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궁궐은 힙스터의 명소

1960년대 초반 창경궁 춘당지엔

케이블카 떠다니고 벚꽃놀이 명소

1대 사진가 청암 임인식씨

1956년 최초 사진전문 화랑 열어

궁궐사진전 열었으나 흥행은 실패

2대 정의씨, 하늘 좋은 날이면 궁궐행

감시 심했지만 좋은 사진 건지는 재미

중앙청 부수는 날 준영씨 데리고

함께 사진 찍으며 현장 기록

예나 지금이나 궁궐은 힙스터의 명소

올해도 서울 궁궐은 만원이다. 노란 달이 기와지붕에 걸릴 때까지 사람이 넘쳐난다. 상반기 경복궁 야간특별관람 행사는 지난 6월까지 세 차례 열렸다. 하루 4500장씩 온라인 예매로 판매한 입장권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사모관대하고 치맛자락 휘날리는 청춘들이 ‘궁궐 인증샷’ 찍는 자태가 이제 자연스럽다.

사진 찍자, 당대 ‘힙스터’들도 궁궐에 갔다

예나 지금이나 궁궐은 힙스터의 명소

60여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계절마다 인파가 몰렸다. 고층 빌딩과 산수가 배경으로 어우러지며 한 폭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궁궐, 예나 지금이나 작품 사진 찍기 그만 한 곳이 또 없다.

“1956년 경복궁 경회루 앞에서 ‘사진촬영대회’가 열려 당대 내로라하는 사진가들이 다 모였어요. 아버지 친구들이 모두 사진 속에 계셨죠. 고궁 촬영, 과거에도 많이 했어요. 옛날부터 사진가들의 희망 사항이었거든요. 도시에서 자연과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고궁이니까. 서울 다방에서 간혹 종업원들을 모델로 섭외해 오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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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임정의(73) 사진작가의 회상이다. 여인이 도도하게 고개를 들자 사진가들이 우르르 셔터를 누른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양복과 한복이 시선을 끈다. “맞아요, 당대 유행의 선도자들이었다고.”

서울 구경이 곧 궁궐 유람을 뜻하던 시절이었다. “파티는 정서 깃든 고궁에서!” 경쾌한 글씨가 쓰인 펼침막이 창경궁 춘당지 식당에 내걸린 1960년대 초반 서울. 거리에 아직 우마차가 지나다니는데, 케이블카가 떠다니고 꼬마 기차가 질주하는 궁궐 풍경에 다들 감격했다. 1대 사진가 청암 임인식(1920~1998)은 사람들 노니는 궁궐 풍경을 집중해 찍었다.

예나 지금이나 궁궐은 힙스터의 명소

“아버지는 서울 궁궐의 아름다움을 잘 아셨어요. 기왕이면 여행 온 국내외 관광객들이 궁궐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안내 작품집’을 만들어볼 궁리도 하셨고요. ‘한국의 미’를 다룬 사진집을 엮으려고 봄, 여름, 가을, 겨울 해마다 궁궐 풍경을 사진에 담으시는 거예요.” 임인식은 아예 신한관광공사를 차려 한국 관광지를 대내외에 본격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1959년 관훈동 종로경찰서 옆에 한국 최초 사진화랑을 열어 ‘궁궐 사진전’을 열었는데, 흥행은 안됐다.

“너무 앞서갔다니까요. 난 삼청공원 냇가에서 사진 인화지 수세하는 일을 도왔는데 전시장에서 궁궐 사진이 한 장도 안 팔렸어요. 결국 관광안내 사진작품집도 만들지 못하고. 아버지가 서운하셨나봐요. 저보고 ‘사진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죠.” 임정의가 미간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복인지 짐인지 알 수 없지만, 대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궁궐 사진이 대를 물려 오다가 21세기 <서울&> 독자들과 만나게 됐다.

‘사쿠라’ 흐드러진 고궁 뱃놀이, 궁궐 애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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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애환은 서울 흥망사와 맞닿아 있다. 상자를 열자 궁궐의 너른 품속에서 제각각 상실의 시대를 다독여 살아갔던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70년대 사진기자 시절 임정의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궁궐로 내달렸다. “창덕궁 전경사진 찍으러 맞은편 가든타워에 올라가려고 하면, 청와대 방향이라고 경찰관이 따라붙어요. 경복궁도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들어가면 경비원이 감시하고요. 갑갑했죠. 고생해서 좋은 사진이 한 장 나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지요.”

예나 지금이나 궁궐은 힙스터의 명소

‘창경궁 벚꽃놀이’가 대단했던 때였다. 1930년대 이미 하루 입장객이 2만여 명을 넘은, 왜색 짙은 낭만이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70년대 절정을 이룬 창경궁 인파 풍경도 임정의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았다.


“일제의 궁궐 훼손 전략이 교묘하기 그지없었다고요. 원래 창경궁이었는데, 1911년부터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위락시설로 전락시켜서 다들 ‘창경원’이라 불렀어요. 춘당지 옆에 ‘수정궁’ 보며 노 젓고, 우리에 갇힌 낙타와 호랑이를 보며 신기해했죠. 궁에서 음식과 술도 팔았는데, 나중에 ‘궁궐에서 음주가무가 다 뭐냐’고, 반대 여론이 커서 1984년 폐쇄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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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은 박람회와 산업전시관, 미술관으로도 곧잘 활용됐다. 일제가 한반도 통치 5주년을 기념한다며 1915년 경복궁에서 ‘시정5주년 조선물산공진회’을 연 것이 첫 시작이었다. 수많은 전각이 헐려나갔다. 공진회가 끝난 자리에 르네상스식 석조건물인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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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0월1일 광복 10주년 기념으로 창경궁에서 ‘산업박람회’가 열렸는데, 아버지는 그런 국가적 행사를 모두 사진에 담았어요. 기록 가치를 보셨죠.” 농기구관과 원자관, 광업관, 연필관 등 분야별 최첨단 전시품들 사이로 입을 반쯤 벌린 시민들이 서서 새삼 광복과 휴전을 실감했다. 이듬해 창경궁에서는 ‘반공전시회’(반공전람회)가, 1962년 5월16일 경복궁에서는 5·16 쿠데타 1주년을 기념하는 산업박람회가 열렸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시작된 터였다. 국책사업과 궁궐 활용이 맞물려 돌아갔다.


궁궐은 600년 수도 서울의 자부심이었다. 정부가 궁궐 문화재 보존 가치에 주목한 1962년, 경복궁 등 문화재 복원에 예산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일제가 밑그림을 그려둔 위락시설로서의 공간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83년 창경궁 궁궐복원 정비사업을 시작으로, 1990년대 들어 서울 5대 궁궐 복원과 역사의 축을 바로잡는 노력이 천천히 드러났다.

역사를 물려받고, 시간의 경계선을 넘어

1995년 8월15일,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임준영(42)은 아버지 임정의와 함께 경복궁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광복 50주년’ 알림판을 붙인 크레인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을 댕강 잘라 공중으로 집어올린 순간이었다. 광화문 네거리를 빼곡히 채운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1996년 11월13일. 서울 중심에 우뚝 서 있던 대리석 건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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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영은 그즈음 찍었던 필름 몇 박스를 가져와 책상에 풀었다. 옛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사 건물이 지붕, 기둥, 장식, 석자재 별로 조각조각 쏟아져나왔다. “기억은 좀 희미해요. 중요한 역사적 장면이었지만, 저는 그저 아르바이트로 아버지를 도울 때라. 아버지 카메라로 막 찍고 돌아다녔거든요.” 머쓱해하는 임준영 옆에서 임정의가 한마디 보탠다. “일부로 데려간 거지. 난 건물을 보존해서 후세에 아픈 역사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어요.”


임준영은 이번 여름, 홀로 경복궁을 갔다. 인파 속에 섞여, 사라진 건물 대신 그 자리를 채운 사람들 궤적을 쫓았다. “굉장히 사람이 많았어요. 수백 번 사람들의 잔상을 찍어 합치며, 시간의 경계선을 넘어보는 거예요. 한복을 입은 옛날 사람들과 오늘날 사람들이 섞이니 이게 과거인지 현재인지 착각과 혼동이 오더라고요. 저 앞에 근정전은 오랜 세월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우리는 이렇게 스치듯 쌓여가는구나….”


기획·글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사진 청암사진연구소 제공

2018.07.2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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