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식객 임지호가 차린 108가지 음식…‘밥정’으로 돌아온 요리사

방송 출연해 대중적인 사랑 받은 그

다큐멘터리 영화 '밥정'으로 귀환

세 명의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

“마케팅이나 식당 치장보단 철학이 중요”

“AI시대에도 자연과 교감하는 요리사는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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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 임지호. 사진 경지은(스튜디오 어댑터)

“지리산 갈래?” 박혜령(46) 다큐멘터리 감독은 자연주의 요리 연구가 임지호(64)씨가 무심하게 툭 말을 던지면 두말 않고 따라나섰다. 눈밭일 때도 있었고 비바람 몰아치는 한여름 산등성이일 때도 있었다. 임씨는 거기서 ‘어머니’들을 만났다. 세상 모든 ‘늙은 여자’는 그의 어머니다. 그들의 주름은 잘 말린 곶감 같았다. 거기서 달짝지근한 향이 났다. 꼬챙이로 땅을 파고, 가파른 벼랑에 손을 뻗어 풀과 꽃을 뽑았다. 잡초도 그의 손을 거치면 음식이 됐다. 그는 자연의 선물로 어머니들의 밥상을 차렸다. <인간극장>(KBS.2006), <방랑식객 식사하셨어요?>(SBS.2013), <잘 먹고 잘사는 법, 식사하셨어요?>(SBS.2014~2016) 등에 출연해 대중의 사랑을 받은 임씨가 다큐멘터리 영화 <밥정>으로 우리 곁에 찾아왔다. 박 감독이 기록한 임씨의 지난 10년이다. 오래전부터 임씨는 ‘어머니’를 찾아다녔다. 얼굴조차 모르는 생모와 임종을 못 지킨 양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서다.


<밥정>은 제27회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대됐고, 배우 김혜수가 앞장서 홍보한다. 임씨와 함께 방송 출연한 인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개봉이 불투명하다. 지난달 12일께 만난 그는 뜻밖에 초조한 기색이 없다. “할 때 되면 하겠지요.” 2017년 문 대통령의 기업인 호프미팅 밥상도 차렸던 그. “그냥 연락이 와서 차렸어요.” 무심하다. 그의 얘기를 들었다.


영화 작업은 어떻게 하게 됐나?


“<인간극장> 출연 당시 피디였던 박 감독에게 어머니 얘기를 했다. 그때부터 그가 기록한 거 같다.”


박 감독은 방송 촬영하면서 그의 삶에 대한 외로움을 알게 됐다고 한다. “버려진 식재료에 관심이 많은데, 그런 것들로 만든 요리는 그의 삶을 닮았다. 한식 얘기를 더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기록을 결심한 이유다.


영화 제작 전 ‘임지호’와 제작 후 ‘임지호’는 다른가? 요리 세계도 달라졌을 듯하다.


“많이 울었다. 편해졌다. 어릴 때 ‘주워 온 아이’라는 등 놀림도 많이 받았다. 그렇다고 가슴에 쌓아둔 분노는 없었다. 여기까지 온 데는 (보이지 않은) 어머니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란 존재는 영감을 열어주는 길이다. (길에서, 전국에서) 그런 분들 만났다. 계산하지 않고 나누는 이들이다. 똑바로 살아야 할 이유에는 그런 어머니들의 눈물 값이 있다. 요리는 달라진 게 없다. 음식의 책임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생명은 자연이고, 우리도 자연이다.”


산골이나 사람 닿지 않는 곳에 가서 무척 생소한 식재료를 채집한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요리사들이 있다. 과연 우리 몸에 들어가도 되는 음식인가 하고 말이다.


“음식의 재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못 먹는 게 있는 게 아니라 먹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선조들은 먹는 방법을 이미 알았다. 자연과 식재료를 이해하고 (조리 기술에) 접목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곰탕엔 ‘뼈의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 뼈를 오래 끓이면 순수한 게 나온다. 그것을 그릇에 담고 꽃 하나만 띄우면 된다. 식탁은 그 민족의 철학이 이어져 온 것이다. 끼니마다 그 철학을 먹는 것이다. 우리는 나눔 문화다. <밥정>도 나누는 것에 대한 얘기다.”


‘나눔’이 다소 피상적으로 들린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엇을 나눈다는 얘기인가?


“편안하게 나누는 것이다. 옛날 어머니들은 ‘밥 먹었나’ 소리부터 했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는) 자주 굶었다. 어머니는 자식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싶은 이다. 그런 분들의 음식을 많이 얻어먹었다. 이제 그걸 갚기 위해 밥을 짓는 것이다. 혼밥 시대라고 하는데 밥상에서 정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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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규 할머니(사진 왼쪽)와 요리사 임지호. <밥정>의 한 장면. 사진 하얀소엔터테인먼트 제공

요즘 실력 있는 요리사들은 식재료에 대한 관심이 많다. 식재료 보는 눈을 키우려면?


“책만 봐서는 안 된다. 직접 체험해야 한다. 습한 데 사는 게 있고, 능선에 사는 게 있다. 산과 바다, 동굴도 다녔다. 허영심이나 욕심 버리고 부지런하게 찾아다녀야 한다. 무엇이든 절실하게, 겸손하게 몰입해야 한다.”


요즘 사찰요리나 채식이 주목받고 있다. 표방하는 자연주의 요리와 유사한 측면이 있나?


“오신채(스님이 안 먹는 5가지 채소) 안 쓰는 사찰음식과 다르다. 오신채는 수행자에게는 필요 없지만, 노동자에게 필요하다. 너무 한쪽으로 몰리는 것, 조화가 깨지는 것도 위험하다. 지금은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시대다. 이럴 때일수록 절기를 잊으면 안 된다. 절기에 따라 나누고 취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자연주의다.”


더없이 풍요로운 시대다. 하지만 식탁은 여전히 빈곤하고 지구에서 누군가는 굶고 있다.


“혼밥, 인스턴트, 편의점 음식 등으로 대충 때운다.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편리하지만, 여러 가지 교감을 뺏는 일이다. 재료를 씻고 다듬으면서 교감하고,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도 또 교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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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 임지호. 사진 경지은(스튜디오 어댑터)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요리사 마시모 보투라는 밀라노에서 넘치는 음식을 수거해 노숙자를 위한 식당을 연 적 있다. 요리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 같은데.


“옛날엔 홀대받던 직업이었다. 지금은 대우받는다. 이럴 때일수록 겸허한 자기 수행을 통해 식재료를 이해하고 그 재료로 사람들과 교감해야 한다. 자신이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요즘 기교를 먼저 배우고 폼 나는 것만 하려고 해 안타깝다.”


과거엔 음식이 맛있는 식당이 성공했다. 요즘은 식재료의 질이 떨어져도 에스엔에스 마케팅만 잘하면 성공한다. 맛보다 인테리어다. 인스타그램 때문이다. 요리사의 실력이나 정성, 진정성이 성공의 기준이 아닌 것이다. 유혹에 시달리는 요리사도 많다.


“슬프다. 껍데기만 치장하는 거다. 허영심이다. 이런 풍토에도 깨어 있는 요리사는 자기 정신을 소스에 담는다. 자신에게 충실하면 된다. 돈이 잣대가 될수록 음식은 배 채우는 데 급급한 것이 된다. 먹는 이도 문제다. 요리사가 감동의 밥상을 경험하게 해주면 달라질까. 대중 음식이 살아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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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 임지호. 사진 경지은(스튜디오 어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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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정>의 한 장면. 사진 하얀소엔터테인먼트 제공

임지호는 독학한 요리사다. 요즘은 미국의 요리학교 시아이에이(CIA)나 이탈리아 아이시아이에프(ICIF), 프랑스 르 코르동 블뢰나 인스티튜트 폴 포퀴즈 등에서 수학한 요리사가 부지기수다. 12살에 가출해 초등학교 졸업장도 부친이 겨우 챙긴 그다. 누이가 넷인 집안. 대를 잇기 위해 부친은 쉰 넘은 나이에 그를 낳았다. 어린 나이에 강퍅한 세상살이를 시작한 그는 어떻게 실력자가 됐을까? “의식주가 해결되는 일터는 식당이었다. 일하다 보니 음식이 편하더라.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20살 때 생각했다. 항상 혼자 연습을 많이 했다.”


실제 조리 기술을 익히려면 혼자 연습하는 것만으로 힘들지 않았나?


“23살 군대 가기 전까지 서울 소공동, 북창동의 내로라하는 식당들에 연탄을 배달했다. 미조리 등 대단한 곳들이었다. 그때 주방을 샅샅이 다 봤다. 유명한 중국집부터 고급 술집, 일식집, 요정까지. 참치 해체하는 것도 봤다. 1970년대인데 말이다. 1974년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 방한 때는 얼음도 날랐다. 연탄을 잘 날라서 당시 인기 프로그램인 <묘기 대행진>에도 출연했다. 방송은 그때부터 인연이 있었나보다.(웃음)”


실제 요리사로서 기술 연마는 어떻게? ‘임지호’ 스타일이 있을 거 같다.


“칼질도 한번 시작하면 오래 했다. 칼이 나와 한몸이 돼야 한다. 고요한 시간에 채썰기를 하면 쓱싹쓱싹 소리만 난다. 불 켜고 썰고, 불 끄고 썰었다. 시간을 도구 삼아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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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정>의 한 장면. 사진 하얀소엔터테인먼트 제공

기와나 돌을 접시로 썼다. 접시를 도화지 삼아 그림 그리는 퍼포먼스도 했다. 전시도 했다. ‘화가 임지호’로도 불린다.


“모든 문화가 디자인이다. 따로 그림 공부한 적은 없지만, 한 가지에 꽂히면 끝을 봐야 한다. 그림도 그런 것 중 하나다. 튀김에 빠졌을 때 한동안 그것만 했다. 전복도, 생선도, 문어도 튀겼다. 한때 삶기만 했다. 밤새 썰기만 한 적도 있다. 소, 양, 돼지, 홍어 등을 삶은 것, 날것 따로 다 썰었다. 무딘 칼로, 날카로운 칼로 해봤다. 머리는 한계가 있다. 몸으로 부딪혀 봐야 한다. 10년 전 한 친구의 개인전을 음식으로 도운 적 있는데, 당시 ‘작가의 작품이 날개 돋듯 팔리면 좋겠다’는 생각에 새 요리를 준비했다. 꿩, 칠면서, 닭, 호로조, 칠면조, 오리 다 조리했다.”


에이아이(AI)시대다. 로봇이 햄버거 패티를 굽는다. 심지어 그게 더 맛있다는 이가 있다. 로봇 바리스타도 생겼다. 더는 요리사가 필요 없는 시대인가?


“요리사는 자연과 교감하는 이다. 로봇은 매뉴얼대로 하지만 인간은 상황에 따라 변화를 추구한다. 에이아이 밥상이 실망은 안 시키겠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은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다. 심장을 울린다. 그래서 어머니 손맛을 못 따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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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호 요리사가 작고한 김순규 할머니를 그리워하면 차린 밥상에 오른 음식 중 하나. <밥정>의 한 장면. 사진 하얀소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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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규 할머니(사진 왼쪽)와 요리사 임지호. <밥정>의 한 장면. 사진 하얀소엔터테인먼트 제공

3년 전 바람과 개펄이 좋은 강화도에 식당 ‘호정’을 연 그는 “인생이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며 “정신줄 놓으면 자신의 칼날에 베인다”는 무시무시한 얘기를 특유의 미소로 아무렇지 않게 툭 뱉는다. 미리 살짝 엿본 영화의 마지막 밥상은 인상적이다. 그는 세 번째 어머니로 모신 지리산의 김순규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사상을 차렸다. 인적 드문 두메산골 허름한 집에 차린 정성 가득한 밥상이었다. 무려 요리가 108가지다. 울컥 눈물이 난다. 밥은, 밥상은 그런 것이다. 영화는 5월 개봉 예정이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2020.04.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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