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준 “목표 세우고 ‘나의 길’ 걸어갑시다! 남금필처럼”

[쉼톡④]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는 박해준

티빙 ‘아직 최선을 다하지…’로 놀라운 변신

‘사빠죄아’ 외치던 이태오 맞나

작품마다 뚜렷한 변화…‘원톱’ 주연 우뚝

연기, 삶 성찰 중…더 큰 배우 도약?

한겨레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그를 보려고) 대기표 뽑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지난 2월18일 문제(?)의 그 작품이 시작되자, 넷심이 술렁였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사빠죄아)라며 아내를 배신하고도 되레 큰소리쳤던 ‘이태오’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설렜다. 2020년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두 여자를 오갔던 이태오는 비난과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지금껏 드라마 속 불륜남은 시청자한테 욕만 먹었는데, 이태오를 연기하는 배우 박해준의 매력이 캐릭터에 대한 미움을 녹여버렸기 때문이다. 방영 당시 “이태오를 만나면 한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우연히 길에서 촬영하는 박해준을 본 뒤 이태오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그런데! “사빠죄아”가 아니라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외치는 이 남자한테서 이태오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부스스한 머리에 거무튀튀한 수염 자국, 배를 긁으며 방에서 나와 “상아(딸)야, 학교 가니”라고 묻는 그의 이름은 남금필. 온라인동영상서비스(오티티·OTT) 티빙이 자체 제작한 드라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에서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 44살 백수다. “이태오를 좋아하셨던 분들이라면 남금필의 모습이 충격적일 수도 있겠네요.(웃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맑은 드라마여서 꼭 해보고 싶었어요. 이태오같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날도 있겠죠.(웃음)”


<부부의 세계> 이후 쏟아졌던 ‘멋진 남자’ 역할을 마다하고 ‘지질한 남자’를 택한 점, 그래서 이태오를 말끔히 씻어냈다는 점이 <한겨레>가 박해준을 ‘쉼톡’ 네번째 주인공으로 초대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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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변화 폭이 큰 박해준은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 에서 가장 편안한 모습을 선보였다. 티빙 제공

백수 금필, 붕 뜬 태오를 다잡다

그 선택이 궁금했다. <부부의 세계> 이후 작정하고 멜로물 한두편 더 했더라면 이른바 ‘박해준의 시대’가 왔을 수도 있다. 그는 그사이 영화에만 출연하며 애써 이태오 흐름을 끊는 느낌이었다. 2년 만에 돌아온 드라마에서 남금필을 택한 것도 이태오를 지우기 위해서였을까? “그런 계산까지 한 건 아니지만, 그런 마음도 어느 정도는 있었죠.” 현실의 박해준은 이태오보다 남금필에 가깝다. 속내를 잘 숨기지 못한다. 그리고 또? “<부부의 세계> 이후 두렵고 조심스러웠던 건 사실이에요. 비슷한 역할에 예능 출연 제의도 많아지고, 여기저기서 알아보고 좋아해주니 붕 뜬 기분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지금 다잡지 않으면 많이 흔들리겠다. 이 기분이 빨리 사라졌으면 생각하기도 했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역할을 신중하게 고민하는 작품 선택의 시간이 <부부의 세계> 이후 더 길어졌다.


그래도 그렇지, 남금필은 너무 파격적이지 않나.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은 얼굴은 땀구멍까지 드러난다. 그가 사직서를 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 보쌈 먹는 장면에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입 모양이 화면에 꽉 찬다. 이 남자, 자신을 다 내려놓았다. “좀 추잡스럽게 먹죠?(웃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금필하고는 너무 잘 맞는 장면이어서 괜찮았어요.(웃음)” 오히려 한술 더 떴다. 현실감을 살리려고 “평소 집에서 입던 옷을 금필의 의상으로 활용도 했”단다. 이태오가 동네 놀이터에서 볼 법한 완벽한 백수 아저씨 남금필로 변하면서 박해준은 스펙트럼 넓은 배우, 그리고 혼자 드라마를 이끄는 힘을 지닌 ‘원톱’ 배우 반열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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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영 기자

극과 극을 오가는 인물의 폭

불륜남 이태오와 44살 백수 남금필. 캐릭터를 나란히 세워놓으면 박해준 한 사람인 게 믿기지 않을 수 있다. 박해준의 연기 페이지를 들춰 보면 작품마다 캐릭터 변화 폭이 크다. 연극에서 활동하다가 대중매체는 2012년 영화 <화차>로 데뷔했다. 주로 악역을 도맡다가 2014년 드라마 <미생>에서 고뇌하는 직장인 ‘천관웅 과장’으로 얼굴을 알린 이후부터는 전작과 비슷한 인물이 거의 없었다. <닥터 이방인>에서 “어이, 박훈이”라는 대사 한마디로 섬뜩함을 준 북한 대남공작부 요원이었고, 2018년 <나의 아저씨>에서는 스님이었다.


“선택의 기로에 있는 인물을 많이 연기했어요. 일반적으로 이런 인물은 분명 이렇게 행동하는데, 다른 선택을 하는. 그런 역할에 매력을 느껴요. 왜 저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 부분이 궁금한 거죠.” 그래서 평범한 것 같아도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남금필도 그 나이에 무작정 사표를 내고 하고 싶은 걸 찾다가 웹툰 작가에 도전한다. 누구나 꿈꾸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선택. 그런 의미에서는 남금필도 판타지 속 인물인 셈이다.


“작품을 할 때마다 (관객, 시청자들이) 나를 몰라봤으면 좋겠어요. ‘쟤는 누구지?’ ‘쟤 한번 찾아봐야겠다’며 늘 신인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바람이 적어도 이번 작품에서는 성공했다. 남금필을 보고 “이태오 어디 갔냐”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으니. 짙은 쌍꺼풀, 뚜렷한 이목구비는 뇌리게 쉽게 박혀 배우로선 장점보다 단점이 많다. 그런데도 변화가 뚜렷했다는 건 그만큼 노력했다는 의미다. 박해준한테서 이태오를 남금필을 연상한 사람이 있을까.


남금필은 영화 <너는 내 운명> 황정민 머리를 참고한 파마머리에 늘 짜증난 듯한 표정, 말할 때 오른쪽 입술을 실룩거리고 오른쪽 눈을 치켜세워 주름지게 하고, 어깨를 굽혀 세상살이의 피곤함을 보여준다. “저도 평소에 있는 그대로의 저로 행동할 순 없잖아요. 금필을 연기하면서 박해준이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해보고 싶었던, 가장 자연스러운, 그냥 놔버린 행동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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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오는 미워해도 박해준은 사랑받았던 <부부의 세계> 이태오. 제이티비시 제공

목표를 세우다 배우의 길에

데뷔 직후 악역을 많이 맡았던 그는 “한 가지 이미지로 굳어지고 싶지 않아서 기회가 올 때마다 다양한 인물을 찾았다”고 했다. 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그가 이태오에서 남금필이 되는 등 최근까지 변화의 폭을 넓혀온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게 답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고 이미지가 굳어지지 않나? 선배들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지 않나? 가장 잘하는 역할이라는 게 따로 있나?” 내공이 쌓일 수록, 작품 선택권이 주어질수록 그 고민이 깊어진 듯했다. 어쩌면 남금필한테 끌린 데는 요즘 그의 고민을 그가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금필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아가는 것이 부러워요.” 남금필이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웹툰 작가에 도전해 1년여간 그리고 싶은 주제를 찾아 나아갔던 것처럼 그도 지금 “내가 어떤 목표를 향해 연기를 해야 하는가를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목표의 중요성을 느낀 적은 있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 뒤 자퇴하고 군에 갔다 와서 재입학을 했다. 재입학한 이유로 그는 “연기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기하려고 연극과에 간 것은 아니었고, 연기를 잘하지도 못하는 등 여러 이유로 매력을 못 느꼈는데, 아내를 만나 연기를 했고 잘해야 했고 그러면서 극단 차이무에 들어갔고, 연출의 칭찬을 들으며 연기의 맛을 알게 됐다. “아내 그리고 가정을 위해 잘해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 연기자가 돼야 한다는 목표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온 셈이죠.” 이 길이 맞든 틀리든 그 목표가 그를 배우로 이끈 셈이다.


어쩌면 지금의 고민은 더 큰 배우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진 그때그때 작품이 들어오면 좋은 결과물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리고 있는지 아직 뚜렷하게 잘 모르겠어요. 목표를 잡지 못했어요. 그래서 삶이 불안할 때도 있고.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연기를 접하면서 조금은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어떤 것을 향해 달려가는지, 가야 하는지 명확하지가 않아요. 그 목표를 세우지 못했으니까.”


그는 “나도 아직 찾아가는 과정이지만,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당신처럼 방향을 알지 못하고 목표조차 세우지 못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금필의 딸 상아의 선택이 너무 멋있었어요. 상아는 벽에 부딪히면 부딪히는 대로 그냥 자기만의 길을 가잖아요. 다른 사람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어떤 걸 향하는지 비교하지 않고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는 그 모습이 정말 좋더라고요. 억지로 끌어당기거나 밀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러려고요. 여러분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2022.05.1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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