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엔 생명, 사람엔 평화…수몰지·갯벌의 ‘위대한 탄생’
[박미향의 요즘 어디 가] 고창·무안 람사르 습지 여행
무안 식영정 인근에 있는 코스모스 군락지.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사진 촬영을 하며 가을 여행을 즐긴다. |
1971년 2월 이란 람사르에서 체결된 ‘람사르 협약’은 인간이 자연과 공생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물새 서식처로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이란 정식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람사르 협약은 생물 다양성의 보고인 습지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둔 환경 협약이다. 습지란 무엇인가. 국립생태원 자료를 보면, 습지는 영구적 혹은 일시적으로 습윤한 상태를 유지하고, 그런 환경에 적응된 식생이 서식하는 장소를 말한다. 2018년 기준 창녕 우포늪, 울주 무제치늪 등 한국의 여러 곳이 람사르 습지 목록에 올랐다. 전북 고창 운곡습지(2011)와 전남 무안갯벌(2008)도 그중 하나다. 람사르 습지 여행을 지난달 다녀왔다.
해설사와 함께하는 운곡습지 여행
한국관광공사 전북지사가 강소형 잠재관광지(여행지로서 성장 잠재력은 높지만 인지도는 낮은 곳)로 지정한 운곡습지(고창군 아산면 운곡리 일대)에 지난달 12일 도착했다. 탐방안내소(친환경주차장)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운곡습지 자연생태공원 초입까지 운행하는 전기 탐방열차였다. 요금은 2000원(중학생 이상. 3살 이하 무료, 초등학생 1000원. 편도 기준).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동절기)까지 1시간마다 운행한다.
탐방열차는 운곡저수지 옆을 달렸다. 느린 속도만큼 저수지 물 냄새가 천천히 다가왔다. 열차에 동승한 나오미 생태환경해설사가 저수지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인공저수지인데, 이게 1980년대에 생기면서 결국 지금의 습지가 생긴 셈이죠.”
1980년대 영광한빛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됐다. 발전소 사용용 공업용수 조달이 급선무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운곡저수지 자리가 낙점됐다. 이 과정에서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운곡리와 용계리 9개 마을 156가구가 고향 마을을 떠났다. 일부 마을은 물에 잠겼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 지난 30년간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마을 주민이 농사를 짓던 논엔 나뭇가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비가 함박 온 날이면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울창한 고창 운곡 습지 숲 이곳저곳에는 자연이 빚은 웅덩이가 많다. |
이윽고 약 860여종의 생명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총 1797㎢ 면적의 땅에는 네발나비, 산제비나비, 각시붕어, 모래무지, 청개구리 같은 작은 생물부터 희귀동물인 오목눈이, 방울새, 황새, 황조롱이까지, 멸종 위기동물로 지정된 수달, 황새, 삵, 구렁이부터 가시연 같은 희귀한 식물들까지 둥지를 틀었다. 현재 이들 동식물을 포함해 어류 533개체, 양서·파충류 12종, 조류 611개체, 포유류 11종, 곤충 297종, 나비 22종이 서식하고 있다. 방치되다시피 한 이곳은 점차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습지의 쓰임새가 알려지면서다. 지구온난화 주범인 이산화탄소량 조절, 오·폐수에 있는 유독성 물질 제거 등 습지는 요긴한 존재였던 것이다.
설명을 마친 나오미 해설사가 오베이골로 안내했다. 매산재, 행정재, 호암재, 백운재, 굴치재 등 5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교통의 요충지라 해서 ‘오베이골’ ‘오방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고개를 들자 울창한 가지 사이로 한점 빛나는 햇살이 보였다. 보석처럼 영롱했다. 숲은 해를 다양한 모양새로 품는다. 아래로 눈을 돌리자 가지가 빠진 듯한 물웅덩이가 보인다. 반사된 나뭇가지다. 모딜리아니 그림처럼 고요하다.
나오미 해설사는 “2019년엔 고니 6마리가 날아온 적이 있다. 작년엔 수련 옆에 고니가 수십마리 앉은 것도 목격됐다. 철새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것”이라며 “그만큼 이 습지는 위대한 곳”이라고 말한다. 한참 걷는데 부서진 집의 잔해가 보인다. 급하게 떠난 마을 사람들의 흔적이라고 했다. “늦반딧불이도 나오는데요, 환경 지표가 되는 곤충이죠. 습지 나무 80%가 버드나무예요.”
고창 운곡습지를 둘러보는 데 편리하게 조성된 나무데크 길. |
그가 안내하는 흙길이 끝나자 돌연 나무 데크 길이 나타났다. 습지 이곳저곳으로 뻗어있는 길이다. 그런데, 다른 여행지 데크 길과는 사뭇 모양새가 다르다. 다른 나무 데크 길에 견줘 좁다. 성인 한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다. 나 해설사는 “최대한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숲에 울려 퍼지는 새소리를 따라 데크 길을 더 걷자 수십m가 넘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나타났다. 지나던 여행객 중 한 명이 노래한다. “미류나무 꼭대기에 ○○○ 빤스가 걸려 있네.” 낯선 이가 부른 노래에 박장대소가 터진다. 1970년대 ‘국민학교’ 교실에서 친구를 장난삼아 놀릴 때 부른 노래다. 박목월이 작사한 동요 ‘흰 구름’이다. 원래 가사는 ‘조각구름 걸려 있네’. 정확히 따지면 ‘미류나무’는 틀린 말이다. 영어 명칭은 포플러이고, 우리말 이름은 미루나무다. 미국에서 온 버드나무란 뜻이다.
마침내 습지 생태공원을 빠져나오자 크고 작은 고인돌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한다. 전국 3만여기 고인돌 중 전북 지역에 그 10%에 해당하는 3000기가 있다고 한다. 그 3000기 중에 60%가 고창에 있다고 하니, 이제 고창은 복분자의 고장이 아니라 ‘습지와 고인돌의 고장’이라 불려야 하지 않을까.
고창 도산리에 있는 고인돌. |
고창에는 울창한 숲과 고요한 절을 품어 안은 선운사도립공원도 있다. 도솔암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좌변굴(일명 진흥굴)은 오묘하다. 신라 진흥왕이 이 굴에서 수행했는데, 그의 호가 ‘좌변’이다.
운곡습지는 대략 4코스로 나뉜 길로 여행할 수도 있다. 각각 1코스(3.6㎞) 1시간30분, 2코스(9.6㎞) 3시간, 3코스(10.1㎞) 3시간50분), 4코스(10.1㎞) 3시간10분이 걸린다. 습지는 해설사와 함께 여행하는 게 좋다. 운곡습지탐방안내소엔 자연환경해설사가 상주한다. 무료로 예약(063-564-7076)할 수 있다. 고창군 생태관광 주민사회적협동조합(063-654-5582)에서도 해설사 동반 여행 신청이 가능하다.
황토갯벌랜드에선 막힌 가슴이 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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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도착한 전남 무안 황토갯벌랜드에서 여행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조형물을 발견했다. 붉은색 게 모양의 조형물인데, 배시시 웃게 만드는 글이 적혀 있었다. “난 농게~ 나랑 농게 좋지?” 그 조형물 옆으로 나무 데크 길이 길게 뻗어 있는데, 그 길을 걸으면서 만끽할 수 있는 풍광은 울창한 숲도, 찰랑거리는 파도도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갯벌이다. 한없이 펼쳐지는 갯벌은 생경하고 이국적이다. 현실이 답답한 그 누구라도 이 광대한 갯벌을 한눈에 담으면 속이 시원하게 뚫리고도 남을 터. 거기에 갯벌 위로 주유하는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까지 시야에 담으면 가슴마저 설렌다. 무안 갯벌의 매력이다.
무안의 갯벌 면적은 146.7㎢로 2001년 국내 1호 갯벌보호습지로 지정됐고 2008년엔 람사르 습지 목록에 올랐다. 그해 갯벌도립공원 1호로도 지정됐다. 문세영 무안생태갯벌사업소 해양수산연구사는 “무안 갯벌은 전국의 5.9%, 전남 갯벌의 14.2%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무안 ‘황토갯벌랜드’ 나무데크 길에서 한 여행객이 갯벌을 바라보고 있다. |
황토갯벌랜드는 무안 생태의 보고인 갯벌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갯벌생태과학관, 숙박 시설, 전망대를 비롯해 여러 모양의 조망 시설을 갖춘 황토갯벌랜드는 팬데믹 이전만 해도 20만명이 찾는 인기 여행지였다. 문세영 연구사는 “무안 갯벌은 원시성을 유지하고 있기에 보존가치가 높고 갯벌의 생성과 소멸 과정 관찰도 용이해 찾는 이가 많다”고 말한다.
황토갯벌랜드에는 연면적 3378㎡, 지상 2층 규모의 무안생태갯벌과학관도 있다. 벽마다 촘촘히 적혀 있는 갯벌 정보를 읽다 보면 자연과의 공생 노력이 얼마나 중요하지 깨닫게 된다. 아이들 생태교육장으로 더없이 맞춤하다. 과학관 자료를 보면 무안 갯벌에는 총 2169종의 동식물이 산다. 갯벌 습지에서 서식하는 새를 물새라고 하는데, 무안 갯벌에는 120여종의 물새가 관찰된다. 게와 조개 등이 넉넉한 갯벌은 먹거리가 풍부한 옥토다. 청둥오리, 왜가리, 물떼새, 도요새 등도 서식한다.
알싸한 갯벌 바람과 헤어지고 무안읍 물맞이길에 있는 ‘물맞이 치유의 숲’으로 향했다. 들머리부터 알록달록한 보랏빛 천일홍, 연분홍 미니백일홍, 베고니아, 주황색 메리골드 등 가을맞이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이곳은 본래 예비군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훈련장이 이전하자 무안군이 나서서 ‘산림치유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는 숲으로 조성했다. 총 125ha 크기의 숲은 아늑한 길 여러 개가 곳곳에 배치돼 있다. 1.16㎞의 물맞이 숲길, 1.31㎞의 향기맞이 숲길, 1.02㎞의 바람맞이 숲길, 2㎞의 수변의 숲길, 0.35㎞의 감성의 숲길, 2.5㎞의 전망의 숲길 등이다. 걷다 보면 마음의 울화병이 저절로 치유되는 기분이 든다. 이팝나무, 비자나무 등 숲을 지키는 나무들도 손짓하는 듯하다. 화해와 공생, 치유의 손짓 말이다. 갯벌 위 뭉게구름이 이 숲에도 있다. 하얀 구름이 마음의 평화를 선물한다. 주중 100명, 주말 300명까지 수용 가능하기에 예약은 필수다. 지난해 말 문 열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숲 여행’ 맛집이다.
무안 ‘물맞이 치유의 숲’ 초입에 조성된 꽃밭. |
무안 가을 여행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또 있다. 몽탄면 호반로에 있는 식영정은 조선 시대 학자 한호 임연(1589~1648)이 낙향해 지은 정자다. 이 일대를 휘감아 돌며 지나가는 영산강이 보인다. 정자 마당에는 둘레가 무려 3.4m나 되는 팽나무가 서 있다. 나이가 500살이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됐다. 하늘 넓은 줄 모르고 마구 가지를 뻗은 팽나무에선 강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소리가 들린다. 사부작사부작! 발소리 같기도 하고 악기가 내는 소리 같기도 하다. 팽나무 옆에는 둘레가 3.2m인 보호수 푸조나무도 있다.
식영정에서 1~2분 걸어가면 ‘영산강제2경 몽탄노적’이란 글이 적힌 돌 비석을 발견한다. ‘몽탄’은 ‘꿈여울’이란 뜻. ‘노적’은 ‘갈대피리 소리’란 뜻이다. 합쳐 ‘꿈여울에 퍼지는 갈대피리 소리’란 말이다. 몽환적인 의미에 취해 감상에 젖다가 눈을 돌리면 무안군이 2년 전 조성한 1만6000㎡ 규모의 코스모스 꽃밭과 데크 길이 보인다. 최근 여행 사진 맛집으로 소문나기 시작한 곳이다. 노년의 사랑을 맘껏 피우고 있는 연인부터 이제 갓 시작한 핑크빛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젊은 커플들까지 코스모스 길엔 사랑이 만개해 있었다.
고창·무안/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