤이 열리거든. 오후 2시까지는 차가 못 다녀.” 아니, 그걸 이제야 알려주면 어떡하냐고. 과연 혼돈의 이탈리아다. 세계 3대 자전거 대회라는 마라토나 델레 돌로미티. 자전거 좀 탄다 하는 이들의 버킷리스트라는 이 대회는 추첨으로 뽑힌 9천명이 참가해 돌로미테의 7개 고개를 넘으며 175㎞를 달린다.
오르티세이로 돌아가려던 우리는 결국 일정을 변경해 마르몰라다의 다른 코스를 걷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건너편 계곡 위로 솟은 돌로미테 최고봉 마르몰라다(3342m)를 바라보며 들꽃 가득한 산길을 걷고 내려온 오후.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쉬던 우리들의 스마트폰이 여기저기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에 마르몰라다의 빙하가 높이 25m, 폭 80m 크기로 무너져내려 아래쪽에서 트레킹을 하던 1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난 탓이었다. 기후위기는 이제 우리의 일상만이 아니라 여행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답 없는 질문을 품은 채 바위 너머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김남희 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