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화인’ 아닌 ‘영화인’으로 성차별의 벽을 넘다

[컬처]by 한겨레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한국영화 100년 빛과 그림자-⑤여성 감독

한겨레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50년대 아이 업고 촬영장 누벼

전형성 깨려는 줄기찬 시도에도

“영화판 억지 쿼터 맞추기용 거부”


이번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 선정 목록에 여성 감독 작품이 고작 7편, 해당 감독도 6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상당히 당황스럽다.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은 다행히 들어 있지만 이후 40년을 훌쩍 지나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과 비로소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까지, 여성 감독은 이례적인 존재여서 선택할 수 있는 후보군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장르영화가 본격화되던 한국영화의 황금기, 영화산업의 양적·질적 성장이 이루어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천만 영화로 불리는 한국영화가 1년에 1편 이상 등장하는 지금/여기, 여성 감독은 어디에 있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순례, 변영주, 정재은, 이정향, 박찬옥 감독 등 1990년대 이후 일련의 여성 감독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자신의 영화를 연출한 여성 감독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영화 현장의 이단아이자 소수자로서 끊임없이 그 자질과 능력을 의심받아온 여성 감독들은 매 순간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지 스스로 물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첫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 박남옥 이후 등장한 여성 감독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홍일점 여성 감독의 지위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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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망인>에서 전쟁미망인의 삶을 자신의 영화에 담으며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채 촬영 현장을 누비던 박남옥 감독의 전후 ‘여성의 전형성’에 대한 도전은 이후 여성 감독들의 작업에서도 이어졌다. 영화 현장의 노련한 스태프로 활동하다 화제의 영화 <여판사>(1962)로 감독으로 데뷔한 홍은원은 당시 최초의 여판사의 죽음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시점에 “홍일점 여판사에 홍일점 여감독이라는 선전효과”로 영화가 제작된 사실을 토로한다. 여성에게 던져진 욕망과 모성의 갈림길, 가족과 직업에 동시에 대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들은 시대정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며 이후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의 소재이자 질문이 되어왔다.


이는 남편 신상옥 감독이 차린 제작사 ‘신필름’이라는 시스템에서 탄생한 최은희 감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청춘영화 붐 속에서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던 시대에 자신에게 고착된 지고지순한 여성상이라는 배우로서의 한계를 <민며느리>(1965) 등 3편의 영화를 연출함으로써 돌파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안개>를 통해 ‘아방가르드’한 기획을 특유의 추진력으로 밀어붙여 흥행에서도 성공한 젊은 여성 기획자로서 이름을 각인시킨 황혜미 감독은 1970년대 유일하게 활동했던 여성 감독으로 <첫 경험>(1970)을 비롯한 3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현재는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 1984년 <수렁에서 건진 내 딸>로 여성 감독의 계보를 다시 이은 이미례 감독은 당시까지는 유일하게 6편의 영화를 찍은 여성 감독으로, 영화계 홍일점으로서 주목을 받았지만, “억지로 쿼터 맞추려고, 아니면 청소년영화 감독으로 꼬리표가 붙는 것도 싫어” 결국 영화계를 떠났다고 한다.


변영주·임순례 ·정재은 ·이정향 등

90년대 이후 여성 감독 대약진

인력·배역도 여성 덩달아 늘어

여성감독 작품 관객수 매년 증가


여성영화집단 ‘바리터’에서의 활동에 이어 <낮은 목소리> 3부작과 <화차>에 이르기까지 다큐멘터리영화와 극영화, 독립영화와 대중영화의 길항 속에서 자신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해온 변영주 감독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영화의 하나의 전범을 이룬다. 간첩 혐의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경계도시>(2002) 시리즈에서 홍형숙 감독은 분단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과 결정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한다. 때로는 잔인하고 씁쓸한 청춘을 지나는 주변부 남성들의 우울한 스케치를 보여주던 임순례 감독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을 통해, 장르영화의 ‘뉴웨이브’ 시대를 맞았음에도 정작 여성 감독들의 입지는 여전히 모호하던 시절에 변곡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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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라져가는 정감을 향수 어린 시선으로 속삭이는, 할머니와 어린 남자아이가 나란히 서 있는 포스터가 인상적인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2002)는 409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한국영화 역사에 이정표를 남겼다. 제목과 포스터부터 신선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정재은 감독의 데뷔작인 <고양이를 부탁해>(2001)는 밀레니엄의 도래와 함께 스무살을 맞은 5명의 여고 동창생들이 각자 반목하던 세상과 화해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영화다. 박철수 감독의 <삼공일 삼공이(301 302)>(1995)의 강렬한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 있던 방은진 감독은 최은희 감독 이후 배우가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두번째 사례가 됐다. 스릴러(<오로라 공주>)에서 실화영화(<집으로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방은진 감독은 모성과 가족을 매개로 장르의 문법과 한국의 현실을 잘 섞어 보여준다. 한국의 현실은 이수연 감독의 <4인용 식탁>(2003)과 <해빙>(2017)에선 신혼집의 식탁에 귀신이 나타나고, 얼음이 녹은 한강 위로 주검이 떠오르는 악몽으로 출몰한다. 또 박찬옥 감독의 <파주>(2009)에서처럼 금지된 관계에 직면한 개인들을 통해 멜로드라마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한국의 교육 현실과 신자유주의 시대 양극화의 막다른 골목은 <마돈나>(2015)를 비롯한 신수원 감독의 영화들을 통해 강력한 주제의식을 넘어 영화미학과 장르에 대한 도전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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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최근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변화는 여성들이 주요 등장인물인 이야기들의 증가와 함께 여성 감독을 포함한 핵심 창작인력의 숫자 역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를 보면 2018년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중 여성 감독 참여율이 처음으로 10%를 넘어 최근 5년간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비밀은 없다>(2015)의 이경미 감독이나 <미씽: 사라진 여자>(2016)의 이언희 감독 등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재현된 여성들의 현실 역시 전형적인 상황이나 보조자 혹은 단순 희생자에 머물지 않고 기존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도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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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분명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와 다양한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포함한 영화제라는 등용문, 여성영화인모임이라는 여성 영화인들의 든든한 커뮤니티, 대학 등에서의 여성 동료와의 작업 경험, 여성 핵심창작인력이 이룬 성과, 그리고 강남역 사건부터 미투 국면까지 한국 사회의 여성들의 현실은 여성 영화인들의 역할에 대한 기대로 모아지고 있다. 특히 고무적인 사실은 2018년 현재 여성 감독 영화의 평균 관객 수가 59만3319명인데 이는 전년 대비 28.8% 증가한 수치로 최근 5년간 매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영화 100년이 관객들과 함께 이어져온 것처럼, 여성 영화 100년 역시 관객의 힘에 기반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변재란/순천향대학교 공연영상학과 교수

2019.08.0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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