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 거닐고 온천에 스르르…영주에서 ‘느긋한 가을 맞이'
최갑수의 작은 마을 여행
숲이 우거진 죽령 옛길을 걷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
나는 지금 풍기 온천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길고 지루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날씨가 쌀쌀하다. 온천하기에 좋은 계절이 되었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온천은 처음이다. 여행 작가로 일하며 영주를 여러 번 취재했다. 물론 풍기 온천에 관해 짤막하게 원고를 쓴 적도 있다. 하지만 직접 탕 속에 몸을 담가 본 적은 없다. 여행 작가란 그런 직업이다. 여행을 하지만 여행을 즐길 만한 시간은 늘 부족한 사람이다.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한 후, 빨리 다음 취재지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는 돌아와 느긋하게 여행한 척하며 원고를 쓰는 것이다.
소백산역~고갯마루 왕복 3시간
방금 죽령 옛길을 걷고 온 참이다. 숲은 떡갈나무와 참나무, 물푸레나무, 신나무, 잣나무로 빽빽했다. 으름덩굴이며 청가시덩굴, 인동덩굴, 칡덩굴, 종덩굴이 그 나무를 끌어안고 있었다. 가을은 숲에도 당도해서, 숲은 달짝지근하고 시큰한 내음으로 가득했다. 나는 소백산역을 출발해 죽령 고갯마루까지 약 2.5㎞를 걸었고, 고개에 도착해 한숨 돌리고 다시 길을 되짚어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왔다. 왕복 3시간이 걸렸다. 걸을 때마다 짙은 나무 냄새가 콧속으로 훅훅 스몄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그 오솔길을 기분 좋게 걸었고, 걷다가 가끔 멈추고서는 숲 속에 깃든 고요를 느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숲에서 비로소 만나는 고요. 복잡하고 힘든 생활에서 몇 발짝 떨어져서 느껴보는 고요. 이 온전한 고요를 왕복 5㎞ 동안 즐겼다.
그리고 지금은 섭씨 35도의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에는 나쁜 일들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든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착실하게 제 역할을 하며 굴러가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탕 위로 모락모락 솟아나는 김을 보고 있노라면, ‘언젠가 멋진 삶을 살고 싶다’라는 생각보다는 ‘내 인생도 그럭저럭 별 탈 없이 지나가고 있군’ 하는 생각이 드는 곳도 바로 온천이다. 온천은 피부에도 좋고 관절염에도 좋지만, 인생의 조바심을 느긋함으로 바꾸는 효과도 있다. 인생이란 대체 무엇일까?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몸을 담근 채 ‘이런 느낌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순간도 필요하다.
혼자서 소도시를 여행하려고 마음을 먹은 건 지난해부터다. 20년 동안 여행 작가로 일하며 여행이 좀 지긋지긋했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너무 바삐 쏘다닌 탓이 컸다는 것으로 나름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나이도 조금 들고 했으니 나이에 걸맞게 좀 여유롭게 다녀보자,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작은 중고차를 한 대 샀다. 2014년식이니 꽤 오래된 차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곳곳을 취재하며 알게 된 건, 1,000㏄ 이상이면 우리나라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차는 1400㏄이니 충분하다. 인터넷 중고차 사이트에서 중고차를 주문하니 사무실 앞으로 배달이 왔다. 좋은 세상이다. 탁송 기사가 내민 인수증에 사인을 하고 나자 딜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주일 동안 타 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면 반납하시면 됩니다.”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는 운전석 문을 호기롭게 닫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이 차로 못 가는 곳은 안 가면 되는 거고.”
콩이 주는 구수함과 정성
그렇게 여행이 시작됐다. 나름 제목도 지었다. 이건 직업병이다. 기자와 작가, 편집자로 오래 살아온 탓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일단 제목을 지어야 뭔가를 하는 것 같다. 이름하여 ‘느긋하게, 여행’. 이 제목 아래 국내 이곳저곳을 여행하기로 했다. 몇 가지 여행의 원칙을 세웠는데, 이것도 직업병이다. 대략이나마 목차가 나와야 안심이 된다.
① 혼자 갈 것. 그래야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으니까. ② 그 도시에서 하룻밤 묵을 것. 지금까지는 웬만하면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마진율이 높아지니까. 하지만 이젠 그러지 말자. ③ 그 도시의 멋진 카페에 가서 그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꼭 맛볼 것. ④ 카메라 딱 한 대만. 하지만 사진은 되도록 찍지 않는다.(지금은 카메라를 아예 가져가지 않는다. 스마트폰이면 충분하다.) ⑤ 1~4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첫번째 여행지가 화천이었고, 두번째 여행지가 영주다.
한 시간 동안의 기분 좋은 온천을 마치고 나니 몸이 가뿐했다. 콜라 한 병을 사서 차에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파바로티의 ‘푸니쿨리 푸니쿨라’가 흘러나왔다. 파바로티는 힘찬 목소리로 신나게 노래하고 있었다.
“어젯밤 나는 산으로 올라갔다네/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무정한 마음에도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아/ 이제 나를 괴롭히지 않아/ 산은 불을 뿜고 타오르고 있지만 당신이 도망간다면/ 불이 붙는 건 당신이겠지/ 하늘을 보려면/ 지구에서 산꼭대기로 가자/ 걷지 않고/ 우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볼 수 있을 거야/ 올라가자 올라가자(…)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꼭대기로 올라가자, 케이블카.”
와, 정말 멋진 노래다. 하늘을 보려면 산꼭대기로 가라니! 카 오디오에서 나오는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즐겁게 여행하라는 응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차창을 열었다. 초가을의 상쾌한 공기가 가득 밀려 들어왔다. 옛길을 걷고, 온천을 하고 나온 후 콜라를 마시며 파바로티를 듣는 가을날이라니. 나는 힘껏 심호흡을 했다.
5번 국도를 따라가며 뭘 먹을까, 하고 고민했다. 역시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먹는 게 아닐까. 아니다. 꼭 여행에서만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먹는 게 중요하다. 소설가 제임스 설터는 “삶은 날씨고 삶은 식사다”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날씨가 화창하면 즐겁고, 식사가 맛있으면 행복하다. 좋은 날씨 속에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면 인생은 기본적으로 평온하고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한결청국장의 소박한 한상. |
영주에서의 첫 메뉴는 청국장찌개다. 영주에는 부석태라는 품종의 콩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콩 중에서 가장 굵은데, 청국장과 간장·고추장·두부를 만들었을 때 구수한 맛이 훨씬 진하다. 식감도 부드럽다. 풍기역 앞에 자리한 3대째 이어오고 있는 청국장집이 있다. 이 집의 별미는 ‘콩탕’이다. 말 그대로 콩으로 만든 탕이다. 콩을 삶아서 거칠게 간 후, 마치 비지 탕이나 찌개같이 만들어 낸다. 식사는 기대 이상이었다. 반찬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만든 정성이 깃든 음식을 먹는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건성건성 만든 음식을 먹고 나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이젠 마음껏 먹지 못하는 나이라, 되도록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형편없는 식사로 배가 부르면 뭔가 손해 보고 억울한 느낌마저 든다.
1980년대 양옥 주택을 개조한 카페 하망주택. |
영주 시내인 하망동에는 꽤 근사한 카페가 있다. 1980년대 양옥을 카페로 개조한 곳인데, 이 집 커피가 훌륭하다고 누군가 추천했다. 실제로 내부는 80년대풍으로 꾸며져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는 집 같다. 커피 한 잔과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먹고 카페를 나와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말이다. 아, 가을 냄새가 나네.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 메모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말았다. 나중에 생각나면 쓰지 뭐. 안 나면 못 쓰는 거고. 게으른 작가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지금은 여행 중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맘대로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초가을 볕은 따스했고 공기는 약간 건조해서 바스락거리는 느낌이었다. 어느 양옥집 이층에는 빨래가 널려 나풀거리고 있었다. 햇빛 아래 나란히 널린 빨래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뭘까. 아무튼 잘 말라가는 빨래를 볼 때마다 행복이란 별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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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묵·돼지고기 찌개 ‘태평초’
시내에 온천 호텔이 있어 예약했다. 온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게 좋다. 여행이 끝나면 바쁜 일상이 이어지니, 쉴 수 있을 때 쉬도록 하자. 부석사에나 가볼까 하다가 이번에는 성혈사에 가보기로 했다. 부석사는 언제 가도 좋은 절이지만, 그간 여러 번 갔으니 이번에는 성혈사에 가서 나한전 문살이나 찬찬히 들여다보자. 그러고 보니 성혈사에 마지막으로 갔던 게 10년도 더 된 것 같다. 작고 소담했던 절은 어느새 불사가 상당히 이뤄져 법당이 제법 들어서 있었다.
연꽃·두루미 모양 등으로 장식된 성혈사 나한전의 문살. |
나는 곧장 나한전 앞으로 가 문짝을 들여다보았다. 나무 문살에는 연꽃, 게, 물고기, 두루미, 동자승의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조각이다. 나한전은 1555년에 처음 지어졌는데, 이 문살은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한참 동안 절집을 서성거리며 느긋하게 감상했는데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짙어지자 보기가 더 좋았다.
숙소로 돌아와 온천을 한 번 더 하고 근처 호프집에서 치킨 한 조각에 맥주를 한잔하고 들어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옛날 같으면 지역의 향토 요리를 하나라도 더 맛보려고 애썼겠지만 지금 무리하려고 하진 않는다.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걸 먹는다. 어차피 혼자 떠나온 여행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7시, 하망동 주택가에 자리한 묵집에서 태평초라는 음식을 먹었다. 시원하고 담백한 육수에 메밀묵과 돼지고기를 넣고 끓여낸 찌개인데 칼칼해서 아침으로 먹기에 좋다. 이른 시각인데도, 옆자리에는 한 가족이 앉아 묵밥을 먹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들 내외로 보이는 부부, 그리고 초등학교 이삼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 둘이었다. 아이들 옆에는 책가방이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아마 여기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아빠는 출근하고, 아이들은 학교로 가는 모양이었다. 역시 영주다운 풍경이군. 아마도 옛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저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때는 학교를 마치고는 저 가방에 도토리를 가득 채우고 집으로 오지 않았을까, 하고 멋대로 상상했다. 저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 문득 이 풍경을 떠올리며 어떤 그리움에 젖어들겠지. 친구나 동료들에게 내가 살았던 영주에서는 아침에 집 가까운 식당에서 묵밥을 먹고 학교에 갔지, 하고 말하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여행을 하며 이런 상상을 하는 순간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풍경의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
아침을 먹고 무섬마을을 돌아본 후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랐다. 온천도 했고, 근사한 카페에서 치즈 케이크도 먹었다. 절집에서 서성이다가 혼자 맥주도 마시고는 동네 사람들이 가는 식당에서 맛있는 아침도 먹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뭘 얻었을까? 아 참, 이런 생각을 하지 말자. 꼭 뭔가를 얻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즐겼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이는 이틀 동안 좋은 여행을 했고 내 인생의 이틀은 그래서 더 좋았다. 나는 출발하기 전에 산 생강도넛 하나를 베어 물었다. 그 사이 가을은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달콤쌉싸름 생강도넛 ‘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