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남자로 만든 ‘남성화 호르몬’…옛동독의 도핑범죄

여자를 남자로 만든 ‘남성화 호르몬’
여자를 남자로 만든 ‘남성화 호르몬’

판사 : 언제 약을 복용했죠?


크리거 : 1983년에 파란색 약과 피임약을 받았어요. (판사에게 구겨진 종이를 건네며) 제가 소녀일 때 어떻게 생겼는지 판사님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약물, 주사, 규칙 위반, 그리고 제 성별을 바꾸도록 이끈 혼란스러움 그 이전의 모습을 말이에요.


판사 : 변화가 나타난 건 어떻게 알았죠?


크리거 : 웬들러 박사가 준 약물을 먹은 뒤 열, 오한, 그리고 심한 경련이 있었어요.


판사 : 아팠던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무엇이었나요?


크리거 : 1987년에 입원을 했어요. 웬들러 박사가 병실로 와서 제게 준비하라고 말했어요. 다음 번 시합 출전 준비를 해야 했죠. 그들은 저를 기계처럼 이용했어요.


판사 : 몸에 변화가 나타난 걸 언제 느꼈죠?


크리거 : 밖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제 스스로 여자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들로부터 숨었죠. 제 몸이 싫었고, 마음 속은 공황 상태에 빠져 미칠 것 같았어요.


판사 : 그러고 나서는요?


크리거 :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몇몇 의사에게 가서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뀔 수 있는지 물어봤어요. 더 이상 이런 몸으로 살 수 없었어요.


판사 :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고통 받았던 것 같은데, 도움을 받았나요?


크리거 : 네, 1997년에요. 성별을 바꿨죠. 전문의에게 유방 절제, 자궁 적출 등 몇 가지 수술을 받고 남성이 되었어요.


판사 : 요즘은 괜찮나요?


크리거 : 여전히 우울할 때가 있어요. 직업도 없고요. 하지만 제 어머니가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어머니는 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상관없이 항상 저를 사랑할 거라고 말한답니다.[1]

보조 수단, 비타민, 그리고 스테로이드

2000년 5월 30일 청바지 차림에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머리를 짧게 자른 남성이 독일 대법원 법정에 섰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아스 크리거(Andreas Krigger). 외관상 명백한 ‘남성’으로 보였지만, 법정에서의 증언처럼 젊을 적에는 하이디(Heidi)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그는 동독 시절 국가 차원의 도핑을 진두지휘한 만프레드 에발드(Manfred Ewald)와 만프레드 호프너(Manfred H?ppner) 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여러 운동 선수들 중 하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었다. 이후 서독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경제가 회복되었지만, 동독은 서독의 길을 밟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민주주의가 사라졌고, 쓸 만한 생산 시설을 소련에 빼앗겨 만성적인 불황이 지속되었다. ‘철의 장막’ 밖의 자본주의 국가들 뿐만 아니라 압제자에 가까운 소련에게 국가의 자존심이 짓밟힌 동독은 운동 경기에서 성과를 내는 데에 골몰했다.[2] 비교적 빠르고 저렴하게 체제의 우월함을 선전하고, 나라의 명망을 드높이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를 남자로 만든 ‘남성화 호르몬’

1951년 동독은 자국 올림픽 위원회를 만들었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동독은 서독과 함께 단일팀으로만 올림픽에 참여해야 했다. 1965년이 되어서야 동독은 IOC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고, 단일팀 국기와 국가를 사용하는 제한된 조건 아래 처음으로 서독과 갈라져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68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동독 당국은 재능이 있는 유소년을 조기에 발탁해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전폭으로 지원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수들의 경기력을 끌어 올리는 국가 차원의 노력은 새로운 훈련 방법을 개발하고, 최신 스포츠 의학을 적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동독 정부는 1965년 국가 소유의 제약 회사 예나팜(Jenapharm)이 개발한 튜리나볼(Turinablo)이라는 약물에 주목했다. 시판된 지 1년여 만에 근육과 힘을 필요로 하는 운동 종목의 남자 선수들이 튜리나볼을 애용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만프레드 에발드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임상 연구를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완곡하게 약물을 ‘보조 수단(supplemental means)’으로 바꿔 부르긴 했지만.


1989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공개된 극비 문서에 따르면 튜리나볼의 효과는 여자 선수에서 더욱 탁월했다.[3] 한 예로 연구 초창기에 11주 동안 매일 튜리나볼 14밀리그램을 복용한 여자 투포환 선수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미 14년 동안 투포환 연습을 꾸준히 해온 선수였지만 저용량의 튜리나볼을 짧은 기간에 복용한 것만으로도 근력이 증가했고, 기록도 2미터 가까이 상승했다.

여자를 남자로 만든 ‘남성화 호르몬’

1972년 비로소 독립적인 국가로 처음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 동독 선수단은 총 66개의 메달을 획득하고, 종합 3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소련과 미국에 뒤쳐졌지만, 바로 옆에서 올림픽을 개최한 경쟁자 서독을 앞지른 뿌듯한 결과였다. 동독 당국은 약물을 통한 경기력 강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선수들에게 투여하는 튜리나볼의 용량은 점점 늘어났고, 일정 주기로 복용과 중단을 반복하면서 약물의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선수단의 활약이 계속되자 동독 당국은 새로운 고민에 빠져 들었다. 자국 선수가 약물 검사에 적발되어 이제껏 쌓아 온 위상이 추락할까 두려웠다.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1974년 효과적인 도핑과 적발 회피를 목적으로 하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가동되었다. 이를 관장하는 계획은 “연구 프로그램 08(research program 08)”로 불리다가 나중에 “국가 계획 연구 주제 14.25(State Plan Research Theme 14.25)”로 바뀌었다. 한층 강화된 프로그램 덕분일까? 1976년 올림픽에서 동독은 금메달 40개를 획득하며 34개에 그친 미국을 제쳤다. 특히 여자 수영 선수들은 개인전 금메달 11개 중 9개를 따 내는 기염을 토했다.

여자를 남자로 만든 ‘남성화 호르몬’

안드레아스 크리거, 아니 당시 소녀였던 하이디 크리거도 이 계획에 따라 16세에 코치가 ‘비타민’이라며 건네는 파란색 알약(튜리나볼)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약물은 포장지가 벗겨진 채 포일에 싸여 있어 무슨 성분인지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185센티미터, 70킬로그램으로 호리호리했던 그는 약물 복용 2년 뒤 105킬로그램의 우람한 체격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기록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1986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21.10미터의 투포환 기록으로 금메달을 거머 쥐었다.

1986년 하이디 크리거의 여자 투포환 경기 결승 장면. https://youtu.be/SCU5Jre70hw

“우리는 여기에 노래가 아니라 수영을 하러 왔습니다.”

“그(마르기타 굼멜)는 거대했어요. 엄청난 어깨와 팔을 갖고 있었죠. 우리가 마지막으로 겨뤘을 때 이후로 몸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명백히 남자 같은 여자였어요.”[4] -브리기트 베렌돈크

비밀 문서를 입수해 남편 베르너 프랑케(Werner Franke) 교수와 함께 동독에서 국가 차원으로 이뤄졌던 도핑의 실태를 처음으로 폭로한 브리기트 베렌돈크(Brigitte Berendonk)는 젊을 적 원반 던지기 선수였다. 그는 1968년 올림픽에 출전했을 때 한때 자신의 모국이기도 했던 동독의 선수들에게 급격하게 나타난 변화를 감지했다. 그 중 한 명은 도핑을 총지휘하던 의사 만프레드 호프너의 지휘로 체계적인 도핑과 훈련을 통해 19.61미터라는 전례 없는 기록으로 금메달을 거머쥔 마르기타 굼멜이었다.


약 20년 뒤 투포환 대표로 나선 크리거도 비슷했다. 근육의 발달로 우람한 체력의 소유자였던 그를 얼핏 봐서는 남자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의 선수들은 단백동화남성화 스테로이드(AAS), 즉 남성 호르몬의 영향이라 생각했고, 그에게 ‘호르몬 하이디(hormone Heidi)’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붙여줬다.


테스토스테론으로 대변되는 AAS는 어떻게 크리거의 몸에서 남자 못지 않은 근육을 발달시켰을까? 체내에서 테스토스테론은 ‘인슐린유사성장인자-1(IGF-1; insulin-like growth factor-1)’의 생산을 증가시키는데, 이 물질은 다시 ‘엠토르(mTOR; mammalian target of rapamycin)’라는 단백질 합성 조절 신호전달체계를 활성화시킨다. 활성화한 엠토르는 세포 내의 아미노산을 원료로 근육 단백질을 만드는 일명 ‘동화(同化; 단순한 물질로 보다 복잡한 화합물을 만드는 과정)’ 작용을 일으킨다. 부가적으로 테스토스테론은 아미노산이 근육세포 외부로 빠져 나가는 것을 방지해 아미노산이 근육 단백질로 변환되는 효율을 증가시킨다.[5]

여자를 남자로 만든 ‘남성화 호르몬’

동독 정부가 선수들에게 몰래 투여한 AAS, 즉 단백동화남성화 스테로이드는 근육을 키우고 힘을 늘리는 데에 효과적이었지만, 한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단백동화뿐만 아니라 남성화 효과도 같이 일어났다. 여자 선수들의 목소리가 남자처럼 굵어지고, 온 몸이 털과 여드름으로 뒤덮였다. 동독의 의료진과 체육 관계자는 부작용을 인식했지만, 도핑으로 거둘 수 있는 성과가 컸기에 남성화 부작용을 외면하거나 무시했다. 한 예로 국제 수영 대회에서 사람들이 동독 여자 선수들의 낮은 목소리를 지적하자 코치는 한 마디로 받아 쳤다.


"우리는 여기에 노래가 아니라 수영하러 왔습니다.”[6]


아울러 기본적으로 남성호르몬인 AAS는 여자 선수들의 몸에서 호르몬의 교란을 일으켰다. 생리가 불규칙해지고, 난소에 낭포가 생기고, 성욕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일부 선수들은 기형아를 출산하는 고통을 겪었다. 크리거는 매우 드문 경우로 AAS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별을 바꾸는 계기로 작용했다. 약물 복용 전에도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두고 고민이 많았던 그는 약물 복용 후 몸이 남성적인 모습으로 바뀌면서 더 큰 혼란에 빠졌다. 부지불식 간에 복용한 약물이 자신의 고민과 결정에 영향을 줬다는 생각에 훗날 그는 도핑에 관련된 사람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들이 하이디를 죽였어요."[7]

본격적인 도핑의 세계화

2000년 7월 18일 통일 전 동독에서 도핑을 이끌었던 만프레드 에발드와 만프레드 호프너는 미성년자를 포함한 운동 선수들의 육체에 의도적인 피해를 끼친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국가의 지시를 받은 방조범 역할만 인정되어 각각 22개월과 18개월의 집행 유예라는 가벼운 벌을 받는 데에 그쳤다. 판결 내용이 오랫동안 겪었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지만 재판에 원고로 참여한 동독의 선수들은 유죄 판결에 만족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전 세계는 국가 차원으로 자행된 범죄에 분노했다. 하지만 운동 경기에서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뒷받침한 동독의 선수 육성과 지원, 과학적인 훈련 방법, 스포츠 의학은 세계 곳곳에서 재현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 출신의 코치, 의사, 연구자는 미국, 뉴질랜드,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한국’ 등 많은 나라로 건너가 운동 선수의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비법을 전수했다.[8]


캐나다의 육상 코치 찰리 프랜시스(Charlie Francis)는 오래 전부터 동독의 선수 지원이나 운영 방법에 경도된 사람 중 하나였다. 선수의 기량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기 위해 최신의 훈련 방법, 마사지, 물리 치료와 함께 약물이 동원되는 것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다투는 수준에서는 미세한 차이도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1981년 프랜시스는 자신이 키우던 자메이카 이민자 출신의 젊은 선수에게 약물을 투여하기로 결정했다. 그 선수는 7년 뒤 서울 올림픽에서 운동 경기 역사 상 가장 악명 높은 도핑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그의 이름은 바로 벤 존슨(Ben Johnson)이다.

[1] Ungerleider, S., Faust's Gold: Inside the East German Doping Machine --Updated Edition. CreateSpace Independent Publishing Platform, 2013: p. 134-5.


[2] Hunt, T.M. and J. Hoberman, Drug Games: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and the Politics of Doping, 1960?2008. University of Texas Press, 2011: p. 150-1.


[3] Franke, W.W. and B. Berendonk, Hormonal doping and androgenization of athletes: a secret program of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government. Clin Chem, 1997. 43(7): p. 1262-79.


[4] Ungerleider, S., Faust's Gold: Inside the East German Doping Machine --Updated Edition. CreateSpace Independent Publishing Platform, 2013: p. 127.


[5] Cooper, C., Run, Swim, Throw, Cheat: The Science Behind Drugs in Sport. OUP Oxford, 2012: p. 143-4.


[6] Janofsky, M., OLYMPICS; Coaches Concede That Steroids Fueled East Germany's Success in Swimming. The New York Times, 1991. www.nytimes.com/1991/12/03/sports/olympics-coaches-concede-that-steroids-fueled-east-germany-s-success-in-swimming.html.


[7] Longman, J., DRUG TESTING; East German Steroids' Toll: 'They Killed Heidi'. The New York Times, 2004. www.nytimes.com/2004/01/26/sports/drug-testing-east-german-steroids-toll-they-killed-heidi.html.


[8] Johnson, M., Spitting in the Soup: Inside the Dirty Game of Doping in Sports, VeloPress, 2016: p. 110.

최강/ 정신과의사, 서울명병원 정신과장 ironchoi@hanmail.net

2018.08.1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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